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도 포기한 대공자-212화 (212/265)

마족의 그림자(4)

* * *

‘그럴 리 없어.’

유피테르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모든 걸 제쳐두고서 바실리를 찾는 게 그녀를 위한 거라고 생각했다.

자잘한 일들이 많았지만, 언제나 바실리만을 생각했다. 마족을 쓰러트리는 것도 그 일의 연장선에 있었다.

‘바실리가 내가 행복하기를 원했다고?’

그건 대단한 착각이었다.

유피테르의 행복은 바실리 없이 완성되지 않았다. 회색빛 세계에 다채로운 색감을 넣어준 게 바로 그녀였으니까.

유피테르의 생각과는 별개로, 오흐트와 트리아의 싸움은 절정으로 치달았다.

“떨어져어어어어어엇!”

“그 사실을 당신만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 말란 말입니다!”

콰아앙!

오흐트의 신성 마법과 트리아의 중력 마법이 정면에서 충돌했다.

옛날 옛적에 인간을 초월한 두 사람의 마법은 부딪치는 것만으로 마나 공명을 만들어냈다.

원래, 마나 공명은 조화 마법의 전 단계였다.

더 강한 마법을 구성하기 위해 한 발자국씩 물러나는 게 보통이었다.

그러나 서로에게 적의를 품은 상황이었기에 마법이 점점 더 불안정해졌다.

급격하게 마나를 소모하는 건 덤이었고.

“난 아직 실력의 10%도 안 사용했어!”

“그래서 한 번도 이기지 못했습니까? 헛된 발버둥은 그만하고 포기하란 말입니다!”

상황은 트리아를 향해 웃어주었다.

초대 성녀가 대단하다고 해도 상대는 하이 엘프였다. 종족 간 상성을 쉽게 뛰어넘는 건 어려웠다.

게다가 신성 마법은 원래 지원에 특화되어 있었다. 상대방을 억눌러서 제압하는 중력 마법을 이길 리 없었다.

실제로, 지금까지 대련에선 모두 트리아가 승리를 거머쥐었었다.

“수고했습니다!”

끝을 낼 수 있다고 확신한 트리아가 작게 미소 지었다.

늘 무표정한 그녀였지만, 입꼬리가 미미하게 올라가 있었다.

그러나 오흐트는 포기를 몰랐다.

마나를 빼앗겨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성검이 왜 초대 성녀의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똑똑히 알려줄게!”

오흐트는 정신을 집중하고서 신성 마나를 한 곳으로 유도했다.

그러나 무언가 평소와 달랐다.

부드럽게 마나를 뽑아내려고 해도 몸이 거부했다. 하이 엘프인 트리아의 출력에 맞추느라 성한 곳이 없었다.

이미 한계였다.

트리아는 위험 신호를 무시하고서 비장의 수단을 완성했다.

여기서 이기지 않으면 모든 것들이 수포가 될 테니까. 유피테르가 지옥으로 돌아가는 걸 지켜보고 싶지 않았다.

오를레앙 식 특제 마법 – 신의 단죄

“무, 슨?”

마나 출력을 서서히 줄이던 트리아의 눈동자가 커졌다.

오흐트는 쓰러지기 직전이었다.

마법을 완성하기는 했으나, 몸이 덜덜 떨렸다. 전형적인 마나 부족 현상이었다.

제 살을 깎아가면서 싸우려는 걸 이해할 수 없었다.

“포기할 것 같아?”

오흐트는 하나의 창이 되었다.

찌릿찌릿한 신성 마나를 방출하며 트리아를 향해 날아갔다.

마지막 발버둥처럼 보이는 행동에 트리아는 중력 마법의 강도를 높였다.

헛된 희망을 심어주기보다는 빨리 편안하게 만들어 주는 게 나았으니까.

“으으으….”

신의 심판을 본뜬 거대한 창은 트리아에게 닿지 못했다. 점점 기세를 잃더니 중간쯤에서 기세를 잃고 고꾸라졌다.

“그런 벼락치기로 날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까?”

“응. 실제로 내가 이겼어.”

“뭐라…?”

오를레앙 식 특제 마법 ― 마법 회복

우우우웅!

지리멸렬해졌던 마법이 갑자기 기세를 회복했다.

그 타이밍에 맞춰 오흐트는 다시 한번 땅을 박차고 앞으로 향했다.

트리아가 제대로 반응하기도 전에 이미 꿰뚫었다.

“마법 자체를 재생시킨다니. 말도 안 돼!”

트리아는 경악성을 내뱉었다.

마나 회로가 공격당해 내상을 입었지만, 이런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오흐트가 마법과 마나를 원래 상태로 회복시켰기에.

치유 마법은 원래 상처를 낫게 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마나와 마법은 절대로 그 대상이 되지 않았다.

“아직 놀라기는 이르다고!”

오를레앙 식 신성 마법 – 신성 폭탄

오흐트는 공격의 고삐를 놓지 않았다.

성국의 기사들이 즐겨 사용하는 구 형태의 마나를 그대로 손에 만들어냈다.

구체는 강하게 약동했다. 마치, 언제라도 폭발을 일으킬 수 있다는 듯이.

오흐트는 비틀거리는 트리아에게 신성 폭탄을 꽂아 넣었다.

“봐! 나도 하면 하는 사람이라고. 트리아 언니가 이긴 건 그저….”

승리를 직감한 오흐트는 우쭐거렸다.

처음 보는 연계 마법에 트리아는 분명히 흔들렸다. 또, 방어 계열의 마법을 사용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저 상황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존재는 둘밖에 없었다.

하지만,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어라?”

신성 폭탄이 제대로 들어갔으면 폭발이 일어나야만 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자 오흐트는 고개를 돌려 유피테르를 보았다.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건 오직 한 사람뿐이었으니까.

유피테르의 예상대로였다.

생각을 정리한 유피테르가 어느새인가 끼어든 상태였다.

딱히, 특정한 마법을 사용한 건 아니었다.

그저 푸른 마나를 흘러나오는 것뿐인데도 온 세상이 공포에 떨었다.

초대 성녀였던 오흐트의 마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마나가 사라졌으니 마법이 제대로 작동할 리 없었다. 트리아에게 날린 마지막 일격은 없던 일이 되어버렸다.

“오흐트, 장난이 지나치다.”

“마스터! 왜 내가 승리하는 걸 방해하는 거야. 조금만, 아주 조금만 있었으면 내가 이기는 건데!”

승리를 빼앗긴 오흐트는 억울함에 소리를 질렀다.

기념할만한 첫 번째 승리의 순간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허무함이 차올라서 어쩔 줄을 몰랐다.

“이번 건, 너의 승리로 해도 좋다 오흐트.”

트리아가 오흐트에게 선언했다.

이번 연계는 상상 이상으로 뛰어났다. 어째서 이런 걸 보여주지 않았냐 싶을 정도였다.

‘이런 걸 숨기고 있었나.’

칼리스토들은 대련에서 모든 패를 보여주지는 않았다.

그들이 전력을 다하면 결계 정도야 가뿐하게 파괴했기 때문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대륙에 악영향을 미칠 수도 있었다.

세계의 균형을 지키는 이들이 그런 불상사를 일으킬 수는 없었다.

유피테르는 트리아와 오흐트의 몸 상태를 확인했다.

저택 여기저기에 전투의 흔적이 남아있었지만, 생명에 지장은 없어 보였다.

그러나 겉보기와 다르게 문제가 있을 수도 있었다.

그래서 굳이 물어보았다.

“꽤 진심으로 싸운 거 같은데 두 사람 모두 괜찮아?”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신이시여.”

트리아는 괜찮다고 대답했다.

곧바로 마법을 사용해 저택을 청소하는 걸 보니 큰 문제가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들었지. 마스터? 마스터가 증인이야. 내가 드디어 트리아 언니를 이겼단 말이야!”

오흐트는 무언가 달라도 한참 달랐다.

상처를 치유하기보다는 승리에 더 집착했다. 웃으면서 손으로 브이 자를 그리는 모습은 그저 천진난만했다.

그 순간 유피테르의 머릿속에 괜찮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트리아가 이겼다고 말한 걸 내가 보증해주지.”

“고마워 마스터!. 케이크 다음에는 승리라니 너무 행복한 하루가 되었는걸.”

그러나 유피테르의 작전은 지금부터가 진짜였다.

“그러면. 카르멘을 잡으러 너와 둘이서 가도 되겠지?”

“어?”

“네가 서열 3위를 이길 정도의 강자니. 다른 칼리스토는 필요 없게 된 거 아닌가?”

칼리스토가 가진 이름은 서열을 의미했다.

초창기에는 대련을 계속 이어갔기에 서열이 수시로 바뀌었다.

그러나 유피테르가 마스터가 된 이후부터는 고정되었다. 변화보다는 안정이 더 필요한 시점이었으니까.

‘자, 어떻게 할 거니 오흐트?’

유피테르의 말을 부정하면 가까스로 트리아를 이긴 게 없던 일이 되었다.

그렇다고 유피테르의 말을 긍정하면 원래 했던 제안이 날아가 버렸다.

앞으로도, 뒤로도 갈 수 없는 상황에 오흐트는 울상을 지었다.

“너무해 마스터!”

“너무하다니. 그저 질문한 것뿐인데?”

유피테르는 어깨를 으쓱했다.

아무래도 쉽게 넘어갈 수 없을 것 같자 오흐트는 깊이 고민했다.

여기서의 선택으로 유피테르의 행보가 결정되었기에.

“마스터.”

“결정했어?”

“카르멘인지 카단인지 모르겠지만, 둘이서 가자.”

오흐트는 결국 승리를 선택했다.

포기하기에는 너무나도 달콤했기 때문이었다.

“잘 선택했어. 그럼 바로 가도록 하지. 트리아. 뒤처리는 맡겨도 되겠지?”

“예. 신이시여.”

확답을 들은 유피테르는 오흐트를 데리고 다시 세이라 제국으로 떠났다.

공간 이동의 빛이 두 사람을 집어삼킨 후.

“트리아. 이게 대체 무슨 소동이야?”

“드디어 일어난 건가, 에냐?”

에냐가 하품을 하며 등장했다.

품에는 곰 인형이 소중하게 안겨있었고, 코 위의 안경은 조금 삐뚤어져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입에서 나온 건 결코 귀여운 이야기가 아니었다.

“트리아 언니 계획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어?”

“순조롭습니다.”

“그러면 다행이네. 마스터는 어디로 갔어?”

“시에라 제국이다.”

“흐응… 일이 재미있게 되고 있네. 지켜보자구.”

* * *

유피테르가 향한 곳은 시에라 제국이었다.

하지만, 류이크스는커녕 황성이나 드워프 마을조차 아니었다. 단 한번도 가보지 못한 곳이었다.

이 점이 마음에 걸렸던 오흐트가 물었다.

“여긴 어디야 마스터? 설마, 공간 이동에 실패한 건 아니지?”

“너도 알다시피 시에라 제국이야.”

“아니 그런 걸 물어본 게 아니라구! 이런 산 속에 카르멘이라는 작자가 숨어있을 리 없잖아.”

유피테르는 대답 대신 마법을 사용했다.

유피테르 식 얼음 마법 – 얼음 화살

파바박!

수십 발의 푸른 화살이 그대로 수풀을 향해 날아갔다.

“마스터….”

“쉿.”

유피테르는 오흐트의 입을 막고서는 검지를 펴서 자신의 입에 갖다 댔다.

소리를 죽이라는 신호였다.

오흐트는 영문도 모른 체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이고서는 조용히 했다.

오흐트의 의문은 곧바로 해결되었다.

“꾸에에에에엑! 취익―.”

“꿰에에에에에엑! 취익―.”

꽤 가까운 거리에서 돼지 멱따는 소리가 들려왔다.

가축인 돼지와는 다른 특유의 말투. 그건 오크 특유의 것이었다.

“오, 오크?”

“그래.”

유피테르는 얼음 화살을 몇 차례 더 선사했다.

그럴 때마다 오크들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얼어붙었다.

유피테르가 사용하는 얼음 화살은 특별했다.

얼음 속성을 십분 살리는 건 물론, 목표를 위해서라면 물불 가리지를 않았다. 유도 성능까지 갖춘 화살은 피하는 건 쉽지 않았다.

오크의 비명소리가 끊기자 유피테르는 오흐트를 데리고 문제의 공간으로 향했다.

“세상에, 돌연변이잖아?”

오흐트의 말대로였다.

지독한 냉기 속에 가려져 있긴 했지만, 그건 돌연변이 오크였다. 초대 성녀인 그녀의 눈을 속일 수야 없었다.

한 번도 와보지 않는 낯선 곳.

이곳은 다른 곳에선 보기 힘든 돌연변이 오크들이 무리를 짓고 있었다. 돌연변이가 태어날 확률은 벼락 맞을 확률과 비슷했다.

그 사실을 알고 있던 오흐트는 유피테르에게 다시 질문했다.

“마스터 대체 이곳은 어디야? 어떻게 이곳으로 온 거야? 아무런 정보가 없었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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