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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도 포기한 대공자-199화 (199/265)
  • 오크의 침공(4)

    * * *

    시에라 제국의 국경을 든든히 지키는 성에 전운이 감돌았다.

    평소와 달리, 검문소들은 전부 치워져 있었고, 몇 겹이나 보강한 성문은 굳게 닫혀 누구도 들이지 않았다.

    하지만, 고작 이 정도로 병사들의 긴장감을 풀어줄 수는 없었다.

    “부대장님 저희 살아서 돌아갈 수는 있습니까? 제게는 아직 여우 같은 마누라랑….”

    한 병사가 긴장을 풀고자 옆에 있는 상사에게 말을 걸었다.

    “네가 결혼하지 않은 거 다 안다.”

    “예? 잘 못 들었습니다?”

    “우리 국경 수비대 전부가 네가 지금까지 여자 손도 못 잡아 본 걸 안다고. 설마, 진짜 속아 넘어갔다고 생각했냐?”

    “마, 말도 안 됩니다! 어제 술자리에서 모두가 크게 웃었지 않습니까?”

    병사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의 말처럼 국경 수비대는 어젯밤 최후의 만찬을 즐겼다.

    “아그들아! 죽기 전에 한 잔쯤 괜찮지 않냐!”

    “우와아아아아아!”

    “부대장! 부대장! 부대장! 부대장! 부대장! 부대장!”

    국경 수비대 부대장은 사비를 탈탈 털어 회식을 열었다.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싸움을 앞두었을 때 술을 들이붓는 건 종종 쓰는 방식이었다.

    독한 술을 입에 털어 넣는 순간, 세상의 근심이 사라졌으니까. 설령, 한바탕의 꿈이라고 해도 그 정도면 충분했다.

    긴장감을 이기지 못하고 뜬눈으로 지새우는 것보다 나았으니까. 잠을 제대로 못 잔다면 적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패배할 게 눈에 선했다.

    “헛소리는 그만하고. 무기나 점검해. 죽기 전에 결혼, 아니 애인은 만들어봐야 하지 않겠냐.”

    “정말로, 정말로 결혼했단 말입니다. 제게는 토끼 같은 귀여운 자식들도.”

    “그래그래 알았다. 그 가족들의 눈에 눈물이 차지 않게 꼭 살아남으라고, 이건 명령이다.”

    “옙!”

    부대장의 말을 들은 병사의 눈에 결의가 깃들었다.

    그는 시에라 제국의 군인이라는 걸 늘 자랑스럽게 생각해왔다.

    거의 밑바닥에 가까운 국경 수비대 소속이었고, 매일 힘든 일이 연속해서 일어나도 이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그래도 나라에 대한 헌신보다는 가족이 먼저였다.

    집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이들을 떠올리자 온몸에 힘이 가득해서 몸이 근질근질해졌다.

    ‘그래, 그 자세다.’

    부대장은 전사의 모습을 한 병사를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저 병사는 이 중에서 가장 어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일 같이 열심히 훈련했으며, 위기의 순간에도 늘 남을 우선시했다. 또, 항상 살가운 태도로 먼저 말을 걸어왔다.

    그런 그를 싫어하는 대원은 한 명도 없었다.

    “곧 오크들이 들이닥칠 거다. 지금 이 기세를 잊지 말고 싸워라. 알겠나?”

    “알겠습니다!”

    부대장은 병사의 어깨를 툭툭 치고서는 떠나갔다.

    그로부터 10분이 지난 후,

    “오크들이 보입니다!”

    망원경에서 눈을 떼지 않던 한 척후병이 적습을 알렸다.

    그 말에 병사들의 시선이 오크들에게로 향했다.

    “시X, 끝이 보이지가 않잖아. 무슨 바퀴벌레들이냐고.”

    “저게 말로만 듣던 오크 나이트인가? 가지고 있는 검이 내 것보다 더 좋아 보이는데.”

    계속해서 이어지는 오크 군대를 보자 병사들이 흔들렸다.

    압도적인 병력의 차에 마음이 제멋대로 요동치는 건 인간의 당연한 심리였다.

    쿵! 쿵! 쿵!

    미리 깔아놓았던 철책과 장애물들을 가볍게 치워버리고 다가오는 오크들은 공포 그 자체였다. 게다가 인간의 군대처럼 오와 열을 맞춰 행군 중이었다.

    몬스터가 규율을 지킨다는 모순적인 상황에 병사들의 사기가 끝을 모르고 내려갔다.

    회색빛 미래에 암담함을 감추지 못하는 상황.

    “정신 차려라! 바보들아.”

    경험 많은 부대장만큼은 흔들리지 않았다.

    무게감 있는 목소리에 병사들의 고개가 저절로 돌아갔다. 부대장은 부하들의 눈을 하나하나 마주치며 연설을 시작했다.

    “두렵나? 두렵겠지. 너희들은 국경 수비대임에도 늘 검문을 위주로 했으니까. 실전적인 전투에 겁을 먹는 건 당연하다.”

    “아닙니다!”

    자신들을 무시하는 듯한 어투에 병사들이 항의했지만, 부대장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늘 우리 앞에서 으스대던 멍청한 기사들은 다 어디로 갔나!”

    “도망쳤습니다!”

    원래 국경 수비에는 기사들이 몇 명이나 있었다.

    국경 수비대는 여러 개의 소대로 이루어져 있었고, 각 소대의 대장은 기사들의 몫이었다.

    대부분의 기사는 공주를 따라 수도로 향했고, 그나마 남은 이들은 오크의 소식을 듣자마자 도망쳤다.

    “그렇다. 여기 남은 이들은 진정으로 용맹한 자들이다. 제국이 우리를 홀대했는데도, 희생할 줄 아는 진정한 검사들이란 말이다!”

    “맞습니다!”

    부대장의 열변에 병사들의 사기가 조금씩 올랐다.

    기사들을 언급한 게 신의 한 수였다.

    상관이긴 했으나, 늘 투덜거리며 편안한 일만 맡으려 하는 그들을 좋아하지 않았으니.

    으스대는 귀족들과 고생하는 평민들의 사이가 좋은 경우는 역사서에 적혀있지 않았다.

    “모두 알고 있겠지만, 다시 한번 말한다. 우리의 목적은 오크를 막아내는 게 아니다. 류이스크의 준비가 끝날 때까지 시간을 끌면 된다. 너희는 그것도 못 하는 겁쟁이들이냐?”

    “아닙니다아아아악!”

    병사들의 눈이 빛나다 못해 불타올랐다.

    부대장의 진심이 담긴 말에 몸을 갉아 먹던 공포가 저 하늘 위로 날아가 버렸다.

    그걸 확인한 부대장은 검을 빼 들어 높게 올렸다.

    “이기고 돌아가자!”

    “이기고 돌아가자! 이기고 돌아가자! 이기고 돌아가자!”

    병사들은 지금껏 한 번도 본 적 없을 정도의 사기로 가득했다.

    오크가 아니라 오우거나 트롤이 오더라도 도망치지 않을 정도의 열기였다.

    모든 병사들이 각기 다른 무기를 들고서 지휘관의 말을 기다렸다.

    부대장은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명령했다.

    “무기를 들고 각자 배정받은 자리로 향해라. 명심해라, 세이라 공주님께서 우리를 지켜보신다!”

    척!

    병사들은 빠르게 위치로 향했다.

    수백 명이 움직이는데도 동선이 겹치지 않을 정도로 기민한 움직임이었다.

    어느새 성문 앞까지 도달한 오크들은 진형을 바꾸었다.

    일반 오크들 사이사이에 메이지들과 나이트가 스며들었다. 공격을 분산시키기 위한 최고의 형태였다.

    “공격이 옵니다!”

    “전원 방패를 들어라! 몸을 숙여!”

    퍼엉!

    오크 메이지가 사용하는 마법은 매서웠다.

    파이어볼은 그대로 방패로 날아들어 폭발했다. 몇십 개에 불과했지만, 그 위력은 어마무시했다.

    “크아아악. 팔이, 팔이 뜨거워…. 라고 할 줄 알았냐. 우리를 얕보지 말라고 이 괴물 새X들아!”

    “후, 농담이 많이 늘었네.”

    곳곳이 불타오르고 몇몇 병사들이 날아가도 침착했다.

    마법사에게만은 지고 싶지 않다는 오기가 발동한 거였다.

    “당하고만 있을 거냐? 불로 공격했으면 불로 맞받아쳐 줘! 불화살을 퍼부어!”

    부대장의 말을 들은 병사들은 불화살을 준비했다. 그 잠깐의 시간 동안 방패를 든 병사들은 묵묵하게 버텼다.

    화르륵!

    타오르는 수백의 불화살들은 그대로 오크들에게 날아갔다.

    평소 다양한 무기를 연마했던 이들이기에 화살은 정확하게 오크의 머리를 꿰뚫었다.

    쿠웅!

    중력의 도움으로 한층 더 강력해진 화살들은 맞은 오크들이 쓰러졌다. 쓰러진 시체는 불을 만드는 새로운 장작이 되어 주변의 오크들을 순식간에 집어삼켰다.

    그렇게 몇 번의 공방이 오갔다.

    “어떻게, 취익―. 할까. 취익―.”

    “성에만 있으면 공격하는 게 어렵디 취익―.”

    인간들의 대응이 생각보다 거세자 오크들은 당황했다.

    그리 크지 않은 성이기에 순식간에 점령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성안에 있는 인간들의 수는 너무나 적었으니까.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성이라는 든든한 아군을 얻은 버러지들은 쉽게 공략당하지 않았다. 심지어, 오크들의 피해가 훨씬 컸다. 아무리 공격을 좋아해도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뭘 어렵게 생각해. 성째로 밀어버려.”

    “취익―.”

    분명히 수적으로 우위인데도 답답한 상황이 이어지자 지라르가 나섰다.

    하이 오크 중에서도 고귀한 피를 이은 그는 육체적으로는 연약했다. 그래서 늘 오크 사회에서 경멸을 받아왔다. 몬스터라고 하기에는 아까울 정도의 두뇌를 가지고 있음에도.

    ‘그분의 뜻을 어기는 자에게 죽음을.’

    그러나 현재의 지라르는 과거와는 완전히 달라졌다.

    근육은 터질듯했고, 오크임을 상징하는 두 어금니도 어마어마하게 날카로웠다. 더는 무시 받던 시절의 그가 아니었다.

    “그게, 취익―. 가능, 취익―. 합니까? 취익―.”

    “어렵게 생각하니까 문제가 풀리지 않는 거라고.”

    지라르는 오크 나이트들을 한심하게 쳐다본 후, 메이지들을 전부 호출했다.

    “어떤 마법까지 쓸 수 있나?”

    “파이어 스톰까지입니다. 취익―.”

    “파이어 레이저. 취익―.”

    “파이어, 취익―. 볼, 취익―.”

    모여있는 오크 메이지들의 수준은 전부 다 달랐다. 오크의 대군이 여러 부족의 오크들을 합친 거였기 때문이었다. 지라르가 이끄는 돌연변이 군대가 워낙 강했기에 가능했다.

    “가지고 있는 최고의 마법을 쏟아내. 다만, 노리는 곳은 인간이 아니라. 이곳이다. 아, 너랑 너는 원래대로 인간을 노려도 좋아.”

    지라르는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한쪽을 노렸다.

    “공격이 또 날아옵니다!”

    “이제는 익숙해질 때도 되었지 않나! 했던 대로 막아내. 조금만 더 버티면 우리의 승리다.”

    불꽃 마법이 또 날아오자 부대장은 정석대로 움직였다.

    방패를 들게 하고, 몸을 숙여 기운을 흘려보낸 뒤, 적이 방심한 틈을 노린다.

    그 방법은 틀리지 않았다.

    다만, 지라르의 계략이 조금 더 우위였을 뿐.

    쿠우우웅!

    “무슨 일이지!”

    “서, 서, 서, 성이 흔들립니다. 성 자체에 균열이 가고 있습니다.”

    부대장의 물음에 한 병사가 상황을 재빨리 파악하고서 대답했다.

    ‘설마? 아니겠지….’

    차가운 비수가 심장에 꽂힌 것만 같았다.

    국경 수비대의 성은 튼튼하긴 했으나, 마법적인 처리가 되어 있지는 않았다. 강력한 마법 한 방이면 얼마든지 무너질 수 있었다.

    부대장은 고개를 저으며 애써 그 사실을 무시하려고 했다. 하지만, 병사들은 패닉에 빠져버렸다.

    “성이 무너진다니 그런 일이 진짜로 가능한거야?”

    “그러면 우리가 아무리 막아내도 소용없잖아. 모두 다 죽을거야 우린.”

    “이대로면 다 죽는 거야?”

    “그런 무서운 소리 하지 마! 우린 반드시 살아 돌아갈 거라고.”

    성의 밑 부분이 공격당했다고 해도 그렇게 쉽게 무너질 리는 없었다. 그러나 알 수 없는 것에 대한 공포는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

    부대장 역시 무너지는 성에 있어 본 경험이 없기에 쉽게 방법을 찾지 못했다.

    “취익―. 지라르 님, 취익―. 예상대로, 취익―.”

    “취익―.”

    “취익―! 취익―!”

    오크들은 흥분해서 명령도 듣지 않고 뛰어나갔다.

    오크 메이지들의 마법을 맞은 성의 밑부분은 균열이 만들어졌고, 성문 역시 금이 갔다.

    언제 부서져도 이상하지 않아 보였다.

    “어이. 너.”

    “무슨 취익―?”

    “그대로 돌격시켜서 전부 죽여버려.”

    “알겠습, 취익―.”

    지라르는 기세를 탄 오크들을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

    상선약수(上善若水)

    굳이 흘러가는 물을 가두거나 잡으려 하지 않고, 그 흐름을 그대로 이용했다.

    지금까지 인간과 오크의 전투를 지켜보던 한 사람이 드디어 나서기로 마음을 먹었다.

    ‘세이라 공주의 부탁이면 들어줄 수밖에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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