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도 포기한 대공자-200화 (200/265)

오크의 침공(5)

* * *

“취이이익―.”

“인간들을, 취익―. 모두, 취익―. 죽여라, 취익―.”

쿵! 쿵! 쿵! 쿵!

성문에 금이 가기 시작하자, 오크들의 공세가 더욱 거세졌다.

명색이 한 제국의 국경을 지키는 성이었다.

그러나 인간이 만든 건 영원하지 않았다. 세월 앞에서 무너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부, 부, 부대장님. 이대로 가다간….”

“나도 아니까 진정해! 베테랑인 네가 떨면 다른 병사들에게도 영향이 간다!”

부대장은 어떻게든 분위기를 돌리려 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조금씩 무너져 버리는 성에서 제정신을 유지하는 건 부대장과 몇 안 되는 병사들뿐이었다.

이 정도로 몰렸는데도 흔들리지 않는다면 이미 병사의 그릇을 추월한 거였다.

‘세이라 공주님. 어째서 지원군은 오지 않는 겁니까! 버터기만 하면 금방 도착할 거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절체절명의 순간에서 부대장은 세이라 공주와 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오랜만이야 엘림 부대장?”

“세이라 대, 대장…. 공주님. 무슨 일로 연락을 주셨습니까?”

“오크를 맞이할 전략이 완성돼서 연락한 거야. 병사들 분위기는 어때? 기사들은 모두 도망갔다며.”

“그건 상정한 일이었습니다.”

부대장 엘림은 반쯤 체념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애초에 국경 수비대는 좌천된 기사들만이 오는 곳이었다. 권세를 누리다가 이런 한직으로 발령받으니 대부분 견디지 못하고 타락했다.

세이라 공주는 간단한 안부를 더 물은 후, 오크를 물리칠 작전에 대해서 설명을 마쳤다.

“저희의 역할은 그 구원자가 올 때까지 버티면 되는 겁니까?”

“맞아. 현시점에서 내가 가장 믿는 사람이니까. 너희들은 무리하지 말라고.”

“알겠습니다. 최대한 시간을 끌어보겠습니다.”

“수고해.”

“충성!”

세이라 공주는 어느 때라도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오랫동안 같이 근무한 건 아니지만, 사람 보는 눈 하나는 자신 있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믿었다.

든든한 지원군이 와서 그와 병사들을 구해줄 거라고. 국경 수비대의 마음을 확 잡아끈 것처럼 이번 위기도 돌파해줄 거라고.

“성, 성문이 뚫립니다!”

망원경으로 바깥의 상황을 보던 한 병사가 공포에 질려 소리쳤다.

우지끈!

급한 대로 이것저것 덧붙여 보강한 성문은 결국 오크의 발아래로 떨어졌다.

성문이 열리고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자 오크들은 흥분했다.

“부서졌다! 취이이익―.”

“들어가서, 취익―. 전부, 취익―. 부숴라, 취익―.”

“취익―.”

끝없는 파괴 욕구

이것이야말로 몬스터들의 본성이었으니까. 그 어떤 상위 개체도 이 욕망을 완전히 극복하지는 못했다.

지라르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오크들을 자극했다.

“봐라, 내 말대로지 않냐! 인간들은 과거와 다르게 약해졌다. 우리 오크의 힘을 똑똑히 보여주자!”

그 말을 들은 오크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성안으로 달려들어 갔다.

오죽하면 서로 부딪쳐서 압사당하는 오크들까지 나왔다.

먼 시에라 제국까지 강제로 끌려온 데다, 그동안 사람을 구경도 하지 못한 상태였다.

장작 위에 횃불을 던져주니 눈이 돌아가는 게 당연했다.

애초에 몬스터에게 동료의식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상위 개체가 선사하는 아찔한 폭력에 잠시 굴복한 것뿐이었으니.

“엘림 부대장님. 이제 어떡합니까?”

“성문이 부서질 거라고 예상했잖아! 아직 죽은 사람도 없는데 벌벌 떨 거냐?”

“하지만!”

“하지만이고 자시고 곧 구원자가 올 거다. 넌 세이라 공주님을 믿지 않을 거냐!”

“아무리 그래도 이건 버틸 수가 없는 상황이지 않습니까!”

다른 병사들은 부대장만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엘림이라고 해서 뾰족한 수를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이미 성문은 열렸고, 오크들은 밀물처럼 들이닥쳤다.

간신히 100단위를 맞춘 병사들로 수만에 이르는 오크들을 막는다는 건 처음부터 불가능에 가까웠다.

버티는 것조차 어느 정도 급이 맞아야 생각해볼 수 있는 선택지였다.

“엘림 부대장님, 결단을 내려주십쇼!”

“더 이상 버티는 건 미친 짓입니다. 부대장님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성을 버리고 뒤로 후퇴합시다. 어차피 류이스크까지만 가면 되지 않습니까?”

부하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후퇴를 주장하자 엘림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세이라 공주님 정녕, 구원자는 오지 않는 겁니까?’

모든 게 예상과는 달랐다.

오크들을 이곳에서 제대로 붙잡아두지 못했다.

평소 보수공사를 제대로 하지 않은 성이 오래 버틸 거라곤 처음부터 기대하지 않았다.

그래도 이건 너무 심했다.

몇몇 오크들에게 피해를 주기는 했으나, 그건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수만에 이르는 군세이니 타격이 없는 것과 다름없었다.

‘공주님께서 뭘 준비했는지는 몰라도. 최대한 버티는 게 우리의 일이다.’

머리로는 알고 있었으나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척박한 환경에서 동고동락한 부하들을 사지로 내모는 건 사람이라면 못 할 짓이었다.

수성 측 최대의 장점을 잃어버렸으니 더는 무리였다.

“어쩔 수 없다. 우리는 이 성을….”

바로 그때였다.

유피테르 식 특제 마법 – 니플헤임

지독한 냉기가 성과 그 주변을 쓸고 지나갔다.

뼛속까지 얼어붙을 것만 같은 기운에 병사들은 숨을 참고 몸을 낮췄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죽을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으니까.

기운이 사라지자 병사들은 하나둘 주변을 살폈다.

고개를 빼꼼 들고서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서로 의견을 나누었다.

“사, 살아 있잖아?”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마법인가? 이렇게 대규모 마법을 사용하는 마법사가 제국에 있었다고?”

“바보야. 대장님이 지원군을 부르신 거야.”

“대장님 같은 소리 하네. 공주님이라고 불러. 기사들에게 모가지 날아간다?”

“오크들이 무서워 튄 기사들 따위 별거 아닌데.”

지축을 흔드는 오크의 소리마저 들리지 않자, 병사들은 안도하며 자세를 풀었다.

단 한 사람, 엘림을 제외하고서

“조용! 아직 끝난 게 아니다. 모두 긴장을 풀지 말라고. 이것마저 적의 습격일지도 모른다.”

“에이, 엘림 부대장. 오크들 소리가 완전히 들리지 않잖아요.”

“맞습니다. 오크 메이지라고 해도 이렇게 강력한 마법을 사용하지는 못할 겁니다.”

병사들은 엘림의 말을 부정했다.

오크 메이지를 본 적은 없었으나 이런 수단을 아껴두는 건 말이 되지를 않았다.

오크들이 전략과 전술을 사용한다는 건 검사들이 마법을 좋아한다는 소리와 똑같았다.

전제부터가 불가능한 일이었다.

“취익―.”

“지라르, 취익―. 님, 취익―. 돌입한, 취익―. 오크들이, 취익―. 전멸, 취익―.”

압도적인 마법에 놀란 건 인간들뿐만이 아니었다.

기세 좋게 성을 공략하던 오크들 역시 입을 다물고 지휘관의 눈치를 살폈다.

지라르는 답답함에 주변에 있던 오크 나이트에게 소리를 질렀다.

“이럴 수는 없다! 들어간 오크들은 어떻게 되었나? 빨리 피해를 확인해!”

“알겠습니다. 취익―.”

오크 나이트들은 순식간에 흩어졌다.

‘메이지들은 저 모양 저 꼴이니 뭘 시킬 수도 없고. 짜증 나는군.’

지라르는 혀를 차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성을 공략하기 위해 마법을 퍼부은 메이지들은 마나를 다 소모해 뻗어버렸다. 단순히 지친 상태가 아니라, 꿈쩍도 하지 않았다.

지라르와 오크들이 멈춘 그 시각.

유피테르는 성 위에서 항전하던 병사들에게 다가왔다. 낯선 자가 천천히 다가오자 병사들은 긴장했다.

“오래 버티지는 못했군. 아니, 예상대로 흘러갔다고 해야 하나?”

“정체를 밝혀주십시오!”

엘림이 용감하게 나서 유피테르에게 물었다.

“세이라 공주가 보낸 사람이다, 라고 말하면 이해하겠나?”

“휴우. 드디어 살았어!”

“역시 대장님이셔. 약속하면 반드시 지켜주신다니까.”

병사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긴장을 풀었다.

늘 명령을 따르는 하급자들이었기에 어느새인가 깊게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한 번 몸에 밴 나쁜 버릇은 쉽게 떨어질 생각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부대장인 엘림은 달랐다.

“공주님께서 당신을 보냈다는 증거가 있나? 그걸 보여주기 전에는 믿지 않겠다.”

저자가 대단한 마법사라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지금까지 만나 본 마법사 중 가장 강력한 마법을 사용했으니까. 오크 메이지들이 사용한 마법이 애들 장난으로 보일 지경이었다.

하지만, 아군인지를 파악하는 게 먼저였다.

“이거라면 만족하나?”

유피테르는 옆으로 차고 있던 작은 검 하나를 꺼내 엘림에게 보여주었다.

“그, 그건!”

검을 확인한 엘림은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유피테르가 꺼낸 검은 황실의 피를 이은 자만이 가질 수 있는 물건이었다. 국경 수비대 대장으로 있을 때 보았기에 진품이라는 걸 확신했다.

“난 시에라 제국을 도와주러 온 사람이니 편하게 말해.”

“구해준 건 고맙소. 당신이 아무리 강한 마법사라고 해도 수만의 오크를 이길 수 있는가? 단적으로 묻지. 이제 어쩔 셈인가.”

유피테르의 말에 엘림은 자리에서 일어서고는 앞으로의 계획을 물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홀로 수만의 대군과 싸우는 건 희망이 없어 보였다. 계란으로 산을 부수려고 하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유피테르에게는 생각이 있었다.

“이런 식으로 하지 않을까?”

“어어…!”

“뭐야, 너 왜 옅어졌어? 모습이 점점 보이지 않는데. 무슨 일인 거야.”

“너도 마찬가지야.”

“무슨 짓을 하시려는 거요! 설마, 적이었던 거요?”

엄청난 마나 때문에 어지러움이 느껴지는데도 엘림은 정신을 잃지 않았다. 오히려 유피테르를 노려보며 대답을 요구했다.

“걱정 마. 눈을 감았다 뜨면 안전한 곳일 테니까.”

“그게 무슨 개소….”

그 말을 끝으로 국경 수비대의 병사들이 성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마족마저 능가하는 유피테르의 마법을 일개 병사들이 견뎌내는 건 기적 그 이상의 것이었다.

“취익―.”

“인간? 취익―.”

“인간, 취익―. 이다, 취익―.”

홀로 남은 유피테르의 앞에 오크 나이트와 부하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나타나자마자 눈동자를 번들거리며 달려들었다.

이미 불만이 머리끝까지 차오른 상황이었다. 여기까지 올라오며 인간을 한 명도 보지 못했기 때문에.

지라르의 말과는 달리 이 성에는 인간이 없었다. 오크들에게 있어 인간은 마나를 얻을 수 있는 하나뿐인 영양식이었다.

슈웅!

한 오크의 몽둥이가 그대로 유피테르의 얼굴로 날아들었다. 사냥감을 빼앗기고 싶지 않던 다른 오크들 역시 참전했다.

“내가 꽤 쉬워보였나봐?”

유피테르는 몸을 뒤로 젖히며 첫 번째 몽둥이를 가볍게 피해냈다. 오크의 수가 문제였던 거지 각각의 전투력은 그리 높지 않았으니까.

유피테르 식 얼음 마법 – 얼음 화살

유피테르는 오크들의 사각을 파악했다. 그리고서는 마나를 뒤로 돌려 얼음 화살을 만들고 쏘았다.

파바박!

얼음 화살의 속도는 알고도 피할 수 없을 정도로 빨랐다. 심지어 전부 한 방에 즉사할 수 있는 심장만을 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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