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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도 포기한 대공자-206화 (206/265)
  • 오크의 침공(11)

    * * *

    상황은 제멋대로 흘러갔다.

    유피테르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세이라 공주는 검사들을 이끌고 성문 밖으로 나갔다.

    검사들이 근질거리던 몸을 풀 기회를 마다할 리 없었다.

    “마스터.”

    “음?”

    “언니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러는지 알겠어? 조금 더 지키다가 나가도 되지 않아?”

    오흐트가 머리를 쓰는 걸 싫어하는 건 맞았다. 그래도 이 상황은 무언가 이상했다.

    최선이 아닌 최악을 선택했으니까.

    “내가 만들어 준 함정들을 믿고 있는 거 아닐까?”

    “에이 설마….”

    “검사들은 마법사랑 다른 뇌를 지닌 것 같아서 나도 뭐라 확답할 수가 없어. 그저 개죽음당하지 않기를 빌자고.”

    유피테르와 오흐트는 세이라 공주 일행을 뒤따랐다.

    공주는 이 성을 지킬 최소한의 인원조차 남겨놓지 않았다. 배수의 진을 친 상황이라면 전면전에서 지지 않도록 도와주는 게 나았다.

    그러기 위해서는 본대 옆에 찰싹 붙어있어야만 했다.

    세이라 공주의 행동에 놀란 건 유피테르 일행뿐만이 아니었다.

    “인간들이 성을 포기하고 나온다고 그게 정말이냐?”

    “취익―.”

    “네 눈으로 봤다고 그게 꼭 사실이지는 않단 말이다.”

    “취익―!”

    정찰 오크의 말에 지라르는 황당함을 감추지 못하고 되물었다.

    ‘이놈들이 미쳤나?’

    인간들이 오크의 군세를 막을 방법은 오직 수성전뿐이었다.

    오크의 수가 압도적이라고 해도 보급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상태였으니까.

    최대한 시간을 끌면서 대륙에 관심을 호소하면 조금씩 이길 확률이 올라갈 게 눈에 선했다.

    유리한 고지에서 내려와 정면으로 맞붙으려고 하는 걸 이해할 수 없었다.

    지라르는 정찰 오크를 돌려보낸 후, 허공을 보며 중얼거렸다. 갑자기 묘한 차림새를 한 오크가 나타나 질문에 대답했다.

    “다른 문의 상황은?”

    “마법사가 있는 쪽 문을 제외하면 순조롭게 공략 중입니다.”

    “마법사라고?”

    “조디악의 마법사 중 하나가 참전했다고 합니다.”

    “하, 조디악이라….”

    조디악이라는 말을 듣자 지라르의 마음이 급해졌다.

    오크 사회에서도 조디악은 두려운 존재였다. 절대로 부딪치지 말라고 소문이 자자했다.

    지라르는 어쩔 수 없이 플랜 A를 버렸다.

    승리를 위해서라면 어떤 일도 할 수 있었다. 오크의 자긍심 따위 태워버린 지 오래였다.

    “그분께 이 상황을 전해드려.”

    “….”

    돌연변이 오크는 대답조차 하지 않고 사라졌다.

    지라르는 고개를 돌려 아군의 상황을 확인했다.

    인간들의 공격은 깜짝 놀랄 수준이었으나, 아직도 그에게는 많은 부하들이 남아 있었다.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게 하는 건 쉬웠다. 자존심을 조금만 건들이면 그만이었다.

    지라르는 오크 나이트에게 명령해 전 오크들을 소집했다.

    오크들은 동료들의 시체를 뒤로하고 도열했다. 각자 다른 모양의 몽둥이를 들고서 지라르의 말을 기다리는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너희들이 인간들에게 겁을 먹었기에 동료들이 죽었다!”

    “우우, 취익―!”

    “취익―!”

    명백한 도발에 오크들이 반발했다. 겁에 질려 싸우지 못하는 건 치욕이었으니까.

    물론, 대놓고 지라르에게 뭐라 하지는 못했다. 세뇌에 가까운 교육의 힘이었다.

    “하지만.”

    지라르는 그걸 거들떠보지 않고 이야기를 이어갔다.

    “우리는 오크다. 동료들의 피는 적의 피로 갚아주면 되는 것이다. 겁에 질릴 수는 있다. 그러나 그걸 극복하면 되는 거다. 나는 너희들을 믿는다.”

    “가자, 취익―!”

    “인간, 취익―! 죽여, 취익―! 버리자, 취익―!”

    지라르의 일장 연설에 오크들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몽둥이를 흔들며 격렬하게 환호했다.

    지라르는 오크들을 보며 음흉하게 웃었다.

    모든 게 계획대로였다.

    “인간들이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나아가자! 자랑스러운 오크의 군세여! 긍지는 자신의 손으로 되찾는 거다!”

    지라르는 쐐기를 박으며 진군을 허락했다.

    신바람이 난 오크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전부 앞으로 달려갔다. 메뚜기떼처럼 모든 걸 삼켜버릴 기세였다.

    지라르는 백마에 탄 뒤, 앙 옆에 호위를 두고서 유유히 쫓아갔다.

    * * *

    “오크들이 다시 다가옵니다!”

    한 검사가 몰려오는 오크들을 보며 소리쳤다. 묘하게 흥분된 목소리가 귀를 간질였다.

    성문 밖으로 나온 뒤 세이라 공주의 가슴은 쉴 새 없이 두근거렸다.

    지금이라도 성안으로 돌아가야 하지 않을까?

    여기서 이렇게 싸우는 게 옳은 판단일까?

    믿고 따라주는 검사들의 목숨을 버리게 하는 거 아닐까?

    생각들이 꼬이고 꼬여 머릿속이 복잡했다.

    국경 수비대에 있을 때와는 생명의 무게가 달랐다. 만약, 남문이 뚫리기라도 하면 다음은 죄 없는 제국민들의 차례였으니까.

    후우.

    세이라 공주는 작게 한숨을 쉬고는 허리춤에 찬 검에 손을 올려놓았다.

    묵직하고 서늘한 감각이 손끝을 통해 그대로 느껴졌다.

    ‘황제에게만 허락된 이 검을 가지게 될 날이 올 줄이야. 예전의 나였다면 상상도 못 했겠지? 그런 농담은 하나도 웃기지 않는다고 할지도 몰라.’

    이 검은 원래 황제만이 소유할 수 있었다. 그러나 유일한 후계자의 말에 반발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귀족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시무르크조차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잘 들어라, 내 딸 세이라야. 시에라 제국은 원래 기사들의 제국이었단다. 그러니 제국민들을 늘 우선시 해야 한다는 걸 잊지 말거라.

    고작 검을 만진 것뿐인데 황제의 목소리가 저절로 떠올랐다.

    인자하면서도 힘 있는 목소리에 그리움이 사무쳤으나, 눈물을 보일 수야 없었다.

    잠시 후면 이곳은 피 튀기는 전장이 될 테니까.

    ‘아버님. 저를 지켜봐 주세요.’

    추억에 잠기는 것도 잠시, 세이라 공주는 검을 위로 들며 소리쳤다.

    “검사들이여 오크들이 다가오고 있다. 몬스터 놈들에게 검의 길이 무엇인지 똑똑히 보여주자!”

    검사들은 말 대신 검으로 대답했다. 잘 관리한 애병(愛兵)을 손에 쥐고서 다가올 전투에 숨을 죽였다.

    오크들은 인간들이 보이는 데도 멈추지 않았다.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각 진영이 충돌했다.

    “진짜 사람 귀찮게 하네. 그만 죽으라고 이 돼지머리 자식아!”

    “취익―.”

    “어쭈. 오크 주제에 뭔가 해보려는 거야?”

    “취익―.”

    류이스크에 모인 검사들이 모두 정예였기 때문일까?

    수의 압박을 받는 상황에서도 검사들은 훨훨 날아다녔다. 물 만난 물고기들처럼 여기저기를 누볐다.

    무기를 휘두르는 것밖에 못 하는 오크들은 간격을 메꾸지 못했다. 검사들의 검술에 그저 목숨을 빼앗길 뿐이었다.

    애초에 검사들과 평범한 오크들의 실력은 천지 차이였다.

    “봐봐, 생각보다 별거 아니라고. 앞으로 수천 번만 더 검식을 사용하면 우리가 이긴다!”

    “검 식 하나에 몇 년을 연습하는데 이 정도야 쉽지.”

    오크들이 상대가 되지를 못하자 검사들의 사기가 더욱 올라갔다.

    “마법사가 한 건 해줬는데, 우리는 더 해줘야 하지 않겠어. 안 그래?”

    유피테르가 얼음 마법으로 전장을 지배했던 것 역시 검사들의 마음을 불태웠다.

    마법사에게만큼은 지고 싶지 않았다.

    저 뒤에서 지켜보고 있는 유피테르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이게 바로 검사들의 진면목이라고.

    “생각보다 검사들이 세네?”

    오흐트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오크들에게 밀리면 바로 광역 치유를 사용하려고 했지만, 아직 그럴 필요는 없어 보였다.

    “대륙 전쟁 이전에는 검사들 역시 마법사들처럼 존경받았었던 거 알잖아?”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 정도야 알지.”

    “과거의 유산을 계승하려는 자들의 의지는 생각보다 대단하군.”

    “이 정도로 차이가 날 줄은 몰랐어. 보조 마법을 걸지 않아도 되겠는걸?”

    유피테르와 오흐트가 말하는 사이에도 오크들의 선봉대는 처절하게 부서지고 있었다.

    차라리 일반 병사였다면 이렇게 밀리지 않았을 것이다.

    검사들이 제각기 다른 검술을 사용하는 게 문제였다.

    하나의 검술에 눈이 익숙해질 즈음이면 다른 검술이 날아오니 손이 따라가지를 못했다. 눈마저 어지러웠고, 발은 꼬였다.

    “하앗!”

    세이라 공주 역시 갈고닦은 실력을 뽐냈다.

    황실의 스승이 가르쳐 준 쾌검을 적절하게 펼쳐내며 오크들의 목을 베었다.

    뒤편에 있었기에 그녀는 상처를 입고 흘러나온 오크들만 상대했다. 앞서서 날뛰는 검사들 덕에 그녀도 손맛을 느낄 수 있었다.

    “취익―.”

    “나도 안다고 이 새X들아! 호들갑 떨지 말고 가서 싸워.”

    지라르는 보고를 하러 온 오크에게 검을 집어던졌다. 불쌍한 오크는 검을 맞고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그걸 본 오크들은 지라르에게 감히 다가가지 못했다.

    인간들과 싸우다 죽었으면 명예라도 있지, 이건 그냥 개죽음이었다.

    주변에 있는 오크들의 머리를 박살 낼 것만 같은 지라르를 멈춘 건 돌연변이 오크였다.

    “지라르 님.”

    “뭐냐.”

    “그분의 답장을 가져왔습니다.”

    그분.

    그 단어를 듣자마자 지라르의 얼굴에서 분노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전언을 말해.”

    “이마저도 계획대로, 라고 하셨습니다.”

    “그으래?”

    지라르의 표정이 묘해졌다. 지금까지 그분의 계획은 틀린 적이 없었다.

    오크 세계에서 무시당하던 그를 구해준 게 시작이었다. 그 이후로도 그분이 도와주면 1%의 가능성도 100%로 변해왔다.

    “너희 메이지들도 나서라. 기세를 내줘서는 안 된다. 강력한 화력으로 인간들을 굴복시키란 말이야!”

    “알겠, 취익―. 습니다, 취익―.”

    콰아아아앙!

    오크 메이지들은 지체 없이 전투에 참여했다. 그들은 합류하자마자 파괴력 높은 마법들을 쏘았다.

    “너무 치사한 거 아냐?”

    “넌 몬스터에게 정정당당한 걸 바라냐. 그러고도 검사 나부랭이야?”

    “아니, 그래도 뭔가 오크들에게는 그런 이미지가 있잖아. 일대일 대결을 피하지 않는? 그런 거 말야.”

    “지금 잡담이 나오냐. 피해, 마법이 날아온다!”

    검사들은 발만 동동 굴렀다.

    멀찍이 떨어진 것도 짜증이 나는데 그 앞을 평범한 오크들이 목숨을 걸고 사수했다. 검사들이 날고 기어도 거리를 둔 싸움에는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서서히 기세가 오크 쪽으로 넘어가고, 전선 역시 점점 성문 쪽으로 밀려났다.

    “마스터 이쯤이면….”

    “안 그래도 생각 중이었어. 걱정하지 마. 네 언니를 죽게 하진 않을 테니.”

    유피테르는 오흐트의 걱정을 한 방에 잠재웠다.

    함정을 사용하지 않은 이유는 간단했다. 전선이 너무나도 앞에 있어서 마법을 발동하면 검사들만 타격을 입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전선이 조금씩 뒤로 밀렸기에 상황이 변했다.

    우우웅!

    유피테르는 눈을 감고 주변에 마나를 흩뿌렸다. 갑자기 마법사가 나서자 검사들은 긴장했다.

    “뭐, 뭐야?”

    “마법사가 뭘 하려나 본데?”

    “설마 저 오크 놈들처럼 우리를 한 번에 보내버리는 건 아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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