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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도 포기한 대공자-214화 (214/265)
  • 마족의 그림자(6)

    * * *

    “그런 악수를 두다니. 아르테미스로서는 실격이구나, 아들아.”

    카르멘은 베타와 달랐다.

    정면 승부를 가뿐히 피하고서 유피테르의 머리 꼭대기에 앉아 버렸다.

    ‘젠장, 역시 쉽지 않잖아.’

    유피테르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뻔뻔한 얼굴을 보니 울화통이 치밀었다.

    카르멘이 제대로 대답해 줄 거라고 기대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정보량에서 압도적으로 밀려버리니 짜증이 났다.

    이렇게 몰리는 건 오랜만이었다.

    이대로는 카르멘의 실에 놀아나는 인형이 될 뿐이었다. 그 점을 명확히 알고 있는 유피테르는 노선을 틀었다.

    “그래서 당신의 소원은 이룬 거야?”

    “소원, 소원이라. 이것 참 그리운 단어를 꺼내 드는구나.”

    카르멘은 천천히 유피테르에게로 다가왔다.

    한 발자국,

    두 발자국,

    느릿느릿한 속도였지만, 어마어마한 살기가 느껴졌다. 이에 유피테르는 움직이지 않았다.

    겁을 먹은 건 아니었다.

    다만, 오흐트가 문제였다. 저 살기가 그녀에게 향하면 위험했다. 칼리스토라도 쓰러져 있는 상태에서는 무적이 아니었다.

    카르멘은 오른손을 유피테르의 어깨 위에 올리고서는 작게 속삭였다.

    “아들아. 그런 식으로 행동하면 속내를 다 들킨다고 몇 번이나 이야기했느냐.”

    예상대로 유피테르의 생각은 전부 읽히고 있었다.

    역시 심리전으로 카르멘을 상대하는 건 위험했다. 그야말로 뒤가 없는 도박이었다.

    탓!

    유피테르는 어깨 위에 올려진 손을 강하게 뿌리쳤다.

    마음을 그대로 대변한 듯 푸른 마나까지 슬그머니 고개를 내밀었다.

    “못 보던 사이 꽤 신경질적이 되었구나. 마나 제어를 그렇게밖에 하지 못하다니.”

    “당신에게 배운 거라고.”

    “내게? 나는 그런 식으로 가르친 기억 따위는 없다만?”

    카르멘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말을 이었다.

    “어떻게 이곳을 찾아냈는지는 모르겠지만, 잘 왔다.”

    그 말은 들은 유피테르는 확신했다. 대화를 계속하는 것이 더는 의미가 없다고.

    정말 카르멘 본인이 맞는지조차 의심스러웠다.

    결정을 내린 유피테르는 신속하게 행동했다.

    ‘오흐트부터 구출하는 게 먼저야.’

    유피테르는 메르카르트를 사용했다.

    마나가 몸속 곳곳에 스며들며 육체가 강화되는 게 똑똑히 느껴졌다.

    탓!

    발을 아주 살짝 움직였는데도 한순간에 오흐트의 옆에 도착했다.

    “호오….”

    카르멘은 그저 유피테르를 바라만 보았다. 딱히, 방해할 생각은 없는 듯했다.

    유피테르는 뒤통수에 쏟아지는 카르멘의 시선을 애써 무시했다.

    어린 시절에 지독하게 당해보았기에 문제는 없었다. 완전히 극복하지 못했을 뿐, 익숙해진 지 오래였다.

    “가서 쉬고 있어.”

    유피테르는 오흐트의 몸을 들어 올렸다. 작은 체구에 알맞게 솜털처럼 가벼웠다.

    그 후, 공간 이동을 활용해 오흐트를 칼리스토 저택으로 보냈다.

    앞으로 벌어진 싸움에 그녀가 휘말리는 걸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카르멘은 오흐트가 돌아갈 때까지 공격하지 않았다.

    아르테미스 가문의 기본 섭리가 상대방의 허점을 찌른다는 걸 생각하면 의외였다.

    준비된 유피테르가 뒤를 돌며 전투 자세를 취하자 카르멘이 손뼉을 쳤다.

    “그건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아들아.”

    “당신에게 칭찬받아서 기분이 좋다면 그 사람의 감성이 이상한 거겠지.”

    카르멘과는 대조적으로 유피테르의 기분은 곤두박질쳤다.

    카르멘 아르테미스라는 완벽한 반면교사였다. 이런 존재와 동류가 되는 건 절대로 사양하고 싶었다.

    “브라보! 그것이야말로 내가 원하던 거다. 역시, 나의 후계자로 가장 적합한 건 너다, 유피테르.”

    카르멘은 유피테르의 조소를 가볍게 흘려넘겼다.

    “헛소리 그만하고 덤벼. 빌어먹을 자식아.”

    “허어…. 네가 하나 잘못 알고 있는 것 같으니 이번 기회에 설명해주도록 하마.”

    구미가 당기는 제안에 유피테르는 망설였다.

    카르멘이 거리를 좁혀온다고 해도 충분히 반응할 수 있었다.

    근거리 공격은 메르카르트로 피하면 그만이었고, 원거리 공격 마법은 결계로 막아내면 되었다.

    최악의 상황이 온다고 해도 여전히 ‘봉인’이 남아있었다.

    유피테르가 고민한 2초 남짓의 시간. 카르멘은 그 공백을 철저하게 이용했다.

    카르멘 식 조화 마법 – 혼돈의 창

    검푸른 마나는 순식간에 창의 형상으로 변했다. 카르멘은 그 창을 꼬나쥐고서 마나를 흩뿌렸다.

    촤르르르르륵!

    불투명한 얼음이 유피테르에게로 향하는 길을 완성했다.

    카르멘이 그 길에 발을 올리자마자 엄청난 가속이 붙었다. 마치, 육체 강화를 사용한 것처럼.

    숨을 막히게 하는 풍압에도 카르멘은 눈 하나 깜박이지 않았다. 그 대신 자세를 잡았다.

    언제라도 창을 휘두를 수 있도록.

    샤아악!

    얼음 길의 끝에 도달하자마자, 카르멘은 유피테르의 목을 베었다.

    마법사 출신이었음에도 그의 베기는 물이 흐르듯 깔끔했다.

    “간단하군.”

    카르멘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마법을 해제하지는 않았다.

    유피테르 아르테미스란 마법사가 이대로 끝날 리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빈틈을 제대로 노리고 손맛도 확실했지만, 아직 긴장을 풀어서는 안 되었다.

    물론, 어떤 반격이 오더라도 이길 자신이 있었다. 이건 시작조차 아니었으니까.

    * * *

    ‘젠장. 어처구니가 없구만.’

    예상했던 타이밍에 정확히 들어온 공격.

    메르카르트와 방어막을 이용해 막아내긴 했다. 하지만, 한 방 먹은 게 뼈아팠다.

    고위 마법사들의 전투에서 턴을 뺏기는 건 치명적이었으니까.

    “누구 마음대로 간단하다고 말하는 거야?”

    “역시, 살아 있었군. 이 정도로 죽었으면 실망할 뻔했다, 아들아.”

    “아들, 아들 그 소리 집어치워!”

    유피테르는 메르카르트를 유지한 채로 마법을 준비했다. 넘쳐나는 게 마나였기에 이 정도야 쉬웠다.

    ‘가벼운 마법으로는 생채기조차 나지 않을 거야. 일단 조화 마법으로 가볼까.’

    이미 간파된 얼음 마법을 사용하는 건 바보 같은 짓이었다. 심지어, 상대는 한때 얼음 마법의 대가로 불리던 자였다.

    유피테르 식 조화 마법 – 신성한 얼음 창

    왼손에는 신성 마나를, 오른손에는 얼음 마나를 모았다.

    서로를 밀어내던 마나들은 어느 순간부터 하나가 될 준비를 마쳤다.

    조화 마법을 보자 카르멘의 가면이 처음으로 부서졌다.

    “그, 그건…. 네 녀석이 어찌 그 마법을! 혼자서 조화 마법을 쓰는 건 나 뿐이란 말이다.”

    유피테르는 카르멘의 절규를 들으며 마법을 완성했다.

    푸른 마나와 합쳐진 흰색의 마나는 영롱한 빛을 내며 창을 빚어냈다.

    딱히, 창을 고집할 생각은 없었다. 그저 같은 방식으로 카르멘에게 한 방 먹여주고 싶었을 뿐.

    그게 가장 효과적일 테니까.

    우우우웅!

    유피테르는 땅을 박찼다.

    메르카르트는 근육을 자극해 유피테르와 카르멘 사이의 거리를 좁혔다.

    증오스러운 아버지의 눈을 바라보며 유피테르는 창을 휘둘렀다.

    콰아아앙!

    조화 마법으로 만들어진 창은 카르멘이 만든 방어막에 막혔다.

    누가 더 우위에 있다고 콕 집어 말할 수 없는 상황에서 카르멘은 웃었다.

    “그게 네가 준비한 최후의 수단이라면 나의 승리다, 아들아!”

    근본적으로 마법사들의 전투는 보유한 마나의 양으로 결정되었다.

    이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에키드나의 힘을 얻은 자신이 고작 인간에게 질 리는 없다고 은연중에 생각했다.

    ‘카르멘 비제가 아닌 건가?’

    유피테르의 의구심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얼음성에서의 일을 기억하고 있다면 단순한 힘겨루기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 유피테르는 궤를 달리하는 마나를 사용해 카르멘을 찍어 눌렀으니까.

    진짜 카르멘이었다면 패배에서 아무것도 학습하지 않았을 리 없었다.

    아르테미스 가문이 무서운 건 패배의 아픔조차 성장의 밑거름으로 삼았다는 점이었으니까.

    우우웅!

    몇 분 동안 유피테르와 카르멘 사이의 힘겨루기가 계속되었다.

    두 마법사는 다른 마법은 시도조차 하지 않은 채, 창과 방패에 마나를 무작정 집어넣었다. 명성에 맞지 않는 미련한 짓이었지만, 자존심 싸움이어서 물러설 수도 없었다.

    “왜? 이제 힘이 좀 드나봐? 역시 나이는 못 속이겠지?”

    “그런 못 된 말 버릇은 어디서 배운 거냐.”

    “당신에게서 배웠다니까?”

    카르멘은 슬슬 한계가 도달했는지 땀을 뻘뻘 흘렸다. 반면에 유피테르는 여유가 넘쳤다.

    -너에게는 세상 그 누구도 가지지 못한 재능이 잠들어 있어.

    유피테르가 가진 재능은 무려 바실리가 직접 인정한 거였다. 처음 만났을 때 했던 사기꾼 같은 말은 결코 거짓이 아니었다.

    그에게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재능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

    “난 아직 1할도 사용하지 않았다고!”

    “치, 치잇. 나, 나, 나도 마찬가지다. 아들아.”

    유피테르는 추억을 회상하며 출력을 두 배로 올렸다. 카르멘 역시 지지 않기 위해 마나를 한가득 불어 넣었다. 그것이 유피테르의 노림수라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 채.

    ‘대, 대체 이 녀석은….’

    끝이 보이지 않는 마나 싸움에 카르멘은 혀를 내둘렀다.

    가볍게 승리할 거라는 생각은 옛날옛적에 버렸다. 어떻게든 반전을 만들지 않는다면 패배는 불 보듯 뻔했다.

    명령을 어기고 나섰는데, 싸움에서 진다면 면목이 없었다. 무슨 벌이 기다리고 있을지 상상하는 것부터 무서웠다.

    “마나 싸움 중에 싸우면 회로가 고장 난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을 텐데!”

    유피테르는 한 번 더 출력을 올렸다.

    방금 전과 마찬가지로 정확히 두 배였다. 말이 두 배였을 뿐, 이미 조디악의 수준조차 넘어선 상태였다. 이 이상의 마나를 지니고 있는 건 마족밖에 없었다.

    ‘카르멘 비제. 정말 마족으로 변하기라도 한 건가?’

    유피테르의 머릿속이 맹렬하게 회전했다.

    카르멘이 진짜인지는 둘째치고, 적어도 인간이 아니라는 건 확인했다. 인간은 이 정도의 마나를 뽑아내지 못했으니까.

    억지로 마나를 끌어내면 그 뒤에 기다리는 건 죽음뿐이었다.

    “으으읍….”

    유피테르가 고민하고 있을 무렵 이변이 발생했다.

    카르멘의 얼굴이 급격히 늙더니 마나의 양과 질이 가파르게 낮아졌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방어막마저 부서져 버렸다.

    틀림없는 마나 부족 현상이었다.

    ‘드디어 오는 건가. 자, 이제 네 정체를 밝혀보라고.’

    노림수가 제대로 적중하자 유피테르는 그제야 미소를 지었다.

    카르멘 비제가 상대라면 쉽게 이길 수 없었다. 처음부터 심리전에서 지고 들어가기도 했고.

    그래서 자존심을 건드려 마나 싸움으로 끌고 가자고 마음먹었었다. 바실리를 제외하고 자신보다 많은 마나를 보유한 자는 없었으니까.

    게다가 바실리 컬렉션이라는 사기적인 아티팩트도 여럿 보유한 상태였다. 어떻게든 판만 만든다면 지는 그림은 그려지지 않았다.

    “네놈은 누구냐. 인간이 이런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건 들어본 적이 없다!”

    카르멘은 털썩 주저앉았다. 마나가 부족하기에 서 있는 것조차 힘들었고, 소리를 지를 기운도 부족했다.

    유피테르는 그런 그를 비웃으며 말했다.

    “누구긴 누구야. 당신의 아들인 유피테르 아르테미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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