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플라스의 깜짝 상자(4)
* * *
에냐가 오흐트에게 독니를 내보였을 무렵.
유피테르는 무사히 던전 5층으로 올라와 주변을 찬찬히 둘러보고 있었다.
이전 층과 특별히 달라진 점이 보이지는 않았다. 연구소 같은 분위기는 여전했다.
‘방해가 없군?’
의외였다.
라플라스가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건.
유피테르는 마나를 숨기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봉인 아티팩트까지 슬그머니 빼놓은 상태였다.
마치, 내가 이곳에 왔다고 선언하듯이.
“설마, 겁이라도 먹은 건가.”
유피테르는 헛웃음을 지으며 던전의 중심을 향해 나아갔다.
또각또각-
유피테르가 한 발자국 움직일 때마다, 푸른 마나가 넘실거렸다.
압도적이다 못해 파멸적인 기운에 던전조차 덜컥 겁을 집어먹었다.
쳐다보기만 해도 던전의 마나가 희미해졌으니까.
얼마쯤 걸었을까.
평온하던 분위기에 이변이 발생했다.
“그럼 그렇지. 마족과 인내심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어서 튀어나와, 라플라스.”
유피테르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마나 감지를 뿌렸다.
우웅!
푸른 마나는 원형으로 넓게 퍼져나갔다.
그 속도와 영역만 보아도 유피테르가 실력자라는 걸 바로 알 수 있었다.
유피테르의 말이 들리기라도 한 걸까?
“이렇게 얼굴로 보는 건 처음이네?”
던전의 중심에서부터 한 인영이 걸어왔다.
느릿느릿하지만, 주변에서 일렁이는 마나가 범상치 않은 존재라는 걸 알려 주었다.
유피테르는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검은색인 옷차림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마족이라는 걸 뽐내는 듯했다.
‘잠깐, 처음이라고?’
무언가 이상했다.
저 앞에 있는 마족이 정말로 라플라스라면 자신을 처음 볼 리 없었다.
티폰을 죽인 그 날.
모든 마족 공작들이 한곳에 모여 있없다. 충격적인 일이었기에 기억이 잘못 되었을리는 없었다.
“나를 기억하지 못한다니. 이건 좀 섭섭한데, 라플라스.”
“이거 놀라운데, 우리가 그렇게 친한 사이였나?”
“얼굴과 이름을 알고서 싸웠으면 충분하지. 이 이상 뭐가 더 필요한가?”
“못 보던 사이 유머가 늘었네? 유피테르 아르테미스.”
겉모습만 보면 틀림없는 라플라스였다.
하지만, 고작 이 정도의 대답으로 의심을 지우는 건 불가능했다. 이미 카르멘의 도플갱어를 봤었기 때문이었다.
그때와 비슷하게 무언가가 마음에 걸렸다.
“나를 보고도 가만히 있다니. 마족들도 다 죽었군.”
“하아? 설마 내가 그 녀석의 복수라도 할 거라고 생각한 거?”
라플라스는 유피테르의 표정을 슬쩍 확인했다. 은발의 마도사는 정말로 진심인 듯했다.
“진짜야? 너,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는구나. 아하하하하하! 진짜 재미있네 너.”
라플라스는 자지러지게 웃었지만, 유피테르는 아니었다. 방금 그 말에서 어디가 어떻게 웃긴 건지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뭐가 그렇게 웃기지? 너희들의 왕을 내가 죽였다. 부하라면 복수를 하는 게 당연하지 않나.”
“부하라….”
라플라스는 유피테르의 주변을 느긋하게 돌며 말을 이었다.
“한 가지만 물어보자.”
“뭐지?”
정말로 궁금하다는 태도에 유피테르는 어쩔 수 없이 반응했다.
“꼴 보기도 싫은 T라는 자가 있었어. 근데 어떤 사람이 이 T를 깨끗하게 치워준 거야. 그럼 이 사람은 적일까 은일일까?”
라플라스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인 듯 말했지만, 유피테르는 그의 이야기라는 걸 눈치챘다.
T.
그건 의심의 여지 없는 티폰의 이니셜이었으니까.
티폰은 마족의 아버지로 숭배받았었다. 아무리 ‘나태의 공작’이라고 해도 티폰을 싫어하는 게 이해가 되지를 않았다.
그래도 유피테르는 티를 내지 않았다.
“적의 적은 친구라 이건가.”
“브라보! 바로 그거야. 바보 같은 마족들과는 차원이 달라. 이야기가 통한다고.”
“그런가. 그거 영광이군.”
유피테르는 고민에 빠졌다.
라플라스는 시트시거처럼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어떻게든 모순점을 끌어내려고 했지만, 번번이 도망쳤다. 그리 많이 이야기해본 것도 아니어서 확신을 가질 수가 없었다.
‘어차피 제압하고 이야기를 들을 생각이었으니, 상관없나.’
생각해보니 말로 확인하려는 게 어리석었다.
힘의 차이는 명확했다.
말이 안 통하면 주먹을 써서라도 이야기를 들으면 그만이었다. 평화적인 방법을 쓴다고 누가 칭찬해주는 것도 아니었으니.
우웅!
유피테르는 얼음 화살 몇십 개를 만들어서 쏘았다.
가벼운 인사치레나 마찬가지였으나, 초월자의 마법은 우스갯소리로도 약하지 않았다.
빙글 돌던 라플라스는 한 곳에서 멈춘 후, 방어막을 만들어냈다. 지금껏 보아왔던 마족들과 다르게 고대 마법이었다.
라플라스는 공격을 전부 막아낸 후, 느긋하게 말했다.
“워워. 진정하라고 유피테르. 너도 알고 싶은 게 있어서 이곳에 찾아온 거잖아?”
“너도…라고?”
허투루 들을 수 없는 말에 유피테르는 자신도 모르게 되물었다.
“그래! 네가 오기 전 에키드나가 이곳에 왔었다고. 얼마 만에 본 건지. 그래도 여전히 이쁘더라.”
에키드나.
그 단어를 듣자마자 유피테르의 기세가 달라졌다.
넘실거리기만 하던 마나는 사방을 분쇄하는 기운으로 변했다.
‘이번에도 늦은 건가?’
에키드나가 뭘 노리는진 여전히 의문이었다. 하지만, 우연이 이렇게나 겹치면 필연이었다.
이쯤 되면 바실리의 봉인을 풀 열쇠를 찾는 라이벌이라고 해도 무방했다.
에키드나에 관해 거짓말을 할 필요는 없었다. 그렇다면 라플라스가 무언가 힌트를 가지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렇게 생각하니 유피테르는 조급해졌다.
“너희 마족은 뭘 꾸미고 있는 거지? 왜 타르타로스에서 나온 거냐!”
“아이고, 무서워라.”
한껏 날카로워진 유피테르와 달리 라플라스는 유들유들한 태도를 유지했다.
유리하다는 걸 본능적으로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윽박지르면 무섭다고. 정보를 얻고 싶으면 협상을 해야지.”
정론이었다.
허를 찔린 유피테르는 들리지 않게 혀를 찼다. 그러나 그는 대답 대신 마법을 선사했다.
유피테르 식 특제 마법 ― 니플헤임
샤아악!
마나조차 얼어붙이는 극한의 냉기가 온갖 곳에서 쏟아졌다.
“치잇.”
라플라스는 몸을 뒤로 뺐다.
마족 공작이라고 해도 저 마법은 무서웠다. 공간 자체를 냉각하기에 피할 방법도 마땅치 않았다.
그래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죽는 건 사양이었다.
설령 나태를 담당한다 하더라도.
“다크 쉴드!”
라플라스는 검은색 마나를 최대한 모아 방어막을 펼쳤다.
고대 마법임을 증명하는 마법진과 함께 몇 겹의 방어막이 완성되었다. 마법에 능숙한 마족답게 마나 밀집도가 대단했다.
쪄저적!
니플헤임은 쉴 새 없이 몰아쳤다.
라플라스가 애써 만든 방어막을 통째로 얼려버렸다. 다른 마법과 비교하지 말라는 것만 같았다.
“젠장, 뭐 이런 마법이 다 있어!”
생각과는 다르게 한 번의 공격으로 방어막이 전부 부서지자, 라플라스는 망연자실했다.
어떻게든 떨쳐내려고 해도 니플헤임의 손아귀 안이었다.
‘끝나가는군.’
유피테르는 승리를 직감했다.
유피테르와 라플라스의 마나 제어력은 하늘과 땅의 거리만큼 차이가 났다.
심지어 원래의 힘도 일부 사용하고 있으니 지는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러는 사이에도 니플헤임은 영역을 넓혀갔다.
방어막을 집어삼킨 것만으로는 부족했는지 그대로 라플라스까지 노렸다.
육체가 말을 듣지 않자, 나태를 담당하는 공작은 유피테르에게 말을 걸었다.
“자, 잠깐만. 내게 듣고 싶은 이야기가 있지 않아? 그래, 에키드나! 이 마법을 해제해주면 에키드나가 했던 말을 들려줄게!”
“이야기라.”
유피테르는 마법을 잠깐 멈췄다. 에키드나의 노림수를 알 수 있는 좋은 기회였기에.
라플라스는 그 틈을 제대로 이용했다.
“파이어 스톰!”
유피테르의 바로 밑에 마법진이 그려졌다.
마족쯤 되면 이 정도는 식은 포션 먹기였다. 마나에 관해서는 인간보다 몇 수 위였으니.
화르륵!
거대한 화염이 마법진에서 솟구쳤다. 마족의 마법답게 불꽃은 검붉었다.
불꽃 마법은 맹렬하게 회전하며 화염의 폭풍으로 거듭났다.
얼음 마법을 사용해 공격하던 유피테르의 신형이 파이어 스톰에 가려졌다.
“해, 해치웠나?”
라플라스는 초조하게 상황을 지켜보았다.
신의 대리자라고 하더라도 사각에서 찔러오면 반응이 느릴 게 분명했다. 어차피 원판은 인간이었으니.
눈 아플 정도의 열기가 분명히 느껴졌다. 이기지는 못하더라도 이 저주 같은 얼음을 풀게 하는 건 가능해보였다.
그렇게만 된다면 싸워볼 만도 했다. 아직 준비한 걸 하나도 보여주지 못했으니까.
“이런 이야기라면 별로 듣고 싶지 않은데.”
기대와는 다르게 유피테르는 멀쩡했다. 마법이 먹혀들어간 것 같지도 않았다.
그저 로브에 묻은 재를 툭툭 털뿐이었다.
‘신이라도 된 것 같겠지? 마족 공작도 애 다루듯 하고.’
라플라스는 모멸감에 치를 떨었다.
마법의 감상은커녕 이쪽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게 자존심을 건들였다.
“빌린 힘으로 싸우니 좋지?”
“빌렸다니?”
“신의 딸에게 달라붙어 얻은 힘이 아니라면 이건 말이되지 않으니까!”
유피테르가 미동도 없자, 라플라스는 신이나서 입을 나불거렸다. 그게 지옥의 스위치를 눌렀다는 것도 모른 채.
“내가 가진 힘을 알기라도 하는 눈치군?”
유피테르는 태연히 말을 받았다.
저렇게 악에 받혀 있을 때야 말로 정보를 얻기 쉬웠다. 죽힘이나서 정보를 얻는 것도 가능했지만, 이번에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디오에게 단독 임무를 준 건 다름 아닌 그였으니까.
“당연하지. 그건 티폰이 꿈꾸던 힘이잖아! 신처럼 마나에 간섭하는데 무슨 수로 이기냐!”
라플라스는 보기 좋게 걸려들었다. 그러나 유피테르의 속셈은 이제 막 신호탄을 쏜 것에 불과했다.
“잘 알고 있잖아! 역시 에키드나가 알려준 건가?”
“그래! 네 여자친구인 바실리를 찾고 있더군. 그 뭐지? 봉인을 푸는 열쇠도 얻은 것 같고…흡!”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라플라스는 황급히 입을 닫았다. 에키드나가 절대 알려주지 말라고 못밖았던 게 생각났기에.
그러나 이미 뱉은 말을 주워담는 건 불가능했다.
‘잡았다.’
필요했던 말을 들은 유피테르의 얼굴에 미소가 그려졌다. 이건 정말로 생각지도 못한 수확이었다.
당황해서 땀까지 흘리는 모습을 보니 거짓인 것 같지는 않았다.
“선물을 받았으니 보답을 해야겠지?”
“뭐, 라고?”
싱글벙글 웃는 유피테르와 하얗게 질려가는 라플라스. 두 사람의 온도 차이는 극명했다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군.”
유피테르는 잠시 멈췄던 니플헤임을 다시 전진시켰다. 라플라스가 살려달라고 소리쳤지만, 그냥 등을 돌려버렸다.
마치, 싫증난 장난감을 다루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