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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도 포기한 대공자-222화 (222/265)
  • 라플라스의 깜짝 상자(5)

    * * *

    유피테르가 라플라스의 시체를 확인하고 있을 때, 저 멀리서 오흐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스터!”

    긴장감 가득한 목소리에 유피테르의 고개가 저절로 돌아갔다. 그러자 상처투성이인 오흐트의 모습이 보였다.

    ‘자동 회복 마법식 고장이 난 건가?’

    오흐트를 비롯한 칼리스토들은 모두 제복을 입고 임무를 수행했다.

    바실리와 펜데의 공동 작업으로 완성된 제복. 그건 한 나라의 국보라고 해도 손색이 없었다.

    다양한 마법진이 내재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보호 마법식은 강한 충격이 아니면 흠집조차 나지 않았다. 저걸 부수려면 최소한 마족 공작급은 되어야 했다.

    “다행이다. 마스터는 무사했구나.”

    헐레벌떡 달려온 오흐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유피테르가 당했을 거라고는 꿈에서도 생각하지 않았다. 무려, 바실리 님께서 선택한 반려자였으니까.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묘했다.

    칼리스토 중 배신자가 있었다. 심지어, 에냐는 자신에게 칼을 들이밀었다.

    누가 적인지 모르는 이런 상황이 가장 위험했다.

    “저게 라플라스야? 벌써 끝내다니 역시 마스터구나.”

    오흐트는 슬그머니 꽁꽁 얼어붙은 라플라스에게 다가갔다.

    안 그래도 힘든 과거를 지닌 사람이었다. 동료들이 배신했다는 사실을 굳이 알리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유피테르는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

    “누구였지?”

    “응?”

    “널 공격한 게 칼리스토 중 누구였냐고.”

    유피테르의 말에 오흐트는 숨을 삼켰다.

    이런 식으로 한 방에 쑥 들어올 줄은 몰랐다. 힌트조차 주지 않았는데 어떻게 알아차린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 반응을 보니, 에냐였나 보군.”

    유피테르의 마나 감지는 자그마한 단서라도 놓치지 않았다.

    오흐트의 제복에는 에냐의 마나가 묻어 있었다. 치유사의 몸에 다른 이의 마나가 있는 상황은 흔치 않았다.

    “어떻게, 아니지. 언제부터 안 거야…?”

    “뭘?”

    “자매 중에 배신자가 있었다는 걸. 그런 기색을 보여주진 않았잖아.”

    유피테르는 어제 칼리스토 회의를 소집했다.

    전원이 출석한 건 아니지만, 패스를 사용했기에 자매들 모두가 그 내용을 알았다.

    배신자가 있다는 걸 알면서도 작전 내용을 알려준 건, 정말로 대담한 행동이었다.

    “애초에 말이지….”

    유피테르는 손가락을 튕겼다.

    푸른 마나가 그 신호에 맞춰 움직였다. 얼음의 관이 들썩거리더니 이내 얼음 먼지가 되어 흩뿌려졌다.

    “…바실리를 제외하면 아무도 믿지 않았다고.”

    “말도 안 돼!”

    오흐트는 충격에 주저앉았다.

    바실리만큼은 아니더라도 유피테르와 꽤 많은 시간을 함께했었다. 그 모든 게 가식이었다고 들으니 세상이 무너지는 듯했다.

    “가족이었다고 했잖아.”

    “가족이 생긴 것 같다고 말했었지. 실제로 그런 느낌이 들었다는 건 부정하지 않아.”

    “그럼 왜! 왜 우리를 믿어주지 않는 건데?”

    “그 결과가 바로 이거니까.”

    “….”

    분했다.

    여전히 같은 편이었다. 그래도 한마디 쏘아주지 않고는 기분이 풀리지 않을 것 같았다.

    “잘난 듯이 말해도 딱히 대비를 한 건 아니잖아. 난 그냥 공격당했다고!”

    “이렇게 살아왔잖아.”

    말문이 막혔지만 오흐트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렇게 다 아는 듯이 행동해도…. 바실리 님께서 사라지는 거 막아내지 못했잖아. 마스터는 지금 상처받기 싫어서 모두를 밀어내는 것뿐이야!”

    바실리.

    이건 꺼내서는 안 되는 이름이었다. 유피테르와 칼리스토 모두에게 아픈 기억이었으니까.

    그러나 잔뜩 열이 오른 오흐트는 거침이 없었다.

    “오흐트 너도 바실리가 봉인된 걸 내 탓으로 생각하는 거냐.”

    “사실이잖아.”

    오흐트의 태도는 완강했다.

    설득을 하려면 말이라도 들어야 하는데, 첫 번째 관문부터 힘들었다.

    유피테르는 어쩔 수 없이 다른 선택지를 골랐다.

    “오흐트.”

    “왜? 날 믿지 않는다면서. 친한 척 부르지 말아 줄래?”

    “너희 칼리스토들이 제대로 하지 않아서 내가 나선 거라는 생각은 안 해봤나?”

    “그게 무슨 소리야?”

    우웅!

    유피테르는 대답 대신 마나를 뿜어냈다. 살기마저 느껴지자 오흐트는 움찔거렸다.

    “뭘 하려는 거야?”

    유피테르가 만든 마나는 공중으로 퍼져나갔다. 던전의 어두운 벽을 도화지 삼아 지도를 완성했다.

    “이게 뭔지는 알겠지.”

    “당연하지. 이건 세아니아 대륙이잖아.”

    오흐트, 아니 초대 성녀 오를레앙이 그걸 모를 리 없었다.

    대륙 전쟁이 끝이 난 후, 대륙을 치료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었으니까.

    유피테르는 오흐트의 반응을 본 후, 지도에 원을 그리기 시작했다. 원들은 점점 커지며 대륙을 색칠했다.

    “너희 이것처럼 칼리스토들은 일정 구역을 맡고 있지.”

    유피테르는 지금 칼리스토 자매들의 담당 구역을 설명하고 있었다.

    바실리 때부터 정해진 것이기에 너무나 친숙한 그림이었다.

    하지만, 의외인 부분도 존재했다.

    “타르타로스가 비었잖아. 이건 거짓말이야!”

    대륙 전쟁 이후, 마족들은 타르타로스에 갇혔다.

    신이 직접 만든 결계는 대단했다. 그리 크지 않은 땅도 마족 전부가 살아도 충분할 정도로 만들었으니까.

    이전과 같은 자유는 뺏겼으나, 자급자족하며 살아가기에는 충분했다.

    “왜 어디가 이상하지?”

    “칼리스토의 구역은 겹치게 만들어졌다고. 저렇게 한 곳이 텅 빌 수가 없어.”

    오흐트는 유피테르가 만든 지도를 다시 한번 살펴보았다.

    몇 번을 봐도 기억과 똑같았다. 겹치는 부분이나, 세세한 합의까지 반영되어 있었다.

    ‘아니야. 아닐 거야.’

    오한이 들었다.

    오흐트는 어떻게든 나쁜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유피테르를 그렇게 욕했는데, 같은 사람이 되기는 싫었다.

    “칼리스토들이 담당하는 구역은 내가 바실리를 만나기 전부터 약속된 것들이지.”

    “맞아.”

    “이걸 누가 만들었지?”

    “당연히 첫째 언니가….”

    오흐트는 대답을 하다 말았다.

    있어서는 안 되는 최악의 시나리오가 머릿속에 그려졌다. 무거운 망치로 머리를 맞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제 상황이 좀 보이나? 바실리는 내가 아니더라도 그렇게 될 운명이었어.”

    “그렇게까지 말할 건 없잖아!”

    “내가 여기서 좋게 말한다고 무언가 바뀌나? 그러면 그렇게 하도록 하지.”

    유피테르는 냉정했다.

    이성적이다 못해 자기 일이 아닌 것처럼 말했다.

    그 모습에 오흐트도 제정신을 차렸다. 마스터를 욕해봤자 상황은 그대로였으니까. 그런 건 바실리 님에게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럼, 언니들이 전부 배신자라는 뜻이야?”

    “그건 아니다. 확실한 건 트리아 하나뿐이었고, 이제 너도 의심하지 않아도 되는 거 같네.”

    “믿어, 주는 거야? 이것마저 연기일 수도 있다구?”

    유피테르는 곧바로 대답했다.

    “네가 나와 바실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알고 있으니까. 그리고….”

    “그리고?”

    무언가 결정적인 이유가 있어 보이자 오흐트는 천천히 대답을 기다렸다.

    “에냐가 널 공격했다는 걸 보면 확실하지.”

    생각보다 평범한 이유에 오흐트가 되물었다.

    “에냐랑 나랑 미리 짜고서 이런 상황을 만들었을 수도 있잖아. 안 그래?”

    머리가 좋은 유피테르가 눈치채지 못했을 리는 없었다.

    오흐트는 결정적인 이유가 필요했다. 여기서 서로 믿고 가지 않으면 앞으로 힘들어질 게 뻔했다.

    왠지 그런 기분이 들었다.

    “네 과거를 알기 때문이다. 넌 누구보다 배신을 싫어하니까, 오를레앙.”

    한 몸 바쳐 대륙을 구원하던 셩녀의 마지막은 끔찍할 뻔했다.

    초대 성녀 오를레앙을 믿고 따르던 사람들은 갑자기 등을 돌렸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성녀를 마녀라고 몰아갔다.

    오를레앙은 차마 동료들을 배신하지 못했다. 그냥 조용히 화형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던 도중, 천칭의 마도사가 나타나서 그녀를 구해주었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직접 나서 모든 오해를 풀어주었다.

    이것이야말로 유피테르가 오흐트를 믿는 이유였다.

    사람들 사이에서 버려지는 슬픔을 아는 이는, 두 번 다시 그러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 * *

    “고마워 그리고 미안해, 마스터.”

    오흐트는 울먹이며 사과했다.

    유피테르의 본심을 조금 엿본 것 같았다. 역시, 그는 생각보다 남을 더 생각해주는 사람이었다.

    “아직 갈 길이 멀어. 누가 확실한 우리 편인지 알아내야 해. 그게 아니라면….”

    “바실리님을 구할 수 없겠지.”

    유피테르는 오흐트를 대견스럽게 바라보았다.

    이 임무는 거짓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배신자를 찾기 위해서는 어쩔 수가 없었다. 저택에서 벌어졌던 일은 추적할 수 없을 만큼 깨끗했으니까.

    돌연변이의 입을 막은 수법을 도저히 알아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선택한 게 함정을 파놓는 것이었다.

    ‘놀라울 만큼 쉽게 꼬리를 들어냈지.’

    배신자들은 기회를 노리고 있는 듯했다.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타이밍이 맞아떨어질 수는 없었다.

    아직 우세한 건 배신자들 쪽이었다.

    함정에 걸려 의심을 확신으로 바꾸긴 했으나, 고작 이것뿐이었으니까.

    그들의 목표도, 인원도 배반한 이유조차 알지 못했다. 심지어는 바실리를 따르는 건 맞았던 것인지 애매했다.

    “기운 내 마스터. 나랑 트리아 언니라도 있는 게 다행이잖아?”

    “전부 배신한 것보다야 낫지.”

    만약, 정보를 손에 쥔 자와 치유사까지 이탈했다면 큰일이었다. 골치가 아프다는 수준을 넘어서 바실리와의 약속을 어겨야만 했다.

    그 순간 저 멀리서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짝짝짝!

    “아주 눈물겨운 장면이네. 나도 눈물 한 방울 나왔다고. 이거 봐.”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한 오흐트는 놀라 자빠졌고, 유피테르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라플, 라스?”

    그곳에 나타난 자는 이미 죽었어야 할 라플라스였다. 그는 자연스레 유피테르 일행의 옆으로 다가왔다.

    “왜 그렇게 쳐다봐. 마치, 죽은 마족이 살아 돌아온 것처럼?”

    넘어졌던 오흐트는 바로 일어났다. 적을 보자마자 기어가 들어갔다. 하지만, 그 전에 짚고 넘어가야 할 게 하나 있었다.

    “마스터. 그 죽인 게 분명히 라플라스였지?”

    “확실해.”

    두 사람이 속닥거리자 라플라스는 삐진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둘이서만 이야기하다니. 동료가 없는 사람은 서러워서 살겠나? 이거 나도 동료를 불러야겠어.”

    라플라스는 마나로 거대한 마법진을 만들었다. 사악한 기운이 느껴지자 오흐트와 유피테르는 방어막을 쳤다.

    “마스터 조심해.”

    “신경 쓰지 말고 너부터 조심해. 저자는 보통이 아니다.”

    “아 확실히 그렇긴 하네.”

    우우우우웅!

    라플라스가 만든 마법진은 맹렬하게 회전했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마나를 끝없이 흡수했다.

    ‘공간 이동 마법진?’

    유피테르는 단번에 마법진의 정체를 알아맞혔다. 하지만, 누굴 소환하려는 건지는 몰랐다. 그래서 가능한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두면서 방어막을 더욱 강화했다.

    “그럼. 이 자리에 내 동료들을 불러보도록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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