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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도 포기한 대공자-215화 (215/265)
  • 마족의 그림자(7)

    * * *

    유피테르 아르테미스라는 이름은 이제 대륙에 꽤 알려져 있었다.

    얼음성에서 마족을 쫓아낸 건 물론, 아카데미 교류전에서도 두각을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특히, 반마족으로 의심되는 파르테논 아카데미의 교수를 물리친 게 화제가 되었다.

    저주받은 대공자가 어떻게 강한 마법사로 거듭나게 되었는지 모두가 궁금해했다.

    그러나 그 방법을 찾아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마법사의 힘의 원천을 묻는 건 금기 중 하나였으니까. 설령, 그게 아버지인 카르멘이라고 해도.

    “웃기지 마라!”

    카르멘은 숨을 헐떡이면서도 젖 먹던 힘까지 끌어내 소리쳤다.

    조디악도 아닌 일개 마법사에게 패배했다는 걸 인정할 수 없었다. 이건 단순한 패배를 넘어 치욕이었다.

    카르멘의 절규를 본 유피테르는 확신했다.

    그가 진짜 카르멘이 아니라고.

    “다른 사람의 이름을 묻기 전에 자신의 소개를 하는 게 먼저 아닐까? 아, 인간이 아니라서 모르는 건가.”

    유피테르는 발로 쓰러진 카르멘의 얼굴을 툭툭 찼다. 다분히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네놈 정말로 죽고 싶은 거냐! 감히, 내게….”

    “이제야 이쪽을 봐주는구나? 가면을 쓰고 연기하느라 수고했어. 어디 정체를 구경이나 해볼까?”

    어차피 시간문제였다.

    어떤 방법을 쓰든 마나가 없으면 원래대로 돌아가기 마련이었다. 천지가 개벽하는 마법이라도 마나가 없다면 의미가 없었다.

    애초에 마나 부족 현상은 원래 자연 치유만 가능했다.

    마나는 섬세하고 예민해서 타인의 것과 잘 섞이지 않았으니까. 마나를 불어넣어 주는 것도 어려웠다.

    사람을 치료하는 신성 마나라고 해도 다르지 않았다. 거부 반응을 보이는데 보이는 일도 있었기에.

    우드드득!

    엄청난 소리와 함께 카르멘의 몸이 뒤집혔다. 얼굴 형태도 시시각각 바뀌었다. 마치, 찰흙을 주무르는 것처럼.

    “으윽….”

    카르멘은 격통을 참지 못하고 신음을 내뱉었다.

    전신이 뒤바뀌는 중이었으니 놀랄 일은 아니었다. 한 곳만 골절돼도 아픈데, 여러 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으니 상상을 초월했다.

    그걸 본 유피테르는 눈을 빛냈다.

    ‘평범한 인간은 아닌 것 같고…. 마족이라도 되는 건가?’

    폴리모프

    고대 마법 중 하나로 타인의 모습으로 변할 수 있는 신비한 기술이었다.

    하지만, 두 번의 대륙 전쟁을 겪으며 실전되었다.

    즉, 폴리모프를 사용할 수 있는 건 대륙 전쟁 때 살아있던 장명(長命)족뿐이었다.

    그 기준에 가장 적합한 건 다름 아닌 마족이었다.

    우드드드득!

    시간이 지날수록 변화는 빨라졌다. 기대감이 서렸던 유피테르의 얼굴은 점차 묘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다른 이로 변하지를 않잖아?’

    이쯤 되면 원래 모습이 나와야만 했다. 그러나 카르멘의 원형이 여전히 남아있었다.

    머리는 여전히 은발이었고, 흑안과 은안도 바뀌지 않았다.

    유피테르는 뭔가 이상하다 싶어 마나 감지를 사용했다.

    우웅!

    푸른 마나가 순식간에 카르멘의 몸을 에워쌌다. 그리고서는 꼼꼼하게 놓치는 부분 없이 체크했다.

    결과는 유피테르의 예상대로였다.

    카르멘의 마나는 제로를 향해 한없이 달려가는 중이었다.

    “흐흐흐…. 그 모습을 보니 어지간히 놀랐나 보군? 내가 누구인지 그렇게 궁금한가?”

    죽음이 턱 끝까지 다가오자 카르멘은 가면을 벗었다.

    “네 생각을 맞춰볼까? 내가 카르멘이 아니라 마족이라고 생각했겠지?”

    순식간에 허를 찔린 유피테르.

    그 표정을 보며 카르멘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이미지와 전혀 어울리지 않았지만, 잘생긴 얼굴은 그것마저 소화해냈다.

    “마족이 아니라고…?”

    유피테르는 작게 중얼거렸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저자가 마족이 아니라면 대체 누구란 말인가.

    엘프나 드워프는 자신을 적대할 이유가 없었다. 바실리의 대리자이기에 세계는 그의 편이었다. 오래 산 자들이 자신의 마나 속에 깃든 바실리의 흔적을 모를 리 없었다.

    카르멘을 고민에 잠긴 유피테르에게 최후의 비웃음을 날렸다.

    “흥. 고작 이런 실력으로 감히 그분에게 대항하려고 하다니. 백 년, 아니 천년도 이르다.”

    “그분? 그분이 대체 누군데! 마족이 아니라고 해도 관련은 있겠지? 안 그래?”

    그러나 유피테르의 말은 닿지 않았다. 카르멘이 마지막 유언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기에.

    “젠장!”

    단 하나의 정보도 얻지 못한 유피테르가 분노를 쏟아냈다.

    마법이 되기 전의 순수한 마나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푸른 마나가 머금은 냉기가 사방으로 휘몰아쳤다.

    억울함을 호소하기도 전에, 깊은 산 속에 빙하기가 찾아왔다.

    잠시 후.

    꽁꽁 얼어버린 산속에는 그 흔한 바람 소리마저 들리지 않았다. 분노한 유피테르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한 발버둥이었다.

    “후우….”

    한바탕 마나를 뿌리고 나니 가슴은 후련했다.

    머리는 아직 복잡했지만, 고민을 해봤자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였다.

    혼자 머리를 싸매봤자 해결되지 않는 상황. 유피테르는 쿨하게 돌아섰다.

    제멋대로 생각하다 함정에 빠질 수도 있었기 때문에. 마법식을 모르는 채로 마법을 발동하면 위험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죽어서도 입을 다물 수 있는지 보자고.”

    유피테르는 싸늘해진 카르멘의 시체를 들고서 공간 이동을 사용했다.

    * * *

    유피테르가 도착한 곳은 다름 아닌 칼리스토의 저택이었다.

    “마스터! 오랜만이네요?”

    “오, 그 사람 마스터랑 비슷하게 생겼는데? 꽤 취향이야.”

    유피테르를 맞이한 건 에냐와 펜데였다.

    원래라면 트리아가 나왔겠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트리아는 어디 간 거지?”

    “언니는 잠깐 오흐트의 상태를 보러 갔어.”

    “오흐트의 상태가 그리 좋지 않았나? 그냥 공격을 당해서 쓰러진 것 같았는데.”

    유피테르의 의문을 풀어준 건 칼리스토 중에서 마도 공학을 담당하는 펜데였다.

    “마족의 마나가 강제로 몸속에 심어져서 큰일이었어. 내가 있어서 다행이었다고.”

    “마족의 마나라고?”

    “신성 마나가 마족에게 있어 독이라는 건 알고 있지?”

    “그 정도야 상식 아닌가.”

    유피테르는 아카데미를 졸업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바실리가 옆에 있었다.

    그 어떤 교수보다 깊고 넓은 지식을 갖춘 그녀는 뛰어난 선생님이었다.

    당연히 얼음성에서 배웠던 교육보다 훨씬 더 머릿속에 잘 들어왔다.

    “그럼 이야기가 쉽겠네. 신관에게도 마족의 마나가 치명적이야. 특히, 초대 성녀인 오흐트는 더욱 위험하고.”

    유피테르는 오흐트가 공격당할 때를 떠올렸다.

    딱히 대단한 공격을 맞은 것도 아닌데 충격을 받은 듯이 쓰러졌다.

    펜데의 말은 그럴듯한 가설이었다.

    에냐와 펜데는 유피테르를 내버려도 두고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래서. 그 시체는 뭐야. 마스터에게 그런 취미는 없잖아. 혹시 내게 주는 선물일까?”

    “좀 자중하라고. 넌 네크로멘서가 아니잖아.”

    “에냐 지금 누가 누구에게 말을 하는 걸까? 서열대로 행동하자는 약속 잊은 건 아니겠지?”

    펜데의 말에 에냐는 입을 삐쭉였다.

    에냐는 원래 어른스러운 성격으로 유명했다. 그래서 유피테르는 그녀를 칼리스토의 마지막 상식인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이었다.

    에냐는 원래 펜데보다 더 높은 서열에 있었다. 그러나 약점을 간파당해 밀려나 버리고 말았다.

    그걸 알고 있는 펜데가 놀리자 화가 났지만,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이건 두 번째 마스터가 내린 첫 명령이었으니까.

    “혹시 디오는 저택에 돌아왔나? 잠깐 도움이 필요해서 말이지.”

    생각에서 빠져나온 유피테르가 물었다.

    “저택에 없는 거 같은데요.”

    “쯧쯧. 확인되지 않은 사실을 그렇게 퍼트리면 어떡하니 에냐. 디오 언니는 아마 자기 방에 있을 거야.”

    칼리스토 자매의 의견이 엇갈렸다.

    에냐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펜데를 쏘아보았다. 하지만, 마도 공학자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바실리님께서 만든 결계를 내가 한 번 더 강화했잖아. 그래서 누가 이 저택에 있는지에 대해서는 네 마법보다 더 뛰어나다고.”

    “흥. 그래도 바람 마법만 할까.”

    바람 속성을 타고난 에냐는 마나 감지가 특기였다.

    바실리와 최고 서열들을 제외하면 모두 자신의 뒤에 있다고 말할 정도로.

    “못 믿는 거 같은데. 그럼 가보면 되잖아. 괜찮지 마스터?”

    유피테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허락이 떨어지자 펜데는 당당한 걸음걸이로 앞장섰다. 에냐는 의심을 풀지 않고 그 뒤를 따랐다.

    ‘서로 성격이 너무 비슷해도 싸울 수 있구나.’

    유피테르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칼리스토들을 쫓았다.

    물론, 움직이기 전에 카르멘의 시체를 아공간에 집어넣었다. 초월자들의 저택이라고 해도 모든 게 허용되지는 않았으니.

    * * *

    칼리스토 저택 3층.

    최고 서열의 세 사람만에게만 허락된 방이었다.

    원래 차등을 두려고 하지 않았으나, 서열 전쟁에 동기를 부여하려고 하다 보니 이렇게 되었다.

    펜데는 성큼성큼 문 앞으로 다가가 문을 두드렸다.

    쿵쿵!

    “디오 언니! 여기 있지? 아니, 분명히 있었으니까. 빨리 나와서 이야기 좀 하자.”

    실례가 된다는 생각은 머릿속에 없는 듯, 어마어마하게 큰 소리였다. 그 소리는 다른 선택지 따윈 용납하지 않겠다는 확신으로 가득했다.

    “디오 언니는 없다니까.”

    에냐는 그 모습을 보며 코웃음을 쳤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바람 마법으로 미리 저택을 확인했다. 디오 언니 자신보다 강했기에 기감을 속일 수도 있었으니까.

    그 결과 이곳에 없다는 생각만 더 강해졌다.

    하지만, 상황은 에냐의 기대와는 다르게 흘러갔다.

    콰아앙! 쿵! 쿵! 쿵!

    무언가 무거운 게 땅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점점 더 가까워졌다.

    “펜데, 혹시 실험하던 몬스터 중에서 놓친 거라도 있나.”

    유피테르가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저건 인간이 낼 수 없는 육중한 소리였다. 자연스레 지하에 위치한 펜데의 실험실이 연상되었다. 그곳에선 온갖 실험들이 이루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럴 일은 없어. 마도 공학자로서 내 자부심이 그걸 용서하지 않는다고 마스터.”

    펜데는 손을 저었다. 그리고 이번만큼은 에냐도 편을 들어주었다.

    “얘가 마도 공학에 얼마나 미쳤는지 마스터도 알잖아요? 그리고 저 안에 있는 건 적어도 몬스터는 아니에요.”

    유피테르 일행의 궁금증은 금세 풀렸다. 칼리스토 자매들 중 둘째인 디오가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기에.

    “마스터? 펜데랑 에냐까지? 사람을 자는 데 깨우는 게 어딨어. 오랜만의 휴식인데 너무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디오의 모습을 확인하자 펜데는 주먹을 불끈지고 환호성을 내질렀다.

    “봐! 보라고 에냐. 이게 바로 마도 공학의 힘이라고. 바실리 님께서도 인정한 마법의 새로운 분야란 말이야.”

    “그래. 그래. 대단하십니다.”

    “너…. 언니에게 그게 무슨 말버릇이야?”

    “대단하신 분께 제가 감히 어떻게 말을 걸겠습니까? 전 이만 쉬러 가겠습니다.”

    그 말만을 남기고 에냐는 바람의 마법을 이용해 도망쳤다. 펜데는 아쉬운 표정으로 뒤를 돌아 유피테르에게 물었다.

    “그래서. 디오 언니가 필요했던 이유가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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