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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도 포기한 대공자-203화 (203/265)

오크의 침공(8)

* * *

뒤쪽에서 낯선 이의 목소리가 들리자 엘림은 세이라 공주를 지키듯 일어섰다.

검사들에게 제압당했던 몸은 삐끄덕 소리를 냈지만, 고민하지 않고 젖먹던 힘까지 끌어냈다.

“엘림?”

“제 뒤쪽에 계십쇼, 대장님. 이 목숨을 버리더라도 지켜드리겠습니다.”

머리로는 대장이 아니라 공주라고 알고 있는데도, 대장이라는 말이 습관적으로 튀어나왔다.

오크들과 맞섰던 열기가 아직 몸에 남아있던 탓일까?

세이라 공주를 지켜야만 한다.

엘림의 머릿속은 오직 이 생각으로만 가득했다. 다른 단어들은 조합조차 되지 않아 선택지에 올라오지도 못했다.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다.’

낯선 이의 기운은 분명 2m 안쪽에서 느껴졌다.

그건 멀다면 멀지만, 가깝다고 한다면 한없이 가까운 거리였다.

중년의 나이에도 훈련을 빼먹지 않고 해왔기에, 극한의 상황에서도 마음은 침착했다.

어차피 할 일은 똑같았다.

검을 꺼내서 적을 공격하면 될 뿐이었다. 검사였던 그가 마법을 펼치는 건 불가능했으니.

엘림은 자식처럼 아끼던 검을 꺼내기 위해 손을 뻗었다.

검집의 차가움이 손을 간질였다. 손끝에서부터 전해지는 냉기가 가야 할 길을 인도해주는 것만 같았다.

엘림은 늘 하던 대로 검을 빼내서 빠르게 휘둘렀다.

발도.

시에라의 검사들이 가장 애용하는 기본적인 스킬이었다.

얼마나 검술에 익숙하냐에 따라 거리와 속도가 천차만별이었지만 말이다.

쉬이익!

일평생 검에 매진했던 엘림의 발도술이 그대로 작렬했다.

‘걸렸다!’

엘림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검을 갈무리했다.

상대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이 거리에서 발도술을 실패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원래 시에라의 검사들은 은혜를 이런 식으로 갚는 건가, 세이라 공주?”

하지만, 상대가 너무 나빴다.

낯선 이.

아니, 유피테르는 엘림의 생각을 완벽하게 읽었다.

바실리의 도움으로 마나를 느끼게 된 이후, 그에게 있어 이런 일은 식은 포션 먹기였다.

검사가 사용하는 기운인 오러 역시 큰 틀에서는 마나와 유사했다. 마족조차 능가하는 그가 일개 검사의 궤적을 꿰뚫어 보지 못할 리가 없었다.

“어, 어떻게!”

엘림은 경악했다.

유피테르가 멀쩡하게 살아서 말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옷은 피 한 방울조차 묻지 않고 깨끗했다.

“엘림이라고 했나. 검이란 건 사람을 해치는 무기라는 걸 알고는 있어?”

“대체一.”

“음?”

“대체 어떻게 살아있는 것이냐! 분명, 무언가를 베는 감각이 있었단 말이다!”

엘림은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시에라 제국에 이름을 날릴 만한 검사는 아니었다. 그래도 명색이 국경 수비대 부대장이었다. 어지간한 이들은 단칼에 베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는 게 당연했다.

한직이라고 해도 부대장의 자리를 카드놀이로 얻어내지는 않았으니까.

유피테르의 저 말은 지금까지 해왔던 노력을 짓밟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한 번은 운 좋게 피할 수 있겠지만, 두 번째는 아니겠지.’

엘림은 자세를 잡았다.

저 마법사가 누군진 모르겠지만, 요행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하지만, 두 번째 기회는 시작하기도 전에 끝나버렸다.

“엘림, 검을 내려.”

뒤편에 있던 세이라 공주가 앞으로 나오며 엘림을 제지했다.

“하지만, 대장님!”

“대장이 아니라. 공주야. 내 말이 말 같지 않나?”

화가 난 듯한 세이라 공주의 말에 엘림은 양손을 위로 올렸다. 공격할 의사가 없다는 의사 표현이었다.

“내 어리광을 들어주느라 수고했어. 유피테르.”

“어리광을 부릴 나이는 지나지 않았나? 그만한 대가를 얻었으니 충분하다.”

“오크들은 어땠어?”

“오크 나이트와 메이지가 있는 건 확실해. 적의 대장을 보긴 했지만, 돌연변이들은 끝내 나오지 않더군.

“수고했어.”

세이라 공주와 유피테르가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이어가자, 엘림은 어안이 벙벙했다.

일평생 시에라 제국에서 나간 적 없던 그녀가 마법사와 아는 사이인 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공주님. 대체 그자는….”

“정말로 누군지 모르겠어? 나는 네가 왜 유피테르를 공격했는지 모르겠던데.”

“그게 무슨….”

전 상관의 말에 엘림은 유피테르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끝내주게 잘생기긴 했군. 저 정도는 생겨야 은발의 머리카락이 어울릴 수 있는 건가. 은발…?’

유피테르의 머리카락을 본 엘림의 뇌가 한 가지 가설을 만들었다.

“설마, 국경 성에서 우리를 구해준 마법사가….”

“맞아. 유피테르야. 내가 너희들을 구해달라고 부탁했어. 그런 사람에게 검을 들이대다니 제정신이야? 너희가 그러고도 내 부하들이었다고 할 수 있어?”

세이라 공주는 엘림의 마지막 희망을 산산이 부숴버렸다. 그 순간 엘림의 머릿속에 거대한 폭풍이 몰아쳤다.

세이라 공주의 지인을 공격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애초에 제국의 공주가 아는 사람은 특별한 자일 테니까.

엘림은 조금 전 순찰대와 완전히 같은 잘못을 저지른 거였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상황 파악을 끝낸 엘림은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서 세이라의 판결을 조용히 기다렸다.

“고개를 들어. 네가 할 일은 하나뿐이야. 오크들에게서 시에라를 구해내는 것.”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 * *

검사들의 제국에 나타난 마법사는 존재만으로도 소란을 일으켰다.

게다가 공간 이동이라는 전설 속의 마법을 사용한 것도 문제였다. 마법에 대해 무지한 검사들도 게이트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다.

게이트마저 부정한다면 시에라 제국은 대륙에서 완전히 고립되었을 게 뻔했으니까.

‘확실히 유피테르가 너무 눈에 띄네.’

큰 전투를 앞두고 하나가 되지 못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았다. 이래서야 오크와 싸우기 전에 내부에서 갈등이 생길 것만 같았다.

그런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 세이라 공주는 큰 목소리로 말했다.

“시에라의 검사들이여!”

전투를 앞두고 자신만의 루틴을 확인하던 검사들의 시선이 천천히 공주에게로 향했다.

“저거 봐.”

“저분이 세이라 공주님이시군. 지휘만 하실 생각이 아니신가? 유일한 황족이 나서도 되는 거야?”

“듣기로는 국경 수비대에서 근무하셨다고 하더군. 그 점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네.”

하지만, 모든 검사들이 세이라 공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건 아니었다.

이곳에는 각기 다른 파벌의 자들이 모여있었다. 그중에서는 황실을 싫어하는 자도 많았다.

“흥. 국경 수비대는 뭐 하는 것도 없잖소. 어차피 기사나 병사들이 일을 다 처리할 텐데.”

“그게 문제가 아니오. 지금 공주는 마법사를 데리고 왔지 않소.”

“그래! 내가 말하고 싶은 게 바로 그거일세. 검사들의 제국에 마법사가 설치다니 말세일세.”

“차라리 시무르크 경이 이곳에 와주었다면 든든했겠지.”

원래 좋은 소리보다는 나쁜 소리가 귀에 더 잘 들어오는 법이었다,

세이라 공주는 입술을 깨물며 화를 다스렸다. 여기서 감정을 소모해봤자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다.

“일부 검사들이 마법사를 데려와서 마음에 들지 않은 것 같은데. 맞나?”

“….”

세이라 공주가 직접적으로 언급하자 그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다.

마법사를 싫어하긴 했으나, 지금 상황에서는 고양이 손이라도 감지덕지했다.

이곳에 모인 검사들을 다 합해봤자 고작 3천 명이었다. 그에 비해 오크들은 최소 1만이 넘는 대군이었다.

물량전에선 검사보다 마법사가 더 도움이 되기에 겉으로 티를 낼 수야 없었다.

“이곳에 온 마법사는 세 명이다. 먼저, 대표를 소개하지. 검사들이라고 해도 대륙 최강의 마법사인 조디악에 대해서는 들어봤겠지?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소개하도록 하지. 이 자는 사자자리의 마도사인 하토르 헤라클레스다!”

조디악의 마도사.

검사들은 그 말에 담긴 무게를 뼈저리게 느꼈다. 현시대 검사들의 목표가 바로 조디악을 뛰어넘는 거였으니.

묘한 분위기 속에서 하토르가 세이라의 말을 받아 자기소개를 시작했다.

“반갑다. 하토르 아르테미스다. 당신들이 마법사를 싫어하는 건 잘 안다. 고작 마법사 주제에 저런 입발린 소리를 하냐고 싫어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하토르는 말을 하다말고 갑자기 마나를 모았다.

하토르 식 육체 강화법 – 네메아

순간적으로 모이는 마나에 검사들 모두 무기에 손을 가져다 댔다. 숙련된 검사조차 예외는 아니었다.

‘그래. 이거다. 이 짜릿짜릿한 살기야말로 실력을 올리 수 있는 최고의 조건이지.’

하토르는 검사들의 반응을 즐기면서 온몸을 감싼 마나를 주먹으로 옮겼다. 그리고서 그걸 그대로 하늘로 방출했다.

콰아아앙!

하토르의 마나는 구름을 뚫고 하늘 위로 솟구쳐 오른 후,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걸 본 검사들은 안도의 한 숨을 내쉬며 손을 떼었다.

“―나는 마법사 중에서도 검사에 가까운 사람이다. 이 단련된 몸으로 직접 상대방을 때려눕히니까. 그래서 당당히 말할 수 있다. 훈련으로 다져진 근육은 절대로 배신하지 않는다는 걸! 그렇지 않나?”

하토르는 마법사답지 않은 차림이었다.

마법사들은 대개 로브나 움직이기 편한 옷을 선호했다. 하지만, 하토르는 갑옷을 입고 있었다.

물론, 완벽한 갑옷이 아니라 신체의 약점만을 가리는 형태였다. 관절 부분은 그냥 텅 비어있었다.

그게 움직임을 편하게 하려는 조치란 걸 모르는 검사는 이 자리에 없었다. 이곳에 모인 자들은 한계를 확인하기 위한 자들이 많았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전장이었기에.

“우와아아아아!”

평범한 마법사였다면 불신만 커졌을 거였다. 하지만, 하토르의 완벽한 근육이 검사들의 신뢰를 얻어냈다.

“이제 곧 이곳으로 오크가 올 거다. 겁이 나나?”

“아닙니다!”

“오크가 수만에 가까운데도 괜찮은가?”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

한 번 오른 기세는 끝을 모르고 올랐다.

“좋다. 그럼 어떤 식으로 싸울지 알려주겠다. 먼저….”

불타오르는 눈동자를 보며 세이라는 각자에게 임무를 부여해주었다.

시무르크와 미리 상의한 내용이었기에 전술적으로 문제가 되는 부분 따위는 없었다.

* * *

임무 하달이 끝난 후.

유피테르는 지휘관용 천막으로 향하는 세이라 공주를 발견했다.

‘생각보다 몸이 굳어있군.’

셍라 공주는 3천 명의 검사들을 상대하느라 지친 듯 보였다. 유피테르가 다가가도 눈치채지 못했다.

장난기가 발동한 유피테르는 얼음물을 목 뒤에 살포시 올려놓았다.

얼음 마법으로 얼린 물은 상상 이상으로 차가웠다. 그런 게 피부에 닿으니 세이라 공주는 비명을 지르며 뒤를 돌아보았다.

“앗! 차갑잖아!”

“꽤 말 잘하던데? 그 전술은 시무르크와 이야기한 거야?”

“그렇지. 능력 하니만큼은 확실한 검사니까. 대규모의 전쟁은 처음이라 살았어.”

“긴장하면 오히려 실력을 내지 못한다고.”

“나도 알고 있어!”

“걱정 마. 네가 다치는 일은 없을 거니까.”

두 사람이 이런 식으로 잡담하는 동안에도 오크들은 쉬지 않고 달려오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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