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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도 포기한 대공자-220화 (220/265)
  • 라플라스의 깜짝 상자(3)

    * * *

    “그 인간…? 지금 마스터한테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거야? 에냐 너 제정신이야?”

    “여느 때와 같이 멀쩡해. 언니.”

    오흐트의 목소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에냐의 말과 행동에는 어른스러움이 가득 녹아들어 있었다. 귀족의 딸이기도 했지만, 원래부터 그런 성격인 듯 보였다.

    그런 동생이었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를 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감히.

    이 이상 적합한 표현이 떠오르지 않았다.

    감히 마스터의 명령을 거절하다니. 이건 의문이나 의심을 하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어찌 보면 칼리스토의 계약을 어기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왜 그런 표정을 지어? 초대 성녀 오를레앙의 멋진 모습은 다 어디로 간 거야?”

    “에냐야….”

    “난 에냐가 아니야.”

    오흐트가 손은 붙잡으려고 했으나, 에냐는 그걸 뿌리쳐 버렸다.

    너무나도 쉽게.

    “똑똑히 들어 오흐트. 아니 오를레앙. 우리의 주인은 저런 덜떨어진 인간이 아니라, 바실리 님이야.”

    초대 마스터인 바실리를 떠올리기라도 하는지 에냐의 표정이 몽롱해졌다.

    그걸 본 오흐트는 작은 가능성을 찾아내고서는, 행동으로 옮겼다.

    “그 바실리 님이 인정하는 게….”

    “유피테르 아르테미스라고?”

    “그래!”

    “언니는 확실히 그놈의 편이 되어버렸구나. 이러면 안 되겠는걸? 역시, …말이 옳았어,”

    그놈의 편.

    강한 표현에 오흐트는 정신이 확 들었다.

    뭔가 이상했다.

    그녀와 이야기하고 있는 건 분명 에냐였다. 마나의 기운도 일치했고, 칼리스토의 비밀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저 냉혹한 표정만큼은 익숙하지 않았다.

    ‘내가 마스터를 지켜야 해.’

    오흐트는 유피테르를 좋아했다.

    이성으로서 좋아하는 건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트리아 언니처럼 맹목적이지도 않았다.

    처음에는 전대 마스터인 바실리 님의 부탁 때문이었다.

    유피테르가 행복하기를 바란다고 말했을 때, 바실리 님의 표정 역시 누구보다 행복해 보였다.

    그런 표정을 짓는 바실리 님을 더 많이 보고 싶었다. 왠지 모르게 자신의 가슴 한편이 따뜻해졌으니까.

    ‘유피테르 님은 죽도록 노력했어.’

    현 마스터 유피테르는 대단한 사람이었다.

    어느 정도 재능을 타고난 건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 재능을 꽃피우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했다.

    사이가 좋지 않던 자매들의 마음도 끝내 돌리는 데 성공하기까지 했다.

    그 모습을 보니 왜 바실리 님이 저 사람을 반려자로 택한 건지 알 것 같았다.

    “그래서? 언니는 날 막을 거야? 그 빌어먹을 놈을 진짜 도와줄 거냐고!”

    오흐트가 대답하지 않자 에냐는 짜증을 냈다. 진심이었는지 말에 마나가 가득 스며들어 있었다.

    “왜 하필 지금이야?”

    “뭐?”

    “왜 하필 지금인 거냐고! 바실리 님을 봉인한 열쇠를 찾을 수 있는 중요한 타이밍인데.”

    이번 임무에 성공하면 바실리 님의 얼굴을 볼 수 있을 확률이 어마어마하게 올라갔다.

    이렇게 중요한 순간에 훼방을 두려고 하는지 이해가 가지를 않았다.

    “에키드나가 우리와 손을 잡았다면, 대답이 되었을까?”

    “….”

    충격적인 말에 오흐트는 입을 닫았다.

    칼리스토가 마족과 손을 잡다니. 가슴 속에서 벼락 한 줄기가 떨어졌다.

    “몇 명이야.”

    “그렇게 작은 목소리로 말하면 들리지 않는데?”

    “그 멍청한 계획에 가담한 언니들이 몇 명이나 되냐고.”

    “음, 한 명, 두 명.”

    에냐는 손가락을 접으며 숫자를 셌다. 한 명이 늘어날 때마다 오흐트의 분노가 치솟았다.

    칼리스토의 계약은 그런 이유로 어겨서는 안 되었다. 그건 바실리 님에 대한 모욕이기도 했으니까.

    ‘바보 같긴.’

    부들부들 떠는 오흐트를 보며 에냐는 생각했다.

    저 사람은 너무 착했다.

    왜 성국의 사람들이 성녀라고 추앙했는지 알 수 있을 정도로. 즉, 이런 싸움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언니가 눈물짓는 건 보고 싶지 않았다.

    “눈을 뜨면 모든 게 끝나 있을 거야, 언니.”

    에냐 식 바람 마법 – 소용돌이

    에냐는 바람 마법을 만들었다. 마족을 찢어발겼던 바로 그 기술이었다.

    “그건 내가 할 소리인 거 같은데?”

    “뭐, 뭐라고?”

    승리를 직감하며 오흐트를 보던 에냐는 숨을 삼켰다. 시야에서 언니가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쾅!

    한순간이었다.

    시야에서 사라졌던 오흐트는 뒤에서 나타나 검을 휘둘렀다. 어디서 본 것만 같은 디자인이었다.

    “이런 공격이라면 너무 뻔하다니까?”

    집중력이 흐트러졌기에 소용돌이는 사라졌다. 그럼에도 에냐는 방어막을 만들어 검을 막아냈다.

    “뻔하다고?”

    오흐트는 작게 웃었다.

    평소에 보던 순수한, 사람에게 힘을 주는 미소가 아니었다. 어딘가 섬찟한 느낌이었다.

    슈우우웅!

    그 순간, 오흐트의 검이 뱀처럼 휘어들며 급소를 노렸다.

    “이건 애들 장난이 아니라고 언니!”

    에냐는 바람 마법을 이용해 검을 막았다.

    늘 그녀와 함께했던 바람은 완벽했다. 한 쌍의 수갑이 되어 검을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너무 쉬워서. 김이 팍 새는걸? 그러니까 집에서 대기만 하라고 했잖아.’

    모든 게 예상대로였다.

    초대 성녀는 검의 성녀로 유명했다. 그래서 유품인 성검에 오를레앙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 당시만 해도 검사와 마법사의 골이 깊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 사실을 알았기에 검사의 공격 패턴을 미리 공부했고, 일부러 틈을 보여서 공격 수단을 봉쇄했다.

    “이거 안 놔? 놓으라고! 이런 식으로 행동하면 정말 바실리 님께서 행복해하실 거 같아?”

    오흐트의 외침을 들은 에냐는 작게 혀를 차더니 그대로 바람 마법을 날렸다.

    퍽!

    묵직한 바람의 주먹이 오흐트의 얼굴을 때렸다.

    그러나 오흐트는 포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성검을 쥔 손에서 힘을 더 주었다.

    퍽! 퍽! 퍽! 퍽!

    오흐트가 포기하지 않자 에냐는 계속해서 바람을 날렸다.

    주먹은 쉬지 않고 오흐트의 얼굴을 가격했다. 작고 귀여웠던 오흐트의 얼굴은 퉁퉁 부어올랐다.

    그러나 오흐트의 눈동자는 여전했다. 보일 리 없는 불꽃이 보인다고 착각할 정도로.

    “아직도 포기 안 한 거야?”

    고작 이 정도로 에냐가 지칠 리 없었다.

    그러나 몇 번을 때려도 오뚝이처럼 일어나는 오흐트를 보고 있자니 정신적으로 피로가 생겨났다.

    “고작 이 정도로 날 무너트리려고 한 거야?”

    “언니. 어이없는 자신감은 이제 좀 치우지 그래? 바실리 님께서도 지적하셨잖아.”

    “하, 아직도 날 언니라고 부르긴 하는구나?”

    “내가 싫은 건 그 은발 머리지 언니가 아니니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우리와 함께하자, 오를레앙 언니.”

    상황이 이렇게까지 흘렀는데도 에냐는 오흐트를 포기하지 않았다.

    순수한 언니를 좋아하기도 했지만, 최고의 치유사인 그녀를 적으로 돌리기는 싫었기에.

    “…에냐.”

    “드디어 마음을 바꾼 거야?”

    오흐트의 말에 에냐가 기대감으로 가득 차 물었다.

    “넌, 에냐고 난 오흐트야. 난 과거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유피테르도 마음에 들고.”

    오흐트는 끝까지 오흐트였다.

    그 마음이 대쪽 같다는 걸 깨달은 에냐는 방향을 바꿨다. 오흐트를 동료로 만들기보다는 이곳에서 처리하기로 했다.

    “어쩔 수 없네. 언니, 여기가 마지막이야. 그놈도 보내줄 테니까 심심하진 않을 거야.”

    에냐는 곧바로 마나를 뿜어냈다.

    바람의 마나가 자매의 주변에 휘몰아쳤다. 거센 황소처럼 주변을 모두 부숴버릴 듯한 기세였다.

    특정한 마법으로 완성되지 않아 너무나도 불안정했다.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바람 마법의 바람직한 형태였다.

    누구보다 자유롭고, 어떤 마법보다도 위협적이었다.

    “고작 준비한 게 이거야? 그렇다면 네 반란은 성공하지 못하겠네.”

    “뭐…?”

    오흐트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에냐는 황급히 상황을 파악했다.

    그러나 변한 것은 없었다.

    검은 여전히 움직임이 막힌 상태였고, 바람의 마나 역시 언제든 명령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단지, 오흐트의 모습이 사라졌을 뿐이었다.

    ‘허세인가.’

    에냐는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오흐트는 가끔 이상할 정도로 과한 자신감을 보여주곤 했으니까. 초대 성녀의 일화는 귀가 닳도록 들었으나, 솔직히 어려워 보이지 않았다.

    그만한 상황이 주어졌으면 에냐도 해낼 수 있었다.

    퍼엉!

    에냐가 마음을 놓고 있는 그 순간, 성검이 폭발했다.

    “이게 무슨?”

    상식 밖의 상황에 에냐는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완전히 포기했나 보네? 이거 어쩌나. 마지막 공격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아서.”

    검사가 검을 버리는 경우는 오직 한 가지뿐이었다.

    전투에서 이기는 그림이 전혀 그려지지 않을 때, 항복의 표시로 검을 내렸다.

    지금 상황도 이와 비슷했다.

    검을 버리는 걸로 모자라, 성검 자체를 파괴하는 건 자포자기를 한 거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성검이 없는 오흐트는 칼리스토 앞에선 무력했으니까.

    ‘이판사판이다 못해 제정신이냐고―생각하고 있겠지.’

    모습을 숨긴 오흐트.

    그녀는 손으로 입가를 정리했다. 그러자 입속에서 피의 쓴맛이 느껴졌다. 제대로 된 방어도 없이 맞은 결과였다.

    칼리스토가 되며 강화된 육체가 아니었다면 이빨이 모두 박살이 날 뻔했다.

    오흐트는 신성 마나를 사용해 몸을 원상태로 돌려놓았다.

    대륙 최고, 아니 역대 최고의 치유사라는 명성답게 순식간에 컨디션이 회복되었다.

    “어디야! 어디 있냐고!”

    오흐트가 잠시 숨을 돌리는 순간에도 에냐는 폭주하고 있었다.

    바람의 마나는 채찍처럼 이곳저곳을 파괴했다. 어지간한 마법에는 끄떡도 하지 않는 던전은 이미 폐허가 되기 일보 직전이었다.

    “왜? 그 대단한 바람 마법으로 날 찾아보라구.”

    오흐트의 도발에 에냐는 그대로 걸려들었다.

    “이렇게 시간을 끌다니. 언니답지 않아! 빨리 나와서 최후를 맞이하라고.”

    “최후라니? 난 그런 끔찍한 건 싫어.”

    “웃기지 말라고!”

    콰아아아앙!

    에냐의 심정을 대변하듯 바람의 마나가 주변을 휩쓸자, 던전이 흔들렸다.

    “나와! 나오라고! 오를레앙!”

    에냐는 이성을 잃은 듯 폭주했다. 평소 보여주던 이지적인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반마족처럼 감정적으로 행동했다.

    바늘구멍 같은 틈을 본 오흐트는 움직였다.

    오흐트 식 특제 마법 – 메르카르트

    “메르카르트라고―?”

    갑작스레 오흐트가 나타나도, 에냐는 당황하지 않았다. 주변을 장악한 바람의 마나에게 명령을 내려 오흐트를 공격했다.

    육체 강화를 한 오흐트는 마법보다 빠르게 움직였다. 유피테르에게서 배운 기술과 신성 마나가 합쳐지니 바람의 마나조차 따라가지 못했다.

    바람의 마나를 모두 피해낸 오흐트는 마법째로 에냐를 베었다.

    대단한 검술이 아니라, 그저 위에서 아래로 내리긋는 단순한 동작이었다.

    그러나 육체 강화법과 성검 그리고 신성 마나가 합쳐지자 말도 안 되는 위력을 낳았다. 그리고 극도로 흥분했던 에냐는 그 공격을 피하지 못했다.

    “진정한 마법사라면 힘을 마지막까지 숨겨야 한다구. 안 그래. 에냐. 아 이제는 들리지 않겠구나.”

    오흐트는 동생의 마지막을 보지 않고, 그대로 던전 5층으로 올라갔다.

    자매처럼 지내온 지난날들을 떠나보내는 마지막 선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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