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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도 포기한 대공자-202화 (202/265)
  • 오크의 침공(7)

    * * *

    제2의 국경으로 불리는 류이스크.

    본래에도 흉흉한 기운을 뿌려대는 검사들의 도시로 유명했다. 진정한 검의 길을 걸으려면 꼭 들러야 한다고 말할 정도로.

    이런 배경을 지닌 류이스크는 현재 엄청난 긴장감에 휩싸여 대대적인 공사 중이었다.

    놀라운 건 지휘자가 인간이 아니라 드워프였다는 점이었다.

    드워프들은 검사들과 함께 도시 곳곳을 요새화하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었다.

    “거기 인간! 5번 부품 제대로 설치 못 하나? 넌 검도 그따위로 휘두를 텐가? 하긴, 실력이 없으니 이런 일이나 하겠군.”

    “설명을 제대로 해주던가! 설계도도 없이 설치하라는 게 말이 돼? 애초에 이딴 건 왜 설치하려는 거야?”

    “쯧쯧. 발리스타도 모르다니. 하긴, 너처럼 무식한 인간이 진짜 전쟁을 겪어보기나 했겠나.”

    “이게 진짜…. 죽고 싶어?”

    드워프의 지적에 검사는 참지 못하고 검을 빼들었다.

    날카로운 검은 태양 빛에 반짝였다. 그것만 보아도 얼마나 좋은 검인지 파악하는 게 가능했다. 바위도 무 썰 듯 잘라버릴 수 있어 보였다.

    하지만, 수백 년을 살아온 드워프 역시 만만치 않은 존재였다.

    “헹. 그걸로 날 찌를 용기는 있으시고?”

    “내가 못 할 거 같아? 내가 우습게 보이나 본데 내가 이래 보여도….”

    “자신이 있으면 찔러봐. 원래 미친놈들은 말하기 전에 행동한다고.”

    검사가 검을 빼 들고 위협해도 드워프는 묵묵히 설치된 발리스타를 확인했다.

    아무렇지 않게 행동하는 드워프를 보며 검사는 부들부들 떨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차올라도 손을 쓸 수가 없었다.

    ‘젠장, 젠장, 젠장! 공주님만 아니었어도.’

    드워프들을 이곳으로 초빙한 건 다름 아닌 세이라 공주였다.

    검 한 자루로 세상을 누비는 검사들이라도 황실은 무서웠다. 시에라 황실이 지닌 힘은 웃고 넘어갈 수 있지가 않았다.

    그림자들은 어디에도 있고, 어디에도 없었으니까.

    시무르크 급의 강자가 아니라면 고개를 숙이는 게 오래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작업은 잘 되어가나요. 할아버지? 시간이 촉박한데 불러서 미안해요.”

    검사의 속마음을 듣기라도 한 건지 세이라 공주가 드워프와 검사의 곁으로 다가왔다.

    “세이라 공주님을 뵙습니다.”

    “세이라냐.”

    검사는 세이라 공주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예의를 갖춰 인사했다.

    하지만, 늙은 드워프는 그러지 않았다.

    뒤조차 돌아보지 않고 손에 든 망치로 발리스타에 못을 박을 뿐이었다.

    “제가 왔는데 뒤도 안 돌아보시면 서운한걸요.”

    “네가 말한 스케쥴을 맞추려면 이러는 수밖에 없다.”

    “아무리 그래두….”

    “그래도는 뭔 그래도야. 그나마 인간을 싫어하지 않는 동료들이 있어서 다행이라고 알아.”

    세이라가 애교스러운 말투로 말해도 드워프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 자리에 검사가 낄 자리는 없었다.

    그걸 깨달은 그는 묵묵히 자리를 떴다. 필요로 하지 않는 곳에 계속 있자니, 자존심이 상했으니까.

    검사가 떠난 자리를 메운 건 세이라의 호위를 맡은 마법사들이었다.

    “언니! 혼자 뛰어가면 안 된다고 몇 번이나 말해.”

    “미안, 미안. 그래도 오랜만에 할아버지를 만났는걸. 오흐트도 그런 기분 알잖아?”

    “응응. 그 마음 충분히 알지. 그치만 말이야….”

    “하하. 어차피 우리가 있는데 무슨 일이 생길 리가 있겠나? 공주에게 너무 뭐라 하지 말게.”

    세이라의 뒤를 쫓아온 이는 오흐트와 하토르였다.

    유피테르가 자리를 비운 사이 공주를 지켜줄 만한 강자는 이 둘밖에 없었다.

    “그치그치. 역시 내 마음을 잘 알아주는 사람은 하토르 씨뿐이라니까.”

    “음음. 당연한 소리를.”

    만난 지 아직 하루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두 사람은 쿵짝이 잘 맞았다.

    그걸 본 오흐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후우…. 계속 이런 식이라면 대기하는 게 나았을지도?’

    천방지축처럼 행동하는 세이라 공주를 보자니, 유피테르가 너무나도 그리워졌다.

    마스터가 있을 때의 공주는 재기 넘치는 떠오르는 샛별이었으니까.

    그녀를 동생처럼 귀여워하더라도 할 일은 제대로 해냈었다. 그러나 지금의 세이라 공주는 고삐 풀린 망아지 그 자체였다.

    심지어, 하토르와 함께하니 두 배, 아니 세 배 이상 힘들었다.

    “언니, 아무리 그래도 사람들 속에 우리를….”

    오흐트가 정신을 차리고 세이라 공주에게 말을 걸려고 할 때, 강력한 마나의 기운이 느껴졌다.

    “너도 느꼈나?”

    마나를 감지하자마자 하토르는 오흐트를 쳐다보았다.

    “마스터의 기운이 맞아. 역시, 마스터가 실패할 리 없다니까.”

    “평범하지 않다곤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내가 걱정했던 게 손해였군,”

    천칭의 정체를 숨기기 위해 유피테르는 평범한 마법사인 척했다.

    아르테미스의 비밀스러운 이미지 덕에 이 작전은 어느 정도 먹혀들었다.

    하토르는 조디악의 일원치고는 깊이 생각하지 않는 자였기에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상황이 바뀌었어.’

    오흐트는 류이스크로 떠나기 바로 전을 떠올렸다.

    세이라 공주가 갑자기 유피테르에게 국경 수비대 일원을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마스터는 그걸 무시하려고 했다.

    하지만, 원하던 정보가 교환 조건으로 나와 어쩔 수 없이 수락했다.

    ‘지금 생각해봐도 마스터는 대단해.’

    하토르가 의심의 시선을 보냈지만, 유피테르는 아는 사람의 도움을 받아보겠다는 말로 적당히 받아쳤다.

    이미 천칭과 연락을 했다는 결과가 있었기에 그 누구도 반박하지 못했다.

    자신이었다면 아마 마땅한 변명이 떠올리지 못했을 것이었다.

    “왜 그렇게 봐?”

    오흐트와 하토르의 시선이 쏠리자, 세이라 공주가 물었다.

    “이번에는 도망치지 않고 같이 가겠다고 약속해. 무슨 일인지 아직 파악도 안 되었잖아.”

    “지금은 이야기가 다르다오. 호위를 자처한 이상 위험한 곳에 혼자 보낼 수는 없소.”

    호위들이 한 목소리로 주장하자 세이라는 항복했다.

    “아, 알았다구. 같이 가면 되는 거잖아. 그렇게 물가에 내버려 둔 아이처럼 보지 마!”

    세이라는 멋쩍은 듯 소리를 지르고서는 호위들과 함께 문제의 장소로 이동했다.

    * * *

    영문도 모른 채로 류이스크로 공간 이동된 엘림과 부하들은 곤경에 처해 있었다.

    “당신은 대체 누구냐!’

    “나는 위대한 시에라 제국의 국경을 지키는 부대장 엘림이다.”

    “국경 수비대? 웃기지 마. 마나를 사용하는 검사가 어디 있나! 헛소리하지 말고 정체를 밝혀. 그렇지 않으면 당장 처형해주지.”

    “나는 제국의 동료지, 적이 아니란 말이다!”

    “예. 예. 그러시겠지.”

    엘림이 목이 쉬어라 이야기를 해도 검사들은 들을 생각이 없었다.

    류이스크로 모인 검사들에게 있어 공간 이동은 전설 속의 기술이었으니까. 게다가 검사들이 마법사에게 가지는 반감은 상상 이상이었다.

    “네가 정말로 시에라 제국인 이라고 해도. 국경은 여기서 한참 떨어진 곳에 있다. 사람을 속이려면 적어도 그럴듯한 변명을 가져와야지. 안 그러냐 애들아?”

    “맞습니다!”

    “그냥 죽여버리죠? 적의 첩자일지도 모릅니다.”

    한 검사가 옆에 선 이들에게 묻자, 다른 검사들이 이에 맞장구치기 시작했다.

    “뭐하냐 애들아. 준비해라.”

    그 말에 다른 검사들이 엘림에게 달려들었다.

    양손이 뒤로 묶이고 무릎이 꿇려지는 건 한순간이었다. 지친 엘림의 부하들은 부대장이 구속당하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내게 걸린 걸 다행이라고 생각해. 나는 아―주 마음이 넓은 사람이라 곱게 보내줄 거니까.”

    검사는 검을 뽑아 들고 자세를 잡았다. 허울뿐인 자는 아닌지 아주 익숙해 보였다.

    그가 엘림의 목을 내려치려고 하는 바로 그 순간.

    “이게 무슨 소란이죠?’

    세이라 일행이 그곳에 도착했다.

    “세이라 공주님!”

    “마나의 기운이 느껴졌는데 무슨 일인지 파악은 한 건가? …엘림? 왜 그러고 있어?”

    세이라의 눈에 결박당한 엘림이 들어왔다.

    믿을 수 없는 광경에 그녀는 바로 곁에 다가가 구속을 풀어주었다.

    충직했던 부하가 고통받는 모습에 가슴 한편이 아프고, 눈시울이 붉어졌다.

    “아는 사람입니까. 공주님?”

    공주가 적이라고 판단했던 자들을 풀어주자 검사는 검을 검집에 넣었다. 검사의 행동을 지지하던 이들도 숨을 죽이고 흘러가는 상황을 지켜보았다.

    “내 예전 부하였어. 대체 무슨 일인 거야. 너희는 순찰대로 알고 있는데.”

    “아무것도 아닙니다.”

    공주의 부하였던 자를 처형하려고 했었던 검사는 입을 다물었다. 괜히 일을 키우고 싶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엘림의 부하 중 한 명이 그를 고발했다.

    “저자가 주변의 검사들을 선동해. 엘림 부대장을 처형하려고 했습니다!”

    세이라 공주는 그 이야기를 들자마자 검사를 노려보았다. 검에는 재능이 없다는 소문이 무색할 정도로 파괴적인 기운이었다.

    “저 말이 사실이야?”

    “아닙니다. 전 다만 겁을 주려고 했던 것뿐입니다. 나라가 어지러운 상황이니 마법사가 침투한 줄 알았습니다.”

    “그래?”

    마음 같아서는 더 쏘아붙이고 싶었다.

    하지만, 저 검사의 말에 잘못된 부분은 없었다. 꼬투리를 잡고 싶어도 지극히 상식적인 이야기만을 하니 불가능했다.

    누구보다 그 사실을 잘 아는 세이라 공주는 그냥 사건을 무마시키기로 마음을 굳혔다.

    “좋아. 이 건은 불문에 붙일게. 난 이들에게서 이야기를 들어야겠어. 너희들은 복귀해.”

    “알겠습니다. 그럼 저희는 임무대로 주변을 순찰하겠습니다. 애들아 가자!”

    “예. 형님.”

    “빨리 갑시다!”

    검사는 주변에 있던 동료들을 데리고 바로 자리를 떴다. 이곳에서 오래 있어봤자 득이 될 게 하나도 없었으니까. 도둑이 제 발 저리다는 말처럼.

    “고생했어.”

    “아닙니다. 저희는 임무를 지키지 못한 패잔병들입니다. 그런 격려의 말을 듣는 건 과분합니다.”

    엘림 부대장은 고개를 떨어트리고는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시간을 벌어달라는 공주의 말을 지키지 못했기에 공주를 볼 면목이 없었다. 대체 무슨 원리로 류이스크로 온 지는 모르겠으나, 임무에 실패한 건 확실했다.

    “그건 그렇게 신경쓰지 않아도 좋아. 그보다 너희들을 구해준 사람의 외모를 기억해?”

    세이라 공주의 말에 엘림의 부하들이 저마다 한 마디씩 의견을 냈다.

    “아마, 긴 은발을 한 남자 마법사였습니다.”

    “아닙니다. 은발을 한 건 맞지만 엄청난 미인이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남자일 리 없습니다.”

    “그 자의 목소리를 들었잖아. 분명히 남자였다니까!”

    “넌 눈이 삐었냐? 그 외모로 남자라면 신이 인간을 버린거지?”

    부하들의 이야기가 이상하게 변질되자 엘림이 나서 제지했다.

    “그만!”

    조용해진 분위기에 엘림은 가슴 속에 품고 있던 이야기를 밖으로 꺼냈다.

    “설마 공주님께서 보낸 지원군이 아니란 말씀이십니까?”

    “아니, 나는 공주가 보낸 사람이 맞는데?”

    “누구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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