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도 포기한 대공자-204화 (204/265)

오크의 침공(9)

* * *

시에라 제국이 공주의 이름 아래 하나가 되어 가고 있을 무렵.

국경을 뚫은 오크의 대군은 다음 목적지인 류이스크로 향하고 있었다.

지척을 뒤덮은 초록빛은 웬일인지 음울한 기운을 발할 뿐, 빛을 잃은 상태였다.

“더 속도를 내는 법은 없나? 나, 지라르의 군대가 이것밖에 되지 않을 리 없다! 저 앞이다. 조금만 더 가면 인간들이 있단 말이다. 너희는 한 방 먹은 게 화가 나지도 않는 거냐!”

멋들어진 흰색 말을 탄 지라르.

그는 연신 소리를 지르며 오크들을 마음을 자극했다.

‘이걸로는 부족하다.’

고작 한 번이었다.

무패를 자랑하던 자신의 군대가 패배의 쓴잔을 삼킨 건.

비범한 느낌의 마법사에게 한 방 크게 얻어맞은 건 분명 사실이었다.

그러나 고작 그뿐이었다.

오크의 군세는 여전했다. 인간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많은 수를 자랑했다.

게다가 비장의 수단은 아직 꺼내 보지도 않았다.

싸움을 피하는 오크는 오크가 아니다.

이 말은 어린 시절부터 지겨울 정도로 들었다.

남들보다 연약한 몸 때문에 조금은 쉬운 길을 찾으려고 했었지만, 늘 혼이 났다.

‘네놈들이 그렇게 울부짖던 오크의 정신이란 걸 보여보란 말이다!’

축 처져서 터덜터덜 걷고 있는 모습을 보니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열불이 났다.

지금껏 당한 건 뭐란 말인가?

지라르는 화를 참지 않았다. 그 대신 분노를 그대로 말에 담아 널리 퍼트렸다.

“무엇에 그리 몸을 떠느냐! 무엇이 그렇게 무섭나! 적은 고작 인간일 뿐이다. 마법을 쓰든 검을 쓰든 인간이라고! 언제부터 인간이 우리 오크들의 위에 있었나.”

백마가 굉음에 놀라 히히힝―거리며 몸을 흔들었으나, 지라르는 가볍게 제압했다.

‘그분’과 만나 다시 태어난 그에게 이 정도 일은 식은 포션 먹기였으니까.

지라르의 고함에 반응한 건 백마뿐만이 아니었다.

“맞다, 취익―.”

“인간, 취익―. 죽인다, 취익―.”

“우리는 취익―. 모든 걸, 취익―. 부순다, 취익―.”

지라르의 말에 오크들이 잡념을 떨쳐냈다.

무기를 든 손에는 힘이 들어갔고 눈은 앞만을 바라보았다. 느슨해졌던 군기도 되살아나 정확한 박자로 앞을 향해 나아갔다.

무패의 오크 군단이 살아난 걸 보며 지라르는 고삐를 더 짧게 쥐었다.

* * *

드워프가 가세해 한층 더 강력해진 류이스크.

각 세력은 서로 나뉘어 4개의 진입로를 원하는 대로 수호하고 있었다.

이 방법은 세이라 공주가 직접 제안한 거였다.

“솔직히 말하지. 내가 이곳에 있는 모든 이들의 특기를 살리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그렇지 않나?”

“그 말씀은…?”

“원하는 대로 헤쳐 모여라. 동, 서, 남, 북 방향으로. 우리가 남쪽을 맡겠다.”

“황녀님이 뭘 아시는구만. 좋소, 우리 용병대가 동쪽을 맡도록 하지.”

“흠…. 그럼 내가 서쪽을 맡지. 마법사가 이끌긴 하지만, 원하는 자는 오라. 난 이 두 주먹으로 세상을 평정할 자, 하토르다.”

“그렇다면 북쪽은 우리 귀족들이 가겠다.”

세이라 공주의 말에 각 세력은 빠르게 모이고 흩어졌다.

이건 세력들의 불만을 없앰과 동시에 황실의 권위를 제대로 세워주는 절묘한 한 수였다.

그러나 세이라 공주의 예상을 뛰어넘은 부분이 딱 하나 존재했다. 의외로 많은 검사들이 하토르를 따라 서문으로 향했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한 명은 고개를 갸웃했다.

“마스터 이게 맞아? 언니는 시에라 제국의 마지막 핏줄이잖아. 여긴 전선 그 자체….”

바로 오흐트였다.

“쉿. 오흐트. 그 정도는 나도 알고 있단다.”

오흐트는 유피테르에게 질문했으나, 대답을 해준 건 세이라 공주였다.

그녀는 오흐트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어주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남쪽을 맡겠다고 먼저 이야기한 거야.”

“응?”

“오크들이 제일 먼저 들이닥칠 방향은 어디지?”

“그야 당연히 북쪽….”

이쯤 되면 알아챌 만도 했으나, 오흐트는 여전히 머리 쓰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그걸 알고 있던 유피테르가 간단하게 정리해주었다.

“오크들이 별동대를 꾸린다고 해도 동쪽과 서쪽에 먼저 보낼 거다. 즉, 이 남쪽은 제일 지친 오크들을 만나게 된다는 거지.”

“그러면 이쪽이 제일 쉬운 거잖아? 귀족 자식들이 언니를 가만히 내버려 둘 리가 없을 텐데?”

“그래서 그렇게 말한 거란다. 남쪽을 맡겠다고. 황실의 대표인 내가 먼저 말하면 그 누구도 반발할 수 없으니까.”

“아! 그렇구나. 언니, 생각보다 계산적인 사람이었네.”

“황실의 사람들은 늘 이런 식이란다. 그렇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으니까.”

세이라 공주의 말대로 남쪽은 류이스크에서 가장 안전한 공간이었다.

드워프가 직접 성문을 강화해주었고 도시 곳곳에도 함정이 가득했으니 당연했다.

“그러면 우리가 할 일은 기다리는 것뿐이야?”

“꼭, 그런 것만도 아닌가 본데?”

“그게 무슨 뜻이야 마스터?”

유피테르는 대답 대신 먼 곳을 바라보았다.

“…?”

그 모습에 오흐트는 고개를 갸웃했다.

유피테르가 남들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의 마나 감지를 할 수 있다는 것 정도야 알았다.

하지만, 그녀의 감지에는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상대는 고작 오크였다.

마족이 뒤에 있다고 해도 초대 성녀의 마나 감지를 벗어나는 일은 꿈에서도 불가능했다.

하지만, 유피테르의 말은 곧 현실에 되어 나타났다.

“오, 오크들입니다!”

공주에 눈에 들기 위해 따라왔던 한 검사가 망원경을 떨어트리며 소리쳤다.

“그게 뭔 헛소리야! 여긴 남문이라고 다른 문이 벌써 뚫렸을 리가 없어!”

“비켜봐!”

옆에 있던 다른 검사들이 앞다퉈서 망원경을 손에 넣으려고 했다. 직접 눈으로 확인하기 전까지는 도저히 그 말을 믿을 수 없었으니까.

“그럼 그렇지. 오크가 벌써 이곳까지 올 리가….”

능숙하게 망원경을 뺏고서 전방을 확인한 한 검사.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만만했던 그의 말끝이 흐려졌다.

초록빛 근육을 자랑하는 오크들이 미친 듯이 달려오고 있었으니까.

오크가 일검에 쓰러트릴 수 있는 몬스터긴 했다.

그러나 저건 너무 많았다. 어림잡아도 족히 수천은 넘어 보였다. 심지어 오크가 맞는지 의심될 정도로 규율이 잡혀 있었다.

“정말로 수만이었던 거야?”

“네놈 공주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던 거냐!”

“어쩌라고! 수만의 오크라는 말을 정말로 믿은 사람이 있어? 저걸 봐. 저게 어딜 봐서 평범한 오크야?”

“확실히 시에라 제국의 군대도 저 정도로 군기가 들어있지는 않지.”

검을 휘두르고 싶어 안달이 났던 검사들이 흔들렸다.

한 검사의 말대로 수만의 오크가 돌격해온다는 말을 진심으로 믿은 자는 적었다.

만 단위의 군세는 대륙 전쟁 이후로 보기 드물었으니까.

“모두 진정해라.”

상황 파악을 끝낸 세이라 공주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지휘를 시작했다.

하지만, 혼란에 빠진 검사들에게 그 말이 닿을 리 없었다. 그러나 세이라 공주는 포기하지 않았다.

“부탁해 유피테르. 큰 거 한 방 먹여줄 수 있지?”

“공주님의 말씀대로.”

유피테르 식 얼음 마법 – 얼음 화살 & 얼음 창

유피테르는 기다렸다는 듯이 마법을 전개했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화살과 창이 남문 위에 펼쳐졌다. 푸른색의 오로라가 빛나고 있다고 착각할 정도였다.

“무, 무슨?”

“저게 마법사라고?”

“저런 식이라면 발도술보다도 빠르다고!”

마나를 모으는 시간조차 생략한 유피테르의 마법에 검사들이 입을 벌렸다.

공주의 곁에 있었기에 평범하지 않을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이건 상상 이상이었다.

“헹. 그래 봤자다. 저런 마법이 제대로 먹혀들 리가 있나?”

“음음. 마법사라는 존재들이 아무리 발버둥을 쳐봐도 시간의 한계는 넘을 수 없지.”

평소부터 마법사를 싫어하는 검사들은 유피테르의 마법을 보고 코웃음을 쳤다.

마법사에게 있어 마나를 모으는 시간은 필수였다.

마법과 마법사를 증오할 정도로 미워하더라도 그 정도야 알았다. 시에라 제국에서도 교류전은 유명했으니까.

하지만, 은발의 마법사는 절대로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다.

“위험, 취익―.”

“하다, 취익―.”

오크들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저 마법을 맞았다가는 이 세상과 영영 이별할지도 모른다고.

그래서 맞서 싸우기보다는 도망치는 것을 택했다.

‘예상대로네.’

이마저도 유피테르의 손바닥 안이었다.

아르테미스 가문의 다른 마법사라면 이걸로 공격이 끝났을지도 몰랐다. 그들에게 있어 이 마법은 고작 위협용이었으니까.

하지만, 유피테르는 달랐다.

그는 얼음 마법의 극한을 본 마법사였다. 시간과 마나 마저 동결시키는 힘을 가볍게 다룰 리가 없었다.

쩌져져적!

화살과 창이 닿은 부분부터 얼어붙기 시작하자 오크들의 안색이 변했다. 너나 할 것 없이 얼음의 영향권 밖으로 도망쳤다.

하지만, 얼음이 얼어가는 속도가 오크들의 발보다 더 빨랐다. 도망칠 곳은 빠르게 줄어들었고, 동료의 발에 밟히는 오크들이 더 많아졌다.

“봐, 봤냐! 이게 우리의 힘이다!”

“보긴 뭘 봐. 너도 놀랐으면서. 그래도 오늘만큼 마법사가 든든한 적은 없었지.”

간단한 마법이었으나 그 결과는 참혹했다.

유피테르는 단 하나의 마법으로 아군의 사기를 올리는 데 성공했다. 이에 맞춰 오크들의 사기는 곤두박질쳤다.

“치. 아무도 마스터의 실력을 인정하지 않으려했던 주제에.”

검사들의 행동이 마음이 들지 않았던 오흐트가 툴툴거렸다. 물론, 유피테르와 세이라 공주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였다.

“마음은 알겠지만, 지금은―.”

“나도 알아. 그냥 답답해서 그랬어.”

“그 마음만으로도 난 충분하다. 누구에게 인정받으려고 움직이는 건 아니니까.”

“응. 그럤지.”

유피테르는 오흐트의 마음을 달랜 후, 세이라 공주에게 말을 걸었다.

“뭘 멍하게 있어 다음 지시를 내려야지.”

“응, 맞아. 그랬지.”

“무슨 문제라도 있어?”

“아냐. 네가 생각보다 대단한 사람이라는 걸 확인해서 말이지.”

유피테르의 마법을 직접 본건 처음이었다.

공간 이동을 마음대로 사용하는 걸 보며 대단한 마법사라고 생각하긴 했다. 하지만, 직접 보니 순수하게 감탄만 나왔다.

괜히 유난 떤 게 아닌지 걱정이 될 정도였다.

“침착해라! 이 바보들아.”

오크를 지휘하던 지라르는 눈에 쌍심지를 켰다. 그리고서는 대기하던 오크 메이지들에게 눈치를 줬다.

그들은 망설임 없이 혼란에 빠진 오크들에게 마법을 쏘았다. 얼어붙은 자들이건, 도망치던 자들이건 신경 쓰지 않았다.

“저것들이 돌아버렸나?”

“아무리 그래도 아군을 공격하다니. 역시 몬스터는 인간과는 다르단 말인가!”

적이라고 해도 동료들을 공격하는 오크 메이지의 행동에 검사들이 탄식을 내뱉었다. 그러나 세이라 공주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저런 식으로 혼란을 잠재우다니 효과적이네. 아니, 몬스터라서 가능한 방법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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