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도 포기한 대공자-208화 (208/265)
  • 오크의 침공(13)

    * * *

    베타는 땅에서 뽑아낸 해머를 머리 위에서 빙빙 돌렸다. 해머의 무게감이 소리를 통해 그대로 전해졌다.

    “말도 안 돼. 저걸 저런 식으로 다룬다고?”

    해머를 장난감처럼 다루는 베타를 보며 세이라 공주가 중얼거렸다.

    무거운 무기를 사용할수록 위력이 강해지는 건 상식이었다.

    그러나 근육 역시 어느 정도 타고나는 것이었다. 모두가 그 방법을 택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꺄하하하하! 재밌어. 재밌어서 미칠 것 같아. 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 행복해.”

    “뭐가 그렇게 즐겁지?”

    “너, 너 말이야 진짜 오싹오싹해. 그분이 말한 대로야.”

    베타는 유피테르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약간 상기된 표정에선 이루 말할 수 없는 광기가 엿보였다.

    그 후, 해머를 돌리는 손에 힘을 가득 넣었다.

    우우우웅!

    해머의 중심에 어둑어둑한 마나가 모여들었다.

    세상에 있는 모든 음울함을 끌어온 듯한 흑색. 그 마나를 보고 있자니 자연스레 마족의 형상이 떠올랐다.

    ‘역시, 마족이 뒤에 있었나. 자연적인 돌연변이가 저런 마나를 사용할 리는 없으니.’

    유피테르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흑막의 단서를 얻을 기회가 제 발로 찾아왔기 때문이었다. 갑자기 찾아온 행운은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베타를 사로잡는 데 성공한다면 지겨운 추격을 드디어 끝낼 수 있었다.

    “그분이라니?”

    유피테르는 표정을 고치고서는 되물었다. 물론, 제대로 된 대답을 들을 수 있을 거라는 기대 따위 없었다.

    “나를 만들어주신 마족 주인님 말이야!”

    예상과는 달리 베타는 순순히 입을 열었다.

    의외의 상황에 유피테르는 조금 더 정보를 얻기 위해 노력했다. 조금만 더 도발하면 마족의 정체를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마족 주인이라…. 이름이 주인이지는 않을 거 아닌가? 네게 이름을 준 자는 어떤 존재지?”

    “주인님은 주인님이야.”

    “베타라는 이름답게 첫 번째는 아니었나 봐?”

    도발은 성공적이었다.

    베타는 일그러진 얼굴로 유피테르에게 달려들었다.

    두 사람 사이는 7m쯤 되었는데 그걸 한 걸음으로 좁혀버렸다. 정말로 오크가 맞는지 의심될 정도의 다릿심이었다.

    부우웅! 부우웅!

    베타는 막무가내로 해머를 휘둘렀다.

    분노에 휩싸였기에 해머의 궤적은 뻔했고, 끝은 녹슨 것마냥 무뎠다. 분노로 위기를 돌파하는 건 연극에서나 가능한 이야기였다.

    유피테르는 가볍게 몸을 틀어 공격을 피해냈다. 육체 강화법을 사용할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했다.

    “이이익…. 맞아, 맞으란 말야!”

    베타는 포기하지 않고 공격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흐름을 완벽히 파악한 유피테르를 맞추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베타는 결국 화를 참아내지 못했다. 쌓일 대로 쌓인 울분을 땅에다 풀어냈다.

    콰아아앙!

    해머에 담겨있던 마나가 방출되면서 지축을 울렸다. 동시에 엄청난 폭발이 일어나며 땅이 움푹 패였다.

    귀를 때리는 굉음과 땅을 경악시키는 진동에 검사들은 잠시 시선을 빼앗겼다.

    “거기― 무슨 일이야?”

    “무슨 일이긴. 오크 놈이 오크 짓 한 거지. 신경 끄고 할 일 하자고.”

    “야, 그쪽 빈다! 피해.”

    “사, 사, 사, 살려줘어어어!”

    검사들을 상대하던 두 돌연변이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알파와 감마는 검사들로 이루어진 숲속을 헤치며 지옥을 선사했다.

    “유피테르! 뭐 하고 있어. 빨리 그걸 해치우고 검사들을 도와주란 말이야.”

    세이라 공주는 유피테르를 독촉했다.

    유피테르가 돌연변이와 장난을 치고 있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으니까.

    대치 끝에 마족도 물리쳤는데, 고작 오크 상대로 쩔쩔매는 걸 이해할 수 없었다. 적들이 돌연변이라는 건 까마득히 잊어버렸다.

    그런 것보다는 주변에서 초주검으로 변해가는 검사들이 더 걱정이었다.

    “보채지 마.”

    “지금 상황이 어떤데. 네가 이러는 동안에도 검사들이 죽어 나가고 있다고!”

    “나도 알아.”

    “정말로 아는 거 맞아? 검사들을 네 가족이라고 생각해보란 말이야!”

    세이라 공주는 말을 끝마치지 못하고 쓰러졌다. 보다 못한 유피테르가 마법을 사용했기 때문이었다.

    유피테르는 재빨리 뛰어가 그녀의 몸을 받았다. 잠든 걸 확인하고는 오흐트를 불렀다.

    오흐트는 멀리서도 그 신호를 알아채고서 쪼르르 달려왔다.

    “무슨 일이야 마스터? 언니? 저 돌연변이가 무슨 짓을 하기라도 한 거야?”

    “잠깐 재운 거니까 그렇게 흥분하지 마.”

    유피테르는 뛰쳐나가려는 오흐트를 만류하고 세이라 공주를 부탁했다.

    돌연변이의 등장으로 어지러워진 전장은 그 누구도 통제할 수 없었다. 차라리 오흐트의 옆에서 잠들어 있는 게 여러모로 이득이었다.

    베타는 빈틈을 놓치지 않았다.

    키가 작은 오흐트에게 세이라 공주를 넘겨주려면 등을 보여야만 했다.

    유피테르에게는 그저 무방비한 상황이었지만, 베타에게는 두 번 다시 올지 모르는 최고의 기회였다.

    “꺄하하하하하하. 적 앞에서 등을 보이다니!”

    베타의 해머가 유피테르의 등을 반으로 쪼개려고 하는 바로 그 순간.

    ‘걸렸군.’

    유피테르는 가장 자신 있는 마법을 펼쳤다.

    유피테르 식 얼음 마법 ― 니플헤임

    혹시라도 베타가 눈치챌지 몰라 아무런 전조를 보여주지 않았다.

    오크이긴 해도 마족의 손으로 만들어진 돌연변이는 차원이 다른 존재였으므로.

    유피테르는 미세한 가능성도 허용하지 않았다.

    마족을 상대할 때에는 실낱같은 희망조차 남겨주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뭐, 야?”

    그 말만을 남겨두고서 베타는 그대로 얼음 기둥에 갇혀버렸다. 그렇게 자랑하던 해머 아티팩트와 함께.

    유피테르는 기둥 가까이 가서 상태를 확인했다.

    베타의 마나는 고요했고, 얼음은 단단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별다른 문제가 보이지 않았다.

    베타를 확보한 유피테르는 정보를 담당하는 트리아를 불렀다.

    “트리아.”

    “예. 신이시여.”

    패스를 사용한 것도 아닌데 트리아는 곧바로 나타났다.

    그녀는 아무런 궁금증도 보이지 않고 유피테르의 말을 따랐다. 그대로 들고 사라졌다.

    “마스터. 이제 어쩔 거야? 언니를 깨울까?”

    “아니, 일단 나머지 돌연변이부터 처리하도록 하지. 어차피 정보를 가져오려면 시간이 걸릴 테니.”

    * * *

    패기 있게 돌연변이와 싸우던 검사들의 수는 이미 반절이 되어 있었다.

    시에라 제국에서 명성을 쌓은 검사들이라고 해도 무리였다.

    마족이 심혈을 기울여 완성한 돌연변이들은 아티팩트까지 장비하고 있었으니까.

    “젠장. 저 자식에게 다가가기만 하면 몸이 무거워지잖아.”

    “저게 그 말로만 듣던 아티팩트인가? 이럴 줄 알았으면 드워프의 무기를 그냥 받았지!”

    세이라 공주의 부탁으로 이곳에 온 드워프들은 무기도 한가득 지고 왔다.

    그러나 검사들은 그 무기를 거부했다.

    죽을지도 모르는 전투를 앞두고 익숙하지 않은 검을 쥐는 건 사양이었다.

    그게 태산도 가른다고 소문이 난 드워프 제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검의 무게가 미세하게 변해도 검식이 묘한 방향으로 흘렀다. 낯선 검으로는 제 실력을 발휘할 수 있을지조차 의문이었다.

    “두 마리.”

    알파는 두 검사의 목을 그대로 베어냈다. 검사들은 가지고 있는 최고의 검술로 방어했으나 압도적인 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동료의 죽음에 분개하며 다른 검사 한 명이 알파에게 도전했다.

    “이, 이 자식이. 고작 오크 주제에!”

    하지만 알파의 도끼는 매서웠다. 이번에도 검과 함께 검사를 양단해버렸다.

    손쉽게 인간들을 베어넘기던 알파는 감마에게 물었다.

    “얼마나 남았나.”

    “네가 뭔데 나한테 명령이지? 넌 주인님이 아니다.”

    “내가 알파(α)다.”

    최초의 이름을 부여받은 알파는 그 이름의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당당한 모습에 감마는 이를 갈며 대답했다.

    “30분 내에 이것들을 모두 정리할 수 있어.”

    “알았다.”

    알파와 감마가 다시 인간 사냥에 나서려고 할 때,

    “설마 이것들에 나도 포함되어 있는 건 아니지?”

    유피테르가 나타났다.

    육체 강화법을 사용해 공중을 날 듯이 달려온 그를 본 검사들은 술렁거렸다.

    “마법사다!”

    “마법사가 우리를 구하러 온 겨? 저쪽에 간 그놈은 어쩌고?”

    “죽었어!”

    “정말로? 정말로 죽은 겨?”

    베타가 사라진 걸 확인한 검사들의 눈동자에 희망이 차올랐다.

    마법사를 미워하는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생명의 은인이 될지도 모르는 사람을 무턱대고 배척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유피테르의 싸움에 휘말리지 않도록 거리를 벌렸다. 마법사에게 등을 맡긴다는 건 부끄러운 일이었지만, 지금은 상황이 특별했다.

    “넌, 누구지?”

    “인간? 이 마나는… 마법사인가.”

    알파와 감마는 긴장했다.

    유피테르에게서 나오는 묘한 기운은 결코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지금껏 상대했던 인간들과는 시작 지점부터 달랐다.

    돌연변이들은 유피테르의 양쪽에서 파고들었다. 딱히 말 따윈 필요 없었다. 몬스터의 본능이 그렇게 하라고 속삭였으니까.

    “미안하지만, 너희는 필요가 없어.”

    유피테르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마법을 전개했다.

    베타라는 정보원을 얻은 상황이었기에 검사들을 살려달라는 공주의 부탁을 들어줄 수 있었다.

    유피테르 식 얼음 마법 – 얼음 구슬

    촤아아악!

    사방에 퍼진 푸른색 마나는 자그마한 구슬로 변했다. 자그마한 구슬은 사정없이 돌연변이를 때렸다.

    퍼스트 서클 마법이었으나, 유피테르의 마법은 왠지 피할 수가 없었다.

    “크, 헉.”

    “마, 말도 안 돼. 이런 건 주인님께서도…”

    돌연변이들은 구슬을 부수려 무기를 휘둘렀으나 헛된 행동이었다.

    녹색의 근육질의 몸 곳곳에 구슬이 박혔다. 구슬들은 냉기를 내뿜으며 속에서부터 잠식해갔다.

    고통에 몸부림치던 돌연변이는 어느새인가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

    강력한 돌연변이치고는 허망한 최후였다.

    칼리스토에게 잡혀간 베타는 이곳에서 죽은 알파와 감마를 부러워했겠지만 말이다.

    “끄, 끝난거요?”

    “맞아요. 우리들이 이긴 겁니다.”

    유피테르가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이자 시에라의 검사들이 조심스레 다가왔다.

    “이게, 그놈들이라니….”

    얼음 동상이 된 돌연변이들을 본 검사들은 착잡한 마음을 숨기지 못했다.

    제대로 버티지조차 못하던 악랄한 적을 이 마법사는 한 번에 제압해버렸으니까. 실력 차이를 직접 확인하니 입이 씁쓸했다.

    게다가 사방에 널부러진 동료들의 시체를 보고 있자니 가슴이 메어졌다.

    그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한 검사가 검을 들고 얼음 동상을 내리쳤다.

    “오크 자식, 꼴 좋다!”

    그 행동이 다른 검사들의 마음에 불을 붙였다.

    “찰시의 원수!”

    “고작 오크 주제에 꼴 좋다!”

    오크의 초록색 피로 흥건한 검이 제대로 들 리 없었다. 하지만, 유피테르가 먼저 손을 써놨기에 검사들은 동료들의 원수를 갚을 수 있었다.

    남문에 모인 검사들을 절반 이상 잃고서야 얻어낸 승리.

    그게 류이스크 공방 1차전의 결과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