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그림(1)
* * *
‘바실리를 이곳으로 불렀다고? 아니야, 그럴 리 없어.’
라플라스가 소환한 기프트를 봤을 때 심장이 쿵―하고 내려앉았다.
도플갱어의 모습이 완전히 바실리와 똑같았기에.
감옥에 갇혀있는 걸 알면서도, 눈이 자연스레 그쪽으로 향했다.
깜빡―.
몇 번이고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러나 여전히 은하수 같은 은색의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왔다.
그건 틀림없는 ‘그녀’의 색이었다.
‘고작 마족 주제에 바실리를 협상 테이블에 올려놔? 아직 정신을 못 차렸군,’
유피테르는 결심했다.
어지간한 도화지로는 차마 다 담아내지 못하는 거대한 그림을 그리기로.
* * *
“정신을 차린 거야, 마스터?”
칼리스토의 주인을 보며 오흐트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이미 땅에 떨어져 기대감이 기적같이 부활해, 호칭마저 마스터로 돌아와 있었다.
유피테르가 앞에서 시야를 가로막고 있다는 게 이렇게 기쁠 일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유피테르는 오흐트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시선을 라플라스와 기프트에게로 고정했다.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은은한 마나에 던전마저 고개를 조아렸다.
라플라스는 압도적인 기운을 몰아내기 위해 정신을 집중했다. 기프트는 그 옆에서 고개를 갸웃할 뿐, 딱히 도와주지 않았다.
싸늘하다 못해 서늘해진 분위기를 깬 건 유피테르였다.
“바실리를 가지고 논 소감이 어때. 좋았나? 좋았겠지.”
“어떻게냐!”
유피테르는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뭐가 말이지?”
“어떻게 현혹 마법에서 벗어난 거지? 그건 에키드나가 직접 준비해준 건데!”
“너나 에키드나가 결국엔 마족에 불과해. 고작 그런 걸로 날 멈출 수 있다면 티폰은 그날 죽지 않았겠지.”
기프트를 보고 놀란 건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 속에 스며들어 있는 에키드나의 기운이 유피테르를 깨웠다.
마나 감지에 간신히 잡힐 정도로 연약한 기운은 바실리와는 전혀 상관없는 힘이었다.
그걸 빠르게 눈치챈 덕에 큰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기프트!”
라플라스는 손짓으로 명령을 내렸다.
기프트는 비행 마법을 사용해 순식간에 유피테르의 코앞에 도달했다.
“정말로 바실리 님의 도플갱어인 거야?”
평범한 비행 마법에도 오흐트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기프트가 사용한 마법의 구조가 바실리와 완전히 동일했기에.
고대 마법사들은 같은 마법식을 공유하고는 했다. 그러나 바실리의 경우에는 이야기가 달랐다.
그녀는 신의 딸이었으니까.
사랑하는 이의 모습을 어쭙잖게 닮은 몬스터를 보며 유피테르는 분노했다.
“감히 하찮은 미물 주제에.”
유피테르 식 특제 마법 – 니플헤임
푸른 마나는 공간을 통째로 얼려버렸다.
날아오던 기프트는 황급히 방향을 틀어 영향권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그러나 유피테르의 마나 제어력이 아득히 위였다.
기프트는 이렇다 할 반격조차 해보지 못하고 세상에서 지워져 버렸다.
멀뚱히 구경하던 다른 도플갱어까지 얼음 마법에 휩쓸렸다.
던전에는 이제 세 사람만 남았다.
“우, 우우우, 웃기지 마!”
라플라스는 현실을 외면했다.
던전이 부서지는 건 웃어넘길 수 있었다. 에키드나의 도움을 받으면 얼마든지 다시 만들 수 있었으니까….
그러나 도플갱어들은 아니었다.
그들을 키워내기 위해 온갖 심혈을 기울였다. 나태라는 칭호에 맞지 않게 말이다.
도플갱어 군대를 다시 만들기 위해선 다른 공작들과 마족들에게 부탁해 재료를 구해야만 했다.
그건 두 번 다시 하고 싶지 않은 경험이었다.
“날 화나게 했으니, 대가를 치러야겠지?”
“자, 잠깐. 잠깐만. 이야, 이야기를 들어줘! 에키드나가 원하는 걸 알려줄게.”
다급해진 라플라스가 협상을 원했지만, 유피테르에게 들릴 리 없었다.
“에키드나가 바실리를 쫓고 있다는 건 네 입으로 말하지 않았던가.”
그 말을 들은 라플라스는 아차 싶었다. 상황에 취해, 해서는 안 될 말까지 해버렸으니까.
하지만, 아직 모든 패를 보여주지는 않았다.
라플라스의 머릿속이 미친 듯이 돌아갈 때, 유피테르는 천천히 걸었다.
공작무기를 꺼내 들었다 해도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분노한 유피테르의 앞을 막을 수 있는 건 바실리와 창조신 레아뿐이었으니까.
‘생각해내 라플라스. 넌 공작 중에서도 뛰어난 계략을 펼치는 자잖아. 할 수 있어.’
라플라스는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마족의 두뇌를 맡았기에 평소 나태하게 지낼 수 있었다. 계략을 생각해내는 족족 성공했기에 그걸로도 충분했다.
라플라스는 유피테르에게 했던 말들을 빠르게 곱씹었다.
노력 끝에, 에키드나의 목적을 아직 이야기하지 않았다는 걸 찾아냈다.
이 정도면 충분히 협상 카드로 써먹을 만했다.
“이봐. 유피테르. 에키드나가 왜 바실리를 감옥에서 꺼내려고 하는지는 궁금하지 않은가 봐?”
“뭐…?”
유피테르가 발을 멈추자, 라플라스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신의 대리자라고 해도 이것만큼은 참지 못하겠지?’
유피테르가 자기 자신보다 바실리를 더 사랑한다는 건 유명했다.
오죽하면 적대하고 있는 마족 사회에도 간간이 화제로 올라올 정도였다.
“그걸 네가 알려주겠다는 건가?”
“여기서 무사히 돌려보내 줘. 그러면 에키드나의 목적을 알려줄게. 그게 서로 이득이 되는 거잖아?”
합리적인 제안이었다.
유피테르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마족을 멸망시킬 수 있었다. 그 시기가 굳이 지금일 필요는 없었다.
머리끝까지 분노가 차오른 건 맞았다.
그러나 에키드나의 속셈을 알 수만 있다면 그 정도의 대가를 치르는 건 일도 아니었다.
“어때. 좀 끌리나?”
“연락할 방법은 둘째치고, 네가 배신하지 않으리란 증거가 있나? 설마 나보고 마족을 믿어달라고 하지는 않겠지?”
“에이 그럴 리가 있겠어?”
지금이 기회라고 느낀 라플라스의 말은 점점 더 빨라졌다.
“단순히 믿어달라고는 안 하지. 자 받아. 그게 내가 내미는 조건이야.”
휘익!
나태의 공작무기 아케디아(Acedia)가 마법으로 날아와 유피테르의 옆에 안착했다.
“공작무기를 넘긴다고? 마스터 저놈 진심인가 봐.”
어느새 쪼르르 곁으로 다가온 오흐트가 말했다.
마족에게 있어 공작무기는 자부심을 넘어 정체성 그 자체였다. 공작들은 죽으면 대체하면 그만이었지만, 무기는 아니었다.
그건 창조신 레아가 마족에게 준 선물이었으니까.
‘진심인가?’
유피테르는 고민했다.
겉으로는 티를 내지 않았지만, 그의 속은 복잡했다.
심증만 있었던 칼리스토의 배신이 실제로 발생했기 때문이었다.
‘칼리스토들이 배신했다면…. 디오의 능력을 사용하지 못할지도 몰라.’
유피테르가 마음 편히 적을 박살 낸 건 하나부터 열까지 칼리스토 덕분이었다.
죽은 자를 불러내는 디오와 마도 공학의 일인자인 펜데.
이 둘이 도와주면 어떠한 상태에서도 정보를 얻어낼 수 있었다. 심지어 살아있을 때보다 양질의 정보일 때도 많았다.
그러니 굳이 양보하며 살려둘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지금 두 사람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확신이 서지를 않았다.
“좋아. 이렇게까지 해주니 한번 믿어보지.”
유피테르는 공작무기를 아공간에 수납하며 말했다.
여기서 라플라스를 죽이면 고작 마족 하나를 줄이는 것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를 놔준다면 더 큰 입질을 위한 미끼가 될 가능성도 존재했다.
“아주 탁월한 선택이야! 후회하지 않게 해줄게 고객님.”
라플라스는 유들유들한 표정을 지으며 마법을 준비했다. 그러면서도 유피테르에게서 눈을 떼지를 않았다.
그때, 볼을 빵빵하게 부풀린 오흐트가 다가와 조용히 속삭였다.
“마스터.”
“라플라스를 살려주는 게 마음에 들지 않나 보군, 만인을 똑같이 사랑하라는 레아교의 교리는 잊어버린 거야?”
유피테르가 다 아는 듯이 말하자, 오흐트는 더욱 기가 막혔다.
“그걸 아는 사람이 그렇게 행동해? 그리고 마족은 그 테두리에 포함 안 돼.”
“등을 찌른 배신자를 용서하라는 건 말이 안 되긴 하지.”
“말 돌리지 말고! 라플라스는 바실리 님을 모욕한 놈인데. 정말 가만히 둘 거야?”
마족이라는 것만으로도 열불이나 미치겠는데, 바실리 님의 얼굴로 장난까지 쳤다.
유피테르는 칼리스토보다 더 많이 바실리를 사랑했다. 가끔은 둘만 있는 것처럼 행동해서 부러움을 사기까지 했다.
그런데 어떻게 저자를 가만히 내버려 둘 수 있는가?
“때로는 기다리는 게 더 큰 이익이 될 때가 있어.”
“…?”
오흐트가 이해 못 한 얼굴을 하자 유피테르는 더 쉽게 설명했다.
“라플라스는 에키드나가 찾아왔다고 말했지. 또, 그녀가 뭘 원하는지도 알고 있어. 그렇다면 에키드나의 계획에 라플라스가 포함되었다는 말이겠지?”
“응응.”
“그렇다면 라플라스를 꼬드기면 좀 더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겠지. 어차피, 공작무기는 우리에게 있어. 아, 진품인 건 미리 확인했고.”
“아아! 맞아. 그렇네!”
오흐트는 감탄사를 연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유피테르와 오흐트가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이, 라플라스는 이동할 준비를 전부 끝냈다.
“어이, 유피테르.”
“뭐지?”
“한배를 탔는데. 그렇게 쌀쌀맞게 굴면 슬프다고?”
그런 말은 금시초문이었다.
“너와 동료가 된 기억은 없는데?”
“공작무기를 맡길 정도면 엄청나게 가까운 사이잖아. 내 말 틀려?”
“잡소리 말고 에키드나의 목적이나 말해주시지?”
유피테르는 흔들리지 않고 차분하게 원래 계획대로 밀고 나갔다.
“유머 감각이 떨어져도 너무 떨어지잖아, 그래서 사랑받겠어?”
유들유들한 말에 유피테르는 말없이 마나를 끌어올렸다. 그걸 본 라플라스는 기겁하며 정보를 풀어놓았다.
“에키드나가 원하는 건 신을 만나는 거야.”
“창조신 레아를?”
그 말을 듣자 떠오르는 게 있었다.
바로 마왕 티폰이었다.
티폰이 신에게 도전한 이유는 의외로 간단했다. 대륙 전쟁을 일으킨 죄를 마족만 받는 걸 납득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마족과 손잡은 인간은 유유히 대륙을 지배하고 있었다. 마치,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티폰은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바실리를 인질로 삼아 창조신 레아를 불러내려고 했었다.
“티폰의 의지를 계승하기라도 하는 건가. 창조신은 무정한 존재라는 걸 모르지 않을 텐데?”
창조신 레아는 인간을 사랑하는 듯하면서도 그렇지 않았다.
현시대를 살아가는 자들은 찬란했던 고대 문명을 하나도 계승하지 못했다. 그중에서는 인간의 뿌리가 되는 역사도 포함되어 있었다.
영생하지 못하는 인간들에게 왜곡된 역사란 그 무엇보다 큰 벌이었다.
적어도, 유피테르는 그렇게 생각했다.
“에이 설마. 에키드나가 티폰처럼 무른 성격이 아니라는 건 너도 잘 알 텐데?”
“확실히. 약간 미쳐있긴 해도 평범하지는 않지.”
“그치? 아, 이제 가봐야겠네.”
공간 이동 마법이 발동되자, 라플라스의 모습이 희미해졌다. 그는 타이밍에 맞춰 폭탄을 터트렸다.
“에키드나는 신세계의 신이 되려고 해. 잘 막아보라고 신의 대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