다시 얼음성으로(1)
* * *
라플라스와의 협상으로 에키드나의 계획을 얼추 알게 된 유피테르.
레아를 끌어 내리고 새로운 신이 되겠다는 계획은 어설프고 맹랑했다.
그러나 마냥 웃어넘길 수는 없었다.
마족들은 이미 두 차례나 대륙 전쟁을 일으켰지 않은가?
화려한 전적이 있는 데도 눈을 감는 건 직무유기에 불과했다. 그렇다고 해서 유피테르에게 선택지가 많은 것도 아니었다.
“마스터 이제 어떻게 해?”
“뭐가 말이지?”
“언니들이 배신했는데 저택으로 룰루랄라 돌아갈 수는 없잖아.”
“그렇네.”
던전을 박살을 냈다고 해서, 유피테르와 오흐트에게 갈 곳이 생긴 건 아니었다.
무정하게 쏟아지는 사막의 햇살이 그들을 반겼을 뿐.
“그럼 델포이로 돌아가는 수밖에….”
오흐트는 끝말을 얼버무렸지만, 유피테르는 그 마음을 충분히 이해했다.
‘델포이 아카데미라면 칼리스토들이라고 해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는 곳이지.’
옴팔로스가 제구실을 하지 못한다고 해도, 여전히 결계는 작동했다.
나름 고대 아티팩트이었기에 쉽게 돌파하지는 못할 듯싶었다.
만에 하나 돌파하더라도 소리소문없이 델포이에 들어오는 건 불가능했다.
이런 이유에도 유피테르는 고개를 저었다.
“델포이는 안 돼.”
“왜? 그 선배를 구해내지 못해서 그래?”
“아니, 어차피 스카우트는 실패할 수도 있는 거니까. 가서 제의를 거절했다고 하면 그만이지.”
선택은 오로지 아카데미생의 몫이었다.
그 결과를 전달해주면 유피테르의 일은 끝이었다. 애초에 자유롭게 바깥으로 나갈 수 있는 명분을 주는 게 목적이었으니까.
유피테르는 오흐트를 바라보았다. 빵빵하게 부푼 볼이 햄스터 같았다.
칼리스토 중에서 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건 오흐트가 유일했다.
유피테르는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걸 가까스로 참고서 이유를 자세히 설명했다.
“델포이엔 리나가 있어. 방학 중이라고 해도. 답이 없지.”
“얼음성으로 돌아가지 않았어?”
“너나 내가 없는데 리나를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 있겠어? 그 애의 상태를 생각해봐.”
“아….”
그제야 오흐트는 델포이가 안 되는 이유를 이해했다.
‘그러고 보니 아직 마왕의 씨앗을 빼내지 못했었지.’
치유사로서 강한 자부심을 가진 오흐트는 환자의 상태를 완벽하게 기억했다.
그러나 상황이 상황이었다.
칼리스토 자매의 배신 앞에 그 어떤 일도 머릿속에 들어오지를 않았다.
백 년 가까이 친하게 지냈던 가족들이 목에 칼을 들이대는 것과 마찬가지였으니.
“마스터, 이제 어떻게 할 거야? 무슨 생각이 있으니까 그런 표정을 짓는 거겠지?”
“우린 얼음성으로 간다.”
“얼음성이라면…. 리투아 제국에 있는 마스터의 본가잖아? 거기는 왜? 뭔가 숨겨둔 아티팩트라도 있어?”
아르테미스의 얼음성은 대륙에서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유명한 곳이었다.
대륙에 이름을 떨친 마법사들을 많이 배출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오흐트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의문이었다.
굳이 왜?
얼음성은 여러모로 대단한 곳이었지만, 아지트로 사용하기엔 부적절했다.
두뇌파가 아닌 오흐트라도 이 정도는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었다.
“숨겨둔 게 있는 건 아니고…. 필요한 게 그쪽에 있을지도 몰라.”
“그래? 난 마스터의 결정에 따를게. 바로 이동할까?”
오흐트가 시원하게 대답하자, 놀란 건 오히려 유피테르 쪽이었다.
“괜찮아?”
“…?”
“한낱 인간에 불과한 나에게 모든 걸 맡겨도 괜찮겠냐는 말이야.”
칼리스토 자매들은 모두 역사에 굵직한 이름을 남긴 자들이었다.
유피테르가 사기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더라도 저울에 올려놓는 건 사치였다.
시간이란 생각 이상으로 가치 있는 것이었으니.
“난 언제나 마스터의 판단을 믿었다구.”
“그래?”
“왜 그런 표정을 지어?”
“유피테르라고 소리치던 모습에 아직도 생생한데.”
“아아아아악! 그건 잊어줘! 잊어주라고. 알았지?”
“장난이야. 농담이라고. 이제 그만 이동하자.”
* * *
얼음성 내부 가주 집무실.
가주 대행을 맡은 아리엘은 업무와 씨름 중이었다.
그녀의 옆에는 산을 넘어 산맥을 만든 서류들이 결재를 기다리고 있었다.
손 봐야 할 곳이 너무 많아 어디부터 해야 할지 헷갈릴 정도였다.
“이 일을 혼자서 전부 해냈다고? 능력 하나는 확실했었구나, 카르멘”
아리엘은 한때는 사랑했지만, 이제는 원수가 되어버린 한 남자를 추억했다.
직접 업무를 봐보니 카르멘의 능력이 얼마나 괴물 같았는지 실감이 났다.
그것도 잠시, 아리엘은 바로 다른 서류를 집어 들고서는 빠르게 읽어내려갔다.
촤르륵―.
그건 마법사단 충원에 관한 서류였다.
‘달의 몰락’ 사건 때, 아르테미스의 마법사단은 궤멸에 가까운 손해를 입었다. 마법사단 단장들마저 대부분 죽음을 맞이했다.
통솔력과 마법 능력을 동시에 지닌 인재를 쉽게 구해올 수도 없었다.
마족, 그것도 공작이 상대였으니 살아남는 것만으로도 기적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니 부족한 부분만 확대되어 보였다.
조금만 더 잘했으면, 조금만 더 신중했으면, 그들은 죽지 않았을 텐데―
이런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아아― 유피가 보고 싶어. 델포이 교수직은 잘하고 있으려나?”
상황이 실타래처럼 꼬이자, 강력한 힘을 지닌 유피테르가 보고 싶어졌다.
마블링에서 유피테르는 충격적인 데뷔전을 치렀다.
개인전, 단체전을 가리지 않고 압도적인 성적을 냈고, 낙원교도 사건에서도 영웅적인 희생을 했다고 들었다.
앞으로의 얼음성에 필요한 건 카르멘과 같은 압도적인 카리스마였다.
아픈 손가락이었던 아들이 그런 모습을 보여주는 게 너무 뿌듯했다.
“불렀어요?”
“어―?”
우당탕탕!
갑작스레 인기척이 들자 아리엘은 자리에서 넘어졌다. 서류가 꽃잎처럼 휘날리는 건 덤이었다.
놀라는 것도 잠시였다.
아리엘은 곁에 두었던 마나 지팡이를 들고선 바로 공격 마법을 준비했다.
야심한 시각에 방문한 손님이 좋은 사람일 리는 없었으니까.
“내리치는 번개여 나에게 힘을 내리소서!”
아리엘 식 번개 마법 – 뇌명(雷明)
파짓! 파짓!
리투아 제국 황실 출신답게 아리엘의 마법 숙련도는 제법 높았다.
마나는 곧바로 강한 기운을 머금은 번개로 바뀌어 밤손님을 노렸다.
마법 지팡이의 도움을 받긴 했지만, 결코 평범한 실력은 아니었다.
우웅!
회심의 공격은 너무나도 쉽게 막혔다.
별다른 마법이 아닌 방어막으로만 사용하는 걸 보고서 아리엘은 격의 차이를 느꼈다.
‘번개 마법을 이렇게 쉽게 막는다고?’
리투아의 황실과 4대 공작 가문의 마나는 특별한 성질을 가지고 있었다.
아르테미스의 얼음이 상대방의 마법을 얼리는 것처럼, 황실의 번개는 마법의 발동 속도를 늦췄다.
정체 모를 적은 번개 마법을 너무나도 가볍게 쳐냈다.
마법의 발동 속도조차 그녀보다 월등히 빨라, 대응하기도 벅찼다.
“누구죠! 감히 얼음성에 흙발을 내디딘 자는?”
아리엘은 당황하면서도 겉으로 티를 내지 않았다. 황실의 일원이었던 시절 받았던 교육의 힘이었다.
“하하하하….”
“웃지 말고 대답하세요! 그렇지 않으면, 아픈 꼴을 면하지 못할 거에요.”
아리엘은 으름장을 놓는 것과 동시에 마법을 발동시켰다.
아리엘 식 번개 마법 – 뇌명(雷明)
방금 전과 똑같은 마법이었으나, 딱 하나가 달랐다.
번개 줄기는 지팡이에서부터가 아닌, 적의 바로 머리 위에서 쏟아졌다.
‘이걸 피할 수는 없겠지?’
기존의 틀을 깨고, 출현 위치를 자유롭게 바꾸는 새로운 방식의 마법.
유피테르가 카테리나에게 가르쳐주었던 비기가 이곳에서 펼쳐진 것이었다.
그러나 침입자는 이번에도 가볍게 번개를 흩트려냈다.
꿀꺽―.
아리엘은 침을 삼켰다.
마법사단의 실력으로 저 침입자를 제압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여기서 무사히 빠져나가는 것 조차 의심되는 상황이었다.
죽음의 위기가 닥쳐오자, 아이들의 얼굴이 차례대로 떠올랐다.
유피테르, 카테리나, 제이스란, 마리안느.
그녀의 자식들은 각자의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내는 중이었다.
걸어온 날들보다 앞으로가 더 기대되는 미래의 유망주들 앞에서 꼴사나운 모습을 보여줄 수야 없었다.
‘엄마는, 포기하지 않아.’
아리엘은 지팡이를 강하게 쥐고서 상대방의 공격을 기다렸다.
한 번이라도 틈을 보이면 바로 반격 마법을 찔러넣을 기세로.
몇 초를 기다려도 침입자는 공격해오지 않았다. 그 대신 박수를 치며 천천히 다가왔다.
짝짝짝짝!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람.”
아리엘은 흐름을 따라가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속마음이 그대로 밖으로 흘러나왔다.
“피티아 학장의 라이벌이라는 거 정말 사실이었네요?”
“너, 넌 설마….”
* * *
유피테르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카테리나에게는 구동 방식을 알려주었지만, 어머니에게는 아니었다.
남매의 어머니는 지금 어깨 너머 배운 기술을 완벽하게 구사하고 있었다. 그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델포이 아카데미에서 높은 학점을 기록했다는 건 거짓이 아닌 듯했다.
아리엘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유, 유피테르니?”
“맞아요. 어머니. 지금 돌아왔습니다.”
큰아들이란 걸 눈치챈 아리엘은 달려와 유피테르를 와락 끌어안았다.
“엄마가, 엄마가 미안해. 목소리만 듣고도 유피 너라는 걸 알아챘어야 하는데. 너무 미안해.”
울먹이는 어머니를 보자 유피테르도 눈가가 촉촉해졌다.
“아니에요. 이런 식으로 나타나서 제가 더 죄송한걸요. 많이 놀라셨죠?”
“아니야, 아니란다. 엄마는 유피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해.”
유피라고 불러도 유피테르는 크게 반응하지 않았다.
얼음성에 홀로 남아 가문을 지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고 있었으니까.
‘처음에는 책임감 때문에 죽을 뻔했지.’
신의 하나뿐인 딸인 바실리의 빈자리는 거대했다.
천칭의 마도사가 되어 조디악을 이끌 뿐만 아니라, 칼리스토들의 마스터로 있어야만 했다.
자신의 선택 하나로 세계의 균형이 무너질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머리가 지끈거렸고, 헛구역질만 계속하게 되었다. 다른 이에게 이 자리를 맡길 수조차 없어 고통스러웠다.
자신의 어머니도 마찬가지였다.
세계를 지킨다는 거창한 건 아니지만, 아르테미스 공작 가문에 딸린 식속들은 상상 이상으로 많았다.
선택 하나에 목숨이 오가는 상황은 엄청난 스트레스로 다가올 게 뻔했다.
모자간의 끈끈한 해우가 이어지는 가운데 오흐트도 모습을 나타냈다.
“저, 저기….”
유피테르를 안아주던 아리엘은 오흐트와 눈을 마주쳤다. 귀엽다 못해 깨물어주고 싶은 외모였으나, 눈동자만큼은 어른보다 더 깊었다.
“내 정신 좀 봐. 손님에게 이런 흉한 모습을 보여줄 순 없지.”
아리엘은 유피테르를 놓아주고선 정화 마법을 이용해 얼굴을 깨끗이 했다. 그리고서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물었다.
“유피. 이 소녀는 누구니?”
“오흐트라고 하는 제 부하입니다. 그 전에 조금, 할 말이 있습니다.”
“그래? 엄마는 언제든 기다릴 수 있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