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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도 포기한 대공자-213화 (213/265)
  • 마족의 그림자(5)

    * * *

    “어쩌다 보니까, 이곳에 와 있더라고.”

    “그게 말이 되는 소리야?”

    어이없는 답변에 오흐트는 자리에 주저앉았다.

    어차피 주변에서 마나 반응이 하나도 감지되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편하게 있어도 문제가 없었다.

    “그런 식으로 앉는 건 위험하다고 몇 번이나 말하니.”

    유피테르는 손을 들어 아공간을 열었다.

    도저히 믿기지 않는 넓은 공간. 그 안에는 상상도 못 할 것들이 많이 들어 있었다.

    착!

    유피테르는 마나를 이용해 천 하나를 꺼내 바닥에 깔았다. 야외 용으로 특별 제작된 피크닉 카펫이었다.

    “이런 산속에서 맨바닥에 앉는 건 위험해. 치유사인 네가 가장 잘 알잖아?”

    유피테르는 카펫을 위에 앉았다. 깃털로 만들어져서 그런지 촉감이 부드러웠다.

    바실리 컬렉션은 단 한 번도 기대를 배신하지 않았다.

    “치이, 알았어.”

    오흐트는 못 이기는 척 자리를 옮겼다.

    차디찬 땅바닥에 앉는 건 솔직히 싫었다. 다리를 통해 으슬으슬한 기운이 그대로 전해졌으니까.

    유피테르는 오흐트가 오자마자 적당한 홍차를 꺼내 세팅했다. 그 전에 결계를 펼쳐 안전을 확인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오흐트는 자연스럽게 찻잔을 받아들고는 한 모금 들이켰다.

    따듯한 차가 목을 타고 넘어가자, 날카로워졌던 신경이 조금씩 원래대로 돌아왔다,

    “마스터 정도 되는 마법사가 공간 이동을 주먹구구식으로 할 리가 없잖아. 사실대로 말해줘.”

    공간 이동

    이 고대 마법은 아무나 사용할 수 없었다. 가고자 하는 곳의 좌표를 정확히 알아야만 했기에.

    만약 마법 수식 계산이 어긋난다면 육체가 여러 조각으로 나뉠 수도 있었다.

    동시에 여러 곳에 있는 듯한 느낌은 불쾌하기 따로 없었다. 심지어, 그 상태에서는 움직이지 못했다.

    이러한 단점 때문에 먼 거리를 이동할 때는 게이트를 사용하게 된 것이다.

    “사실대로?”

    “응. 어차피 여기에는 마스터와 나밖에 없잖아. 대체 뭘 두려워하는 거야?”

    “그게 무슨 소리지?”

    “손을 봐봐.”

    유피테르는 시선을 천천히 옮겼다. 그러자 두 손이 덜덜 떨리는 게 보였다.

    ‘내가 겁을 먹고 있다고…?’

    산속이긴 하더라도 아직 여름이었다.

    게다가 그는 누구보다 냉기에 익숙한 사람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얼음 마법을 사용할 수 없었을 테니까.

    “마스터는 항상 혼자만 알려고 하니까 그런 거라고. 그러니까 이번에는 같이 고민하자. 응?”

    진심으로 빚은 오흐트의 말은 유피테르의 가슴을 울렸다.

    마냥 어리게만 행동하는 그녀였지만, 속내는 누구보다 깊었다. 그저 인간들의 양면성에 싫증이 나서 과거를 덮었을 뿐이었다.

    “칼리스토 중에….”

    유피테르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언니들이 뭐? 무슨 문제가 있었어?”

    “배신자가 있는 거 같다.”

    유피테르의 폭탄선언에 오흐트가 입을 다물었다.

    칼리스토 자매들은 계약을 맺은 상태였다. 그 위에 충성심이 덧씌워진 것이었다. 바실리가 직접 고안한 계약 마법은 예외도 없었고 벗어날 수도 없었다.

    그 사실을 잘 아는 오흐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

    “말도 안 돼! 그건 바실리 님의 힘이 부족하다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고!”

    “나도 알아. 하지만, 이것 말고는 다른 가설이 떠오르지 않으니까.”

    유피테르는 베타의 마지막을 알기 쉽게 설명했다. 처음에는 부정적이던 오흐트는 시간이 지날수록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그건 확실히…. 그러면 혹시, 이런 거 아닐까?”

    “어떤?”

    “이상한 침입자가 저택에 마법을 미리 걸어 놓은 거야. 마족이라면 그런 것도 가능하잖아? 그것들 중에 마스터가 공간 이동에 간섭하는 것도 있는 거지.”

    그럴듯한 추론이었다. 하지만 유피테르는 금세 빈틈을 찾아내 버렸다.

    “저택에서 내가 원하지 않은 곳으로 간 건 이번이 처음이었는데?”

    “하지만, 마스터가 저택에 돌아온 건 진짜 오랜만이잖아? 늘 밖에서 움직였으니까.”

    유피테르는 이 저택에 얼마나 오래 있었는지 생각했다.

    실제로, 타르타로스의 결계를 살펴본 이후 저택에는 자주 오지 않았다.

    저택 곳곳에 바실리의 흔적이 남아있었기 때문이었다. 또, 칼리스토가 필요할 경우 부르면 그만이었다.

    “확실히 말이 되긴 하네.”

    “그치? 그러니까 죄가 없는 언니들 의심하지 말고 여기 일부터 해결하자!”

    그렇게 근심 하나를 걷어내려고 하려는 순간.

    파바바박!

    유피테르가 만든 결계로 여러 개의 마법 화살이 날아왔다. 말 그대로 기습 공격이었다.

    결계는 마법을 상처 없이 막아냈다. 그러나 유피테르가 주목한 건 다른 점이었다.

    ‘마나 감지에서 벗어나다니?’

    극히 일부의 경우를 제외하면 마나 감지를 벗어나는 건 불가능했다. 창조신 레아의 자식들은 하나같이 마나를 몸에 지니고 있었으니까.

    단지, 보유한 양에서 차이를 보일 뿐이었다.

    “마스터. 이 기운은….”

    “알고 있어.”

    유피테르는 먼저 결계를 해제했다.

    이 습격자는 왜인지 모르게 익숙한 마법식을 사용했다. 그의 짐작이 맞다면 방어만 해서는 이길 수 없을 게 분명했다.

    우웅!

    유피테르는 바로 마나를 끌어올리며 전투 준비에 들어갔다. 옆에 있던 오흐트 역시 신성 마나를 내뿜으며 적의 공격에 대비했다.

    “오랜만이다. 바보 같은 아들아.”

    유피테르 일행을 습격한 자는 바로 모습을 드러냈다. 딱히, 정체를 숨길 생각은 없는 듯했다.

    “화살에 담긴 마나를 보고 설마 했어. 정말로 당신이었나? 카르멘 비제.”

    유피테르가 낮게 으르렁거리며 마법을 쏘아냈다. 차가우면서도 잘생긴 얼굴을 보고 있자니 화가 솟구쳐 올랐기에.

    유피테르 식 얼음 마법 – 얼음 화살 & 얼음 창

    이제는 주먹과도 같은 느낌을 주는 두 개의 마법이 순식간에 세를 불렸다. 하지만, 카르멘 역시 보통 마법사가 아니었다.

    “전력을 다하지 않고 상대의 실력을 확인하는 건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만….”

    카르멘 식 조화 마법 ― 혼돈의 화살

    카르멘은 순식간에 마법을 완성했다.

    그의 마나 색은 유피테르가 기억하던 푸른색이 아니었다. 어둑어둑한 마족의 마나와 섞여 불투명했다. 마치, 카테리나의 상태와 비슷해 보였다.

    콰아아앙!

    정체를 알 수 없는 화살 격돌한 얼음 마법들은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그 흔한 냉기조차 남기지 않고서.

    “…이번에는 상대가 좋지 않았다고 해야겠구나.”

    카르멘은 곧바로 다음 마법까지 완성시켰다.

    카르멘 식 조화 마법 ― 혼돈의 비

    “마스터를 상대하려면 나부터 쓰러트려야 할걸!”

    오흐트는 유피테르를 지키듯 앞에 서더니 신성 마법으로 방어막을 만들었다.

    한 턴.

    딱 한 턴만 벌어주면 유피테르가 이길 거라고 믿었다. 그의 분석 능력과 힘은 바실리 님조차 인정한 것이었으니.

    “그만둬! 오흐트!”

    유피테르가 오흐트를 만류했다.

    하지만, 한발 늦고야 말았다. 카르멘의 만든 비는 그대로 오흐트의 신성 방어막을 꿰뚫었다. 놀란 오흐트가 황급히 마나를 더했으나, 이미 기울어버린 기세를 뒤집지는 못했다.

    “자, 아들아 드디어 둘만의 시간이 왔구나.”

    카르멘은 흡족하게 웃으며 유피테르를 바라보았다.

    오흐트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쓰러지자 유피테르는 입술을 깨물었다.

    마족 공작이 상대라도 칼리스토를 쉽게 무너트릴 수 없었다. 설령, 힘이 봉인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게다가 오흐트는 성녀였다. 마족이 상대라면 압도적인 우위를 차지할 수 있었다.

    ‘뭔가 이상해….’

    카르멘이 뿜어내는 묘한 마나를 볼 때마다 기분이 나빠졌다. 너무나도 역겨워서 당장이라도 토할 것만 같았다.

    “당신은 오래전에 날 버린 게 아니었나?”

    “하하하하…. 내가? 내가 널 버렸다고 생각했느냐.”

    오랜만에 보는 카르멘의 모습은 이상했다.

    사용하는 마나와 마법은 물론, 말투마저 그답지 않았다. 마치, 누군가 그의 모습을 흉내 내는 것처럼.

    “리나에게 가주 후보를 넘겼고, 나는 거들떠보지도 않았잖아? 당신 때문에 난 몇 번이고 죽을 뻔했다고!”

    유피테르의 목소리에는 한이 맺혀 있었다.

    이제 와서 카르멘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생각은 없었다. 다만, 복수하고 싶었다.

    바실리를 만나지 않았다면 그는 그날 죽었을 게 틀림없었으니까.

    “내게 복수하고 싶으냐?”

    카르멘이 생각을 읽은 듯 중얼거리자 유피테르는 흠칫하며 몸을 떨었다.

    “여전하구나. 생각을 읽히면 티를 내는 그 버릇은. 그러니 네게 가주의 자리를 맡기지 않은 거다. 네 동생은 너보다 냉혹하니까 말이다.”

    “웃기지 마!”

    유피테르 식 얼음 마법 – 얼음 기둥

    쿠웅! 쿠웅! 쿠웅!

    얼음 기둥이 땅을 부수고 솟아났다.

    산속이라고 해도 유피테르 정도의 마법사에게 이 정도는 간단했다. 속성 마법이 가지고 있는 최고의 장점이 바로 이것이었다.

    이들은 어느 곳에서도 마나로 현실에 간섭할 수 있었다.

    “아직도 깨닫지 못했느냐?”

    카르멘은 닥쳐오는 얼음 기둥에도 여유로웠다. 가볍게 손가락을 튕기자 머리 위에 많은 수의 마법진이 동시에 나타났다.

    “고대 마법? 어떻게 당신이 그걸!”

    유피테르는 흘러가는 상황을 믿을 수가 없었다.

    고대 아티팩트 옴팔로스가 보여주었던 마법진의 세례. 그건 현재 마법사들의 손에 닿지 않는 곳에 있었다. 조디악이라고 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카르멘은 유피테르의 말을 비웃듯 마법진을 일렬로 정렬했다. 보기만 해도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장관이었다.

    “이것도 한 번 막아 보거라.”

    카르멘은 마법진을 최대한 활용해 마법을 강화했다.

    그러나 유피테르는 틈을 주지 않았다. 그의 전술은 얼음성의 마법사들을 닮아 잔혹하고 냉철했다.

    “싫은데.”

    유피테르 식 특제 마법 – 니플헤임

    공기와 마나조차 얼리는 최강의 얼음 마법이 펼쳐지며 공간을 집어삼켰다.

    유피테르는 오흐트가 휩쓸리지 않게 정확히 카르멘이 있는 곳만을 노렸다.

    전술이 제대로 허를 찔렀는지 카르멘이 애써 준비한 마법진들이 얼어붙은 후 산산이 조각났다.

    “상대가 보여주는 빈틈을 이용하라. 이게 당신의 전술이잖아?”

    마법진이 전부 부서졌는데도 카르멘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유피테르를 도발하듯 이야기를 이어갔다.

    “만족스럽구나. 내 아들아. 역시 너야말로 내 후계자로 적합하다.”

    “웃기지 마! 당신은 아르테미스의 이름을 버린 배신자잖아. 지금 쓰는 마법도 근본도 없어 보이는데?”

    유피테르는 반쯤 확신하고 있었다. 카르멘이 카테리나와 같은 방식을 사용했다는 걸.

    얼음성에서 공격에 맞아 사라졌을 때, 카르멘은 재기 불능의 부상을 입었었다. 그러나 현재 그의 상태는 너무나 멀쩡했다.

    그런 일은 없었다는 것처럼 깨끗했다.

    그 대신, 카르멘의 한쪽 눈동자가 흑요석처럼 빛나고 있었다.

    ‘어쩔 수 없나.’

    카르멘의 목적을 추론하기에는 정보가 부족했다. 게다가 눈앞의 마법사는 심리전의 달인이었다. 어중간한 잽을 날렸다간 스트레이트를 맞을 수도 있었다.

    그래서 유피테르는 제대로 맞부딪치기로 마음을 정했다.

    “카르멘 비제. 에키드나랑 당신이 노리는 게 대체 뭐야? 마족과 인간이 손을 잡고 대륙 전쟁을 한 번 더 일으킬 생각이기라도 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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