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플라스의 깜짝 상자(7)
* * *
유피테르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방금 전 보여줬던 겁에 질린 모습이 환상인 것처럼.
“마스터…?”
“그만.”
유피테르는 오흐트의 곁으로 다가와 신성 마나를 흩트려버렸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오흐트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이런 적은 한 번도 없었으니까.
‘무슨 생각이 있는 거지? 난 믿어.’
오흐트는 흔들리지 않았다,
칼리스토의 마스터는 늘 큰 그림을 염두에 두고서 행동했었으니까.
마나를 없애버린 건 무언가 추진력을 얻기 위한 것일 게 분명했다.
하지만, 상황은 기대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저 앞에 있는 건 바실리다. 감히, 그녀에게 이를 드러내다니. 네 신분을 잊은 건가?”
“마스터. 아니, 유피테르 아르테미스. 너 정말 제정신이야? 똑바로 봐. 저기 있는 게 정말로 바실리 님이라고 생각해?”
“그래. 틀림없다.”
“유피테르, 당신 정말….”
하고 싶은 말이 목구멍 끝까지 차올랐지만, 참아냈다.
유피테르는 칼리스토의 마스터였고, 그녀보다 아득히 먼 위치에 있었으니까.
‘내가 잘못 생각한 거야? 바실리 언니 제발 내게 답을 줘.’
유피테르에 대한 신뢰도가 바닥을 쳤다. 그가 칼리스토 마스터가 되고 난 후, 처음이었다.
‘뭔가, 생각이 있을 거라고, 연기라고 보였던 게 전부 사실이었어? 대비책조차 없었던 말이야? 이곳이 우리의 무덤인 거야?’
감춰두었던 초대 성녀의 마음이 그대로 새어 나왔다.
원래 위기 상황에서 믿을 수 있는 건 자기 자신뿐이었다. 힘들고 고통스러운 시절을 보냈었기에 잘 알고 있었다.
“브라보. 브라보! 이거 걸작인걸?”
라플라스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연신 박수를 쳤다.
에키드나에게 들었던 대로 유피테르의 약점은 명확했다. 분노한 상태에서 쏟아지는 보복이 무서워서 아무도 시도하지 못했을 뿐.
‘어지간한 정신공격도 먹히지 않는 초월자가 이런 공격에 당하다니 우습군.’
마왕 티폰을 가볍게 제압하고 목숨까지 빼앗은 유피테르.
둘 사이에는 숙련된 마법사와 갓 입문한 마법사 정도의 차이가 존재했다.
마족들은 유피테르를 공포의 대상으로 여겨, 음모를 꾸밀 때에도 그의 곁은 최대한 피했다.
타오르는 불꽃에 굳이 다가가고 싶지는 않았으니.
라플라스는 유피테르가 무력화된 시간을 적절히 이용했다.
“아이들아, 가서 너희들의 무서움을 똑똑히 보여주거라!”
수십 명의 도플갱어가 원을 만들며 오흐트에게 달려들었다.
제대로 된 훈련을 받았는지 포위망은 물샐틈없이 완벽했다.
상대방이 우위를 점하도록 내버려 둘 오흐트가 아니었다.
“무서움은 개뿔. 마족 공작 맞아? 다른 놈들처럼 좀 제대로 덤벼보라고.”
오흐트는 두려워하지 않고 마법을 준비했다.
오흐트 식 신성 마법 – 신성한 창
얼음 창을 연상하게 하는 창이 곧바로 모습을 드러냈다.
도플갱어 하나당 창 두 발을 꽂아버릴 수 있을 만큼 넉넉한 양이었다.
뛰어난 마나 제어력을 지닌 오흐트였기에 이 정도는 어렵지 않았다.
‘성녀’란 되고 싶다고 해서 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에 걸맞은 재능과 믿음을 지녀야만 신의 부름을 받는 거였다.
“그만두라고 했지!”
“아, 쫌! 계속 이런 식으로 나올 거야?”
유피테르가 마법을 또 방해하자 오흐트는 참아왔던 짜증을 쏟아냈다.
“….”
유피테르는 묵묵히 그 짜증을 받아주었는데. 오히려 그게 더 답답했다.
‘이번에는 마나를 건들지 않고 마법만을 노렸어. 뭔가 노리는 게 있는 걸까?’
생각을 하면 할수록 골치만 아팠다.
어차피 이런 건 특기가 아니었다. 오를레앙이었을 때는 물론, 지금도 그녀는 행동 대장이었다.
이럴 때는 손 가는 대로 하는 게 제일이었다.
“죽어라!”
훅!
그녀가 잠깐 한눈을 판 사이 도플갱어의 주먹이 날아왔다.
오흐트는 고개를 숙여 주먹을 피해냈다. 눈으로 보지 않아도 도플갱어의 거북한 마나가 느껴졌다.
덕분에 자신 있게 뻗은 주먹은 그대로 허공을 갈랐다.
‘허접한데? 유명한 몬스터를 복사하기라도 한 줄 알았는데 아닌가?’
마족 공작이 불러낸 비장의 수단치고는 파괴력이 약했다.
여러 종족의 모습을 하고 있었기에 최고만을 선별해온 줄만 알았다. 그러나 그런 것과는 별 상관도 없고 돌연변이도 아닌 듯 보였다.
“뭘, 꾸물거리고 있어? 계속 공격해!”
오흐트가 하나도 타격을 입지 않자, 라플라스가 손을 뻗으며 명령했다.
도플갱어들은 망설임 없이 달려들었다. 실패한 첫 번째 공격에서 무언갈 느꼈는지 남은 이들이 전부 각기 다른 방향에서 공격했다.
훅! 후욱! 슈욱! 채앵!
다양한 무기들이 특유의 소리를 내며 오흐트를 노렸다.
“수로 밀어붙이면 뭔가 이길 것 같은가 봐?”
오흐트 식 육체 강화법 ― 메르카르트
오흐트는 유피테르의 기술을 이용해 공격을 모두 흘려버렸다.
괜히 검의 성녀라고 불렸겠는가?
“…?”
“인간, 강하다.”
“공격하기, 쉽지 않다.”
도플갱어들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움찔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내가 그런 멍청한 짓이나 하라고 너희들을 불러낸 줄 알아? 모든 힘을 써서 초대 성녀를 작살내버려! 목숨까지 쓰란 말이다!”
라플라스는 고래고래 악을 썼다.
시간은 그의 편이 아니었다. 유피테르가 언제까지 침묵할지 몰랐으니까.
한시라도 빨리 초대 성녀를 쓰러트려야만 했다.
“뭐가 그리 급해? 천천히 놀아보자고.”
오흐트는 아공간에 손을 넣어 성검 오를레앙을 뽑았다.
고작 검을 든 것뿐인데 완전히 다른 분위기였다. 보는 것만으로도 베일 것같이 날카로웠다.
말과는 달리 한 번에 승부를 낼 요량이었다.
“…!”
“으으으!”
고작 검을 든 것뿐인데, 도플갱어들은 괴로워하며 몸부림쳤다.
성검이 마(魔)를 멸하는 성질을 가졌기 때문에.
탓!
오흐트는 땅을 박차며 검을 펼쳤다.
오를레앙이 만드는 길은 자유분방했다. 마치, 천진난만한 아이처럼.
샤악!
오를레앙은 앞을 가로막는 모든 걸 부수며 앞으로 나아갔다.
두려워 발이 꼬이는 도플갱어들은 막지 못하고 모두 단칼에 쓰러졌다.
이제 앞을 가로막는 건 라플라스와 손님뿐이었다. 오흐트는 칼에 묻은 피를 털어내며 말했다.
“칼리스토를 너무 무시한 거 같은데. 우리….”
우리라고 하기에는 이미 신뢰의 고리가 깨져 버린 상황이었다.
오흐트는 걸리는 부분을 굳이 정정했다.
“나는 너희 마족 공작들보다 훨씬 강하다고. 그러니 전력으로 덤벼. 그러지 않으면 저것들처럼 될걸?”
“젠장!”
명백한 도발에 라플라스는 부르르 떨었다.
나태의 공작이라는 칭호에 맞게 귀찮은 게 싫어 뒤에서 지원만 해왔었다. 도플갱어를 만드는 것만으로도 제 역할을 다하는 거였으니.
“그 옆에 있는 손님은 안 싸우는 거야? 아, 알았다. 마스터 대비용이라 움직일 수가 없는 거구나!”
오흐트의 말은 반은 맞았고, 반은 틀렸다.
‘그걸 어떻게 알았지? 역시 성급했나. 이렇게 되면 그걸 사용할 수밖에 없잖아.’
라플라스는 조용히 아공간을 열어 공작무기를 꺼냈다.
치이이익!
공간이 찢기며 나태를 담당하는 아케디아(Acedia)가 웅장하게 나타났다.
아케디아는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위쪽은 마나의 칼날이 솟아있었고, 아래쪽은 편안히 잡을 수 있도록 손잡이가 달려 있었다.
공작무기의 촉감이 손을 타고 전해지자, 세상을 다 얻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라플라스는 충만한 감정을 담아 선언했다.
“가라! 기프트. 유피테르를 죽이고 그의 아티팩트를 뺏어와라.”
“네.”
바실리를 닮은 손님이 드디어 움직인 순간이었다.
* * *
‘빨리 공작을 처리하고 마스터를 구하러 가야 해. 바실리 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못 하니까.’
라플라스와 마주 본 오흐트는 최대한 빠르게 승부를 보려고 마음먹었다.
몇 번을 곱씹어봐도 지금의 유피테르에게 무언갈 기대하는 건 사치였으니까.
“공작무기까지 꺼내 들다니. 내가 그렇게 무서웠어?”
“너야말로 성검의 힘에 기대지 않았나? 아티팩트의 기대는 모습이 아주 보기 좋군.”
“누구 닮아서 그렇게 성격이 배배 꼬였어?”
“우리의 어머니는 모두 같지 않은가? 오래 살아서 귀의 기능이 좋지 않은가 봐?”
인간인 오흐트와 마족인 라플라스는 모두 창조신 레아를 어머니로 모셨다.
세계를 창조한 유일무이한 존재이기 때문에 당연했다.
그러나 그 말을 마족, 그것도 마족 공작의 입에서 듣자 기분이 나빠졌다.
오흐트는 바로 움직였다.
오를레앙 식 검술 – 정중동(靜中動)
오를레앙이 춤추자 세상이 멈췄다.
“이게 무슨―?”
라플라스는 의문을 표했다.
무언가 마법을 펼친 기색은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마나를 무한히 쏟아내는 것도 아니었다. 초월자라고 해도 칼리스토는 신과는 달랐으니.
저들이 따르는 바실리가 신이 아니라 그 자식인 것처럼.
“이걸로 놀란다면 곤란한데. 이쪽은 아직 전력을 내보이지 않았다고.”
“대체, 뭘 한 거지?”
“공간 장악.”
“고유 결계를 말하는 거냐! 하지만, 그런 걸 펼치는 기색은 전혀 없었다.”
라플라스도 고유 결계에 대해서 잘 알았다.
애초에 고유 결계를 만드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마나를 장난감 다루듯이 하는 마족들에게는 특히 더 그랬다.
마나로 일정 영역을 꽉 채우면 그게 곧 고유 결계였다.
“마스터 말이 맞네.”
“뭐?”
“새로 바뀐 공작들은 힘이 약하다는 거?”
명백한 비웃음에 라플라스가 이를 꽉 깨물었다.
성국의 사람들이 마족을 싫어하는 것처럼, 마족도 신과 관련된 모든 것들을 증오했다.
신관, 그중에서도 최고봉인 성녀에게 모욕당하자 웃음이 나오지를 않았다.
움직일 수 없는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는 건 하나뿐이었다.
“기프트, 이곳으로 와라!”
유피테르를 견제하던 기프트는 한걸음에 돌아왔다.
“그걸 사용해라.”
“네.”
대화는 길지 않았다.
기프트는 오른팔을 들어 라플라스의 심장을 꿰뚫었다. 자해에 가까운 행동에 오흐트는 긴장했다.
“뭘 하려는 거야?”
오흐트의 불안함이 적중했다.
우우웅!
라플라스의 몸에서 필요 이상의 마나가 뿜어져 나왔다. 상처를 회복하기 위해 마나를 소비하는 건 마족의 본능이었다.
‘움직인다!’
필요 이상의 마나를 사용하자 굳었던 몸의 제어권이 돌아왔다. 전부는 무리지만, 손 정도는 움직일 수 있었다.
아케디아를 꽉 쥐었다.
주문도, 시동어도 필요 없었다.
검은 마나탄이 비처럼 쏟아졌다. 하나하나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운석처럼 강력했다.
콰아아앙!
“젠장!”
쏟아지는 마나탄을 비하며 오흐트는 작게 중얼거렸다.
피하는 건 쉬웠다. 그러나 반격할만한 타이밍이 보이지를 않았다. 그래서 묵묵히 때가 오기를 기다렸다.
잠시 후, 공세가 분명히 약해졌다.
‘지금인가?’
본능적으로 필요한 검술을 찾아낸 오흐트가 검을 휘두르려고 한 순간.
한발 먼저 움직인 사람이 있었다.
“마, 스터?”
“예상대로 잘 버텨주었어. 뒤는 맡겨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