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크의 침공(10)
* * *
지라르가 정도(正道)를 벗어난 전술을 사용해도 세이라 공주는 여전히 침착했다.
고작 이 정도로 놀라기에는 최근에 너무 많은 일을 겪었기 때문이었다.
“뭣들하고 있나? 두려워하지 말고 특제 발리스타를 준비해!”
세이라 공주는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검사들을 격려했다. 국경 수비대에서의 경험이 빛을 발한 순간이었다.
“그래. 많아봤자 오크일 뿐이지.”
“언제부터 죽는 걸 무서워했냐? 여기라면 우리가 죽기에 충분한 곳이잖아.”
류이스크로 모인 검사들 중 겁쟁이는 한 명도 없었다. 애초에 이곳은 사지(死地)였기 때문이었다.
오크 대군과 믿을 수 없는 마법에 잠시 악몽에 삼켜졌을 뿐이었다.
세이라의 말을 들은 검사들은 스스로 알을 깨고 바깥으로 나왔다.
“공주님 말씀대로 특제 발리스타나 쏴버려! 드워프의 실력을 한 번 보자구.”
“오늘 저녁은 오크 구이로 배 터지게 먹자고!”
상대적으로 약한 검사들은 미리 약속한 대로 움직였다.
그들은 배운 대로 발리스타에 달라붙었다. 드워프가 직접 마개조한 특제품이었기에 한두 명으로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적어도 세 명 이상은 달라붙어야 조금이나마 움직일 기미를 보였다.
끼이익!
발리스타가 육중한 소리를 내며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여전히 오크를 노릴 수 있는 방향에 도달하지 못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검사들은 서로 농담을 하며 힘을 모았다.
“고작 포 주제에 더럽게 무겁네! X발.”
“그렇게 작은 검을 들고 다니니까 그런 거 아냐.”
“죽을래?”
“결혼하기 전까지는 못 죽는다고 했던 것 같은데. 설마, 기억 못 해?”
“설마, 너 아직도 결혼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니 소꿉친구인가 걔가 널 버린 순간….”
“닥쳐!”
분노는 곧 거대한 힘의 파도로 변했다.
오크들은 금세 발리스타에 사선에 놓였다. 검사들은 망설이지 않았다.
세이라 공주가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그대로 발리스타를 가동했다.
퍼어어어엉!
사람 2명이 합쳐진 것보다 거대한 화살이 파공성을 내며 오크들에게로 날아갔다.
평범한 발리스타와 비교하는 게 미안해질 정도의 위력에 검사들은 뿌듯한 표정으로 감탄했다.
“욕먹으면서 배울 만 하구만 이거!”
“가라아아아앗!”
하지만, 지나친 기대는 금물이었다.
“얼어붙은 놈들의 뒤로 숨어라! 굳이 막으려고 하지 마!”
지라르는 만만치 않은 오크였다.
발리스타를 사용하려는 걸 보자마자 알기 쉬운 명령을 내렸다.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기에 오크들은 곧바로 그 말에 따랐다.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죽은 동료들의 뒤로 피했다.
그건 탁월한 선택이었다.
거대한 발리스타의 화살은 얼어붙은 오크의 몸에 닿자마자 힘을 잃었다.
남아 있던 냉기가 발리스타마저 얼어붙게 만든 것이었다.
“뭐, 뭐야. 이 자식들?”
“이걸 예상하고 뒤로 숨은 건가?”
“에이, 설마. 전술을 사용할 줄 안다면 몬스터가 대륙을 지배했겠지. 안 그래?”
지형지물을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지휘에 검사들은 놀라서 자빠질 뻔했다.
그러나 그들은 포기를 모르는 자들이었다. 마법의 길이 아닌 검의 길이라는 난관을 택한 자들이었으니까.
“한 번 더 갈겨!”
“그쪽이 아니라! 이쪽, 그래 거기야!”
“맞아라!”
발리스타를 다루는 데 익숙해진 검사들은 공격의 고삐를 멈추지 않았다. 쉬지 않고 발리스타를 장전하고 쐈다.
설령, 맞지 않아도 괜찮았다.
어차피 이것만으로 오크를 상대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은 처음부터 하지 않았으니.
퍼엉! 퍼엉! 퍼엉!
“쯧쯧. 한심한 인간들이로군.”
거대한 화살들이 날아와도 지라르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오히려 실패한 방법을 계속 사용하는 인간들을 비웃었다.
저런 식으로 화살을 낭비하면 불리한 건 오크가 아니라 인간들이었다.
검사들은 원거리에서 공격할 방법이 마법사에 비해 적었기에.
“드워프의 영광도 과거의 것이지. 이제는 새로운 시대가… 응?”
아까처럼 화살이 얼어붙을 걸 기대하며 회심의 미소를 짓던 지라르.
그러나 승리의 여신은 이번에는 오크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
콰아앙!
맹렬한 기세로 날아오던 화살이 난데없이 폭발했다.
검사들이 발사한 모든 화살이 연쇄적으로 터져버리자 어마어마한 화력을 자아냈다.
유피테르가 만든 얼음 정원도 무사하지는 못했다.
얼음 마법이 휘몰아쳤던 곳은 산산이 조각나 파편이 곳곳에 휘날렸다.
그야말로 모든 것들이 오크를 노렸다.
“도망, 취익―.”
“취익―.”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지자 오크들은 아연실색하며 뿔뿔이 흩어졌다.
하지만, 판단이 너무 늦었다.
일부는 폭발에 휘말려 형체도 남지 않았다. 그나마 도망쳤던 오크들은 얼음 파편에 맞아 그대로 이승을 떠났다.
“이이이익! 너희들이 그러고도 자랑스러운 지라르 님의 군대냐!”
순식간에 상황이 역전되자 지라르는 길길이 날뛰었다. 하지만, 이 모든 일은 그의 잘못이었다.
지라르는 본능으로만 움직이는 몬스터들에게 규율과 전술을 입혔다.
자신의 군대라는 증거를 어떻게든 남기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여러 부족을 통합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 결과 오크들은 위기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저 지라르의 명령대로만 움직이는 충실한 인형에 불과했기 때문에.
“드워프제 발리스타가 폭발한다는 거 알았어?”
성 위에서 터지는 화살을 감상하며 유피테르가 물었다.
“할아버지에게 듣긴 했어. 그래도 이렇게 화끈할 줄은 몰랐지.”
“나쁘지 않은 시작이네.”
“확실히. 우린 피해 본 게 하나도 없으니까. 국경 수비할 때보다 훨씬 좋은 상황이야.”
“이제 어떻게 할 거지? 발리스타의 화살은 무한하지 않잖아.”
“보고만 있어. 아, 그리고 전에 부탁했던 건 끝내놨지?”
“물론이지.”
유피테르가 고개를 끄덕이자, 세이라 공주는 빙긋 웃으며 검사들에게로 다가갔다.
“검사들이여. 이제 좀 몸은 풀렸나?”
“예에엡!”
“아직 뻐근한뎁쇼. 제 근육은 고작 화살로는 만족하지 못하는뎁쇼.”
긴장감은 풀렸고, 분위기는 달아올랐다. 다른 누구도 아닌 검사들이 그 사실을 체감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아쉬운 부분이 딱 하나 존재했다.
검사들의 집단인데도 검 한 번 마음대로 휘둘러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세이라 공주가 그 마음을 모를 리 없었다.
“너희들 검을 휘두르고 싶냐!”
“그걸 말이라고 합니까!”
“제 검이 울고 있슴다. 공주님 명령만 내려주십쇼!”
“저희는 궁수가 아니라 검사인뎁쇼. 설마, 공주님은 검사가 아니신 거….”
타오르는 분위기에 선을 넘는 자가 나타났다.
늘 한 발 뒤에서 황녀를 보필하는 그림자들은 당연히 그걸 용납하지 않았다.
“죽고 싶나?”
“아, 아뇨호. 딸꾹.”
갑자기 나타난 황실의 그림자는 검사의 목에 잘 벼린 단검을 갖다 댔다.
소름 끼치는 살기에 검사는 딸꾹질을 멈추지 못했다.
평소 들리던 소문이 대단하긴 했지만, 마음속 한구석에서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검사라면 직접 검을 대보지 않고는 믿지 않으니까.
하지만, 직접 대보니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자들이었다.
“그만해.”
“하지만 공주님. 이 자는 공주님께 무례했습니다. 유일한 황실의 후예이자….”
“주위를 보라고. 애써 만든 분위기를 망칠 생각이야?”
세이라 공주의 말에 그림자는 주변을 슬쩍 둘러보았다.
방금 전까지 환호하던 검사들의 표정이 썩어 문드러져 있었다. 그걸 확인한 그림자는 황급히 무릎을 꿇었다.
“죄송합니다. 공주님. 제가 주제넘게 나선 것 같습니다.”
“알면 되었어. 원래 임무로 복귀해.”
“충성.”
그림자가 다시 모습을 감춘 후, 세이라 공주는 무거워진 공기를 환기했다.
“저길 봐라!”
세이라 공주가 손가락으로 오크들을 가리키자 모든 검사들의 시선이 그쪽으로 옮겨갔다.
검사들의 눈에 오크들의 모습이 들어왔다.
기세등등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피해를 수습하는 데 열중하고 있었다.
사냥감을 보자 검사들의 입꼬리가 서서히 올라갔다.
“여전히 오크들은 저렇게나 많다. 이곳을 지키기 위해 모인 너희들보다 말이다. 그래도 직접 싸우고 싶나?”
“예에에에에엡!”
검을 사용할 기회.
그 말을 듣자마자 검사들은 모두 고개를 돌려 세이라 공주를 보았다.
사냥감을 노리는 듯한 매서운 눈빛이 쏟아져도 세이라 공주는 웃었다.
‘그래. 그거야말로 검사의 눈빛이야.’
세이라 공주의 기억 속에서 검사들은 모두 저런 눈빛을 하고 있었다. 설령, 승산이 없는 싸움에 투입되어도 그들은 검술을 쓰는 걸 즐길 뿐이었다.
“저들의 비밀 병기가 뭔지 모르는 상황인데도 나가서 싸우고 싶으냐?”
세이라 공주의 말에 검사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게 문젭니까 공주님!”
“당장이라도 가서 저 오크 대장의 목을 따올 테니까 기다리십쇼.”
“이 포션이 식기 전에 갔다오겠슴다.”
“야. 포션을 원래 차가운 거 몰라.”
“대충 넘어가. 아, 공주님 앞에서 쪽팔리게.”
* * *
유피테르는 세이라 공주가 어떤 식으로 이들을 이끌지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어차피 이번 싸움의 주역은 그가 아니었으니까.
‘무엇도 두려워 하지 않는 자들. 이게 검사인가.’
흥미로웠다.
수적 열세에도 굳이 나가서 싸우겠다는 말을 하는 게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검사들을 처음 만난 건 아니었으나,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건 처음이었다.
마법사에게 있어 전투란 시작하기 전에 이미 끝나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싸움에서 이기는 그림이 그려지지 않으면 굳이 나서지 않았다.
그 순간 유피테르의 마나 감지에 묘한 기운이 잡혔다.
‘음…?’
시선을 잡아끄는 싸늘한 감각에 유피테르의 표정이 찌푸려졌다.
한창 분위기가 달아오르는 상황에 표정이 어두워지자 오흐트가 유피테르의 손을 잡아끌었다.
“무슨 일이지?”
“그건 내가 할 말이야 마스터. 왜 그런 표정을 짓고 있어.”
“방금 한 마나를 봤거든.”
“뭔데 그래. 마족이라도 본 거야? 그럼 잘 된 거잖아. 어차피 우린 마족을 사냥하러 온 거니까.”
오흐트의 말에 유피테르는 고개를 저었다.
“카르멘 아르테미스. 아니 카르멘 비제의 기운이 오크의 뒤쪽에서 느껴졌다.”
“그 빌어먹을 놈은 대체 왜 여기서 나타난데?”
“만일의 사태가 발생할 수도 있으니. 다른 칼리스토들에게도 연락을 해놔.”
“알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