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도 포기한 대공자-198화 (198/265)

오크의 침공(3)

* * *

“돌연변이라니! 그건 던전에서나 볼 수 있는 현상이지 않은가.”

예상치 못한 말에 하토르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 바람에 의자가 쿵 소리를 내며 넘어졌지만, 그걸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돌연변이는 그만큼 중요한 문제였다.

“이 근처에서 던전이 나타났다는 소문은… 정말로 모르겠군.”

야심 차게 일어난 하토르의 목소리는 천천히 힘을 잃어갔다.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던전이야 여러 번 갔었다.

힘을 시험하기에 그만한 공간은 없었고, 조디악의 퀘스트도 던전 공략에 집중되어 있었으니까.

하지만, 소문에는 밝지 못했다.

하토르의 삶은 육체 강화마법의 끝을 보는 것에만 집중되어 있었다. 매일매일을 생사를 오가는 훈련으로 꽉 채워놓았다.

이런 극한의 상황이었기에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나 소문은 궁금하지조차 않았다.

“마스터의 말이니까 당연히 믿어! 근데, 이 근처에서 던전이 생겼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구?”

오흐트는 델포이 아카데미에서도 넓은 인간관계를 자랑했다.

그 덕에 대륙 곳곳의 정보를 손쉽게 얻었다. 물론, 트리아만큼의 정확도를 가지지는 못했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자연스럽게 정보를 모으는 건 오흐트가 가진 능력 중 하나였다.

“세이라 공주, 정말로 던전이 발생하지 않았나? 당신이라면 정확한 정보를 알고 있다고 믿어.”

제대로 된 해답을 듣기 위해 유피테르는 세이라 공주에게 질문했다.

시에라 황실에서 이루어진 음모를 눈치챈 그녀라면 이 정도는 알 거라는 기대를 하고서.

“던전 말이지?”

세이라 공주는 기억을 되짚어보았다. 그러나 딱히 짚이는 부분은 없었다.

혹시라도 놓친 부분이 있나 싶어 태엽을 조금 더 돌려보았다.

이런저런 기억들이 빠르게 흘러갔지만, 던전과 관련된 내용은 보이지 않았다.

“최근 6개월 동안 던전이 나타나지는 않았어. 그런 내용이 적힌 보고서도 기억에 없어. 던전이 나타나면 늘 신관들을 초빙해 오니까 늘 예산을 타가거든.”

“정말이야?”

“내 명예를 걸고 확신할 수 있어.”

“좋아….”

이쯤이면 충분하다.

그렇게 판단한 유피테르는 다른 이야기를 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 순간 세이라 공주가 다른 가능성을 꺼내 들었다.

“던전이 발생했는데도 내가 모르는 경우가 있을 수도 있어.”

“그게 대체 뭐야 언니?”

오흐트가 묻자 세이라 공주는 그녀의 눈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시무르크와 귀족들이 마음먹고 내 눈을 가리려고 하면 충분히 해낼 수 있어.”

세이라 공주가 차기 황제가 될 확률이 가장 높긴 했다.

그러나 그녀의 지지 기반은 너무나 연약했다. 황실의 그림자들이 도와줄 뿐, 귀족들의 마음을 얻지 못한 상태였다.

재상에서 물러나도 늘 사람 속에서 살아가는 시무르크와 확연히 대비되었다.

심지어, 국경 수비대에서만 있었으니 그녀의 눈을 속이려면 얼마든지 가능했다.

전투와는 상관없는 이야기가 이어지자 하토르가 목소리를 높였다. 이런 책상놀음은 늘 형의 몫이었기에 어색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그래서 대체 결론이 뭔가?”

“일단 자리에 앉는 게 어때? 저쪽의 메이드들이 무서워한다고.”

“아, 그건 생각하지 못했군. 실례했다.”

조디악답지 않게 하토르는 순순히 사과했다. 그리고서 주저앉아버린 의자를 고치고서는 자리에 앉았다.

누구보다 빠르게 불탔으나, 동시에 누구보다 쉽게 식는 사람이었다.

“유피테르. 굳이 내게 사실을 확인한 건 무언가 생각이 있어서겠지?”

“맞아. 나는 이렇게 생각해.”

세이라 공주, 오흐트 그리고 하토르까지 모두가 유피테르의 입에 시선을 모았다.

“마족.”

쿠르릉!

황제의 집무실에 별안간 천둥이 쳤다. 엄청난 소리가 나자 세이라 공주는 창문 밖을 확인했다.

“맑잖아…?”

하늘은 여전히 푸르게 빛났다.

구름 하나 걸치지 않은 하늘에서 천둥이나 번개가 치는 건 불가능했다. 산 정상까지 보일 정도로 맑았으니까.

의외로 해답은 가까이에 있었다.

“죄, 죄송합니다! 금방 치우겠습니다.”

한 메이드가 연신 사과하며 떨어트린 그릇 조각을 치웠다.

엉성한 손놀림과 부자연스러운 자세는 정말 메이드가 맞긴 한 건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신입이라고 해도 이런 실수를 하다니. 자네는 공부가 더 필요하겠군요.”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사과는 제가 아니라. 공주님과 그 일행분들께 해야죠. 정신 똑바로 차리지 못하겠나요!”

쨍그랑!

메이드장의 불호령에 사고를 친 메이드는 화들짝 놀라면서 그릇을 하나 더 깨고 말았다.

“아라미! 도저히 안 되겠군요. 오늘로써 그만두세요. 이런 행동은 메이드 전체의 수치에요.”

“죄송합니다. 메이드장님. 그, 그것만은 봐주세요.”

코앞에서 해고를 당한 메이드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한껏 겁을 집어먹은 토끼처럼 울먹일 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시에라 제국에서 황실 메이드는 영광스러운 자리였다. 귀족 자제들이 배움을 얻는 자리였으니까.

그 이후로도 메이드장의 호통은 계속되었다.

유피테르와 오흐트 심지어 하토르까지 안타까운 표정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그래도 다른 제국에서 벌어지는 일이기에 손을 쓰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결국, 세이라 공주가 나섰다.

“메이드장.”

낮은 목소리에 메이드장은 헐레벌떡 뛰어왔다.

“예. 공주님. 이런 못난 꼴을 보여드려서 죄송합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저 메이드. 그냥 용서해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메이드장의 눈이 동그라졌다.

차기 황제가 될 사람 앞에서 실수했는데 용서하라니. 그건 그녀의 사전에 등재되어 있지 않은 문장이었다.

“실수한 사람을 그냥 내버려 둔다면 다른 이들도 해이해질게 분명….”

“내 말이 말 같지 않아?”

세이라 공주에게서 느껴지는 은은한 제왕의 기운에 메이드장은 깜짝 놀라 고개를 숙였다.

“아, 알겠습니다.”

이야기를 끝낸 메이드장은 아라미라는 메이드에게 가서 상황을 설명했다.

울상을 짓던 아라미의 표정은 점차 밝아졌다.

정리가 끝난 후, 아라미는 유피테르 일행이 있는 테이블로 다가왔다.

“제게 두 번째 기회를 주셔서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아라미는 머리를 숙이고 온몸으로 감사함을 표현했다.

세이라 공주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가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그 순간.

‘음…? 잘못 본 건가?’

유피테르는 두 눈을 의심했다.

메이드에 불과한 아라미의 몸에서 검은 마나가 나오는 게 보였기에.

있을 수 없는 일에 눈을 깜빡이자, 검은색 마나는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후였다.

그야말로 백일몽(白日夢) 같았다.

‘잠을 자지 않고 움직여서 피곤이 쌓인 건가.’

마족이 이렇게 가까이에 있는데 오흐트가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유피테르는 눈을 지그시 감고서 손으로 마사지를 했다. 뜬금없는 유피테르의 행동에 오흐트가 걱정스러운 말투로 물었다.

“마스터 어디 아파?”

“아니, 헛것을 본 것 같아서. 어젯밤에 잠을 못 자서 그럴지도 몰라.”

“괜찮은 거야? 내가 치유해줄까?”

“아직은. 정말로 힘들어지면 그때 부탁할게.”

“알았어!”

말은 그렇게 해도 오흐트의 눈은 계속 유피테르를 향해 있었다.

유피테르가 가진 능력은 인간을 초월한 힘이었다. 전대 마스터인 바실리가 인정했으니 두말하면 입이 아팠다.

그러나 그의 어깨에 올려진 짐은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무게였다. 그래서 꼭 도움이 되고 싶었다.

“이야기가 딴 길로 계속 새는군. 그냥 간단하게 설명 가능한가.”

“응. 움직여야 하니까 이제 시간이 없어.”

메이드의 방해에 답답했던 하토르가 제안했고, 자리로 돌아온 세이라 공주도 동의했다.

“대륙 전쟁 시기 마족들은 다른 종족들을 가지고 묘한 실험을 했다고 해. 이 이야기가 맞다면….”

“던전 밖의 돌연변이들은 모두 마족의 작품이라는 건가.”

“이미 마족이 한 번 나타났었으니까. 또 무언가를 꾸미고 있어도 이상하지 않네!”

유피테르가 시작한 말을 세이라 공주가 받았고, 오흐트가 마무리를 지었다.

“그럼 그 돌연변이는 내가 맡도록 하지.”

강적의 등장에 하토르가 불타올랐다. 이미 다른 이야기들은 머릿속에서 떠난 지 오래였다.

“좋아. 그럼 모두 현장으로 이동하자.”

더 이상의 회의는 시간 낭비라고 파악한 세이라 공주가 분위기를 바꿨다.

“어? 언니도 갈 거야?”

“당연하지. 내가 지휘하지 않으면 누가 지휘하겠어. 오흐트, 너도 봤잖아 귀족들이 얼마나 썩어있는지.”

“그건 그렇긴 한데….”

세이라 공주의 말대로 귀족들에게만 맡기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래도 유일한 황제의 핏줄이 굳이 전쟁터로 간다는 말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내가 걱정되는 거야? 아이구 고마워라.”

세이라 공주는 오흐트를 끌어안았다.

오흐트의 눈동자 속에 담긴 감정을 읽었기에. 가족만큼이나 살갑게 구는 여동생이 너무나 깜찍했다.

“유피테르와 오흐트 마족을 쫓아낸 너희 둘이 있는데 위험한 상황이 오겠어?”

세이라 공주는 불안감을 없애려 일부러 웃었다.

“나도 있다만.”

“맞아! 여기에는 대륙 최강의 마도사인 하토르 씨도 있잖아. 오크의 돌연변이라고 해도 한 방에 부숴버릴 거 같지 않아?”

“음! 내 이 주먹에 걸리면 그 무엇도 한 방이다.”

하토르는 자신감이 가득한 표정으로 주먹을 날리는 시늉을 했다.

‘분위기를 읽을 만한 사람은 아니지만, 뭐 지금은 저걸로 충분하겠지.’

유피테르는 하토르가 깊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세이라 공주의 도움이 된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그럼. 이제 이동하자. 다른 이들은 모두 예상 지역에 집결되어 있어. 어제 시무크르와 이야기를 끝냈거든.”

“뭐로 이동할 거야 언니?”

“일단은 마차로 이동할까 하는데…. 혹시 공간 이동 마법을 사용할 수 있어?”

세이라 공주의 물음에 대답한건 유피테르가 아니라, 하토르였다.

“공간 이동은 그렇게 쉽게 쓸 수 있는 게 아니네. 저 친구도 마나를 회복할 시간을 주어야 하겠지.”

“유피테르의 실력은 이 정도가 아닌….”

“그건 자네가 마법을 잘 몰라서 그렇네. 은발이 푸석푸석해진 게 보이나? 그가 무리하고 있다는 증거네! 그렇지 않나!”

“그, 글쎄….”

유피테르의 실력을 알고 있던 세이라 공주는 반박하려 했다. 하지만, 이미 자신만의 논리를 확립한 하토르의 귀에 그 말은 들리지 않았다.

‘당신은 유피테르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몰라. 성국에서 마족들과 낙원교를 없앤 장본인인걸. 그 사실을 들었을 때 얼마나 행복했다고.’

세이라 공주는 결코 생각을 밖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가슴에 품고 있는 큰 뜻이 밖으로 나오는 순간 많은 사람이 상처를 입을 테니까. 새로운 세계를 이룰려면 어느 정도 희생은 필요했다.

그래도 그날이 오기까지는 혼자만의 비밀로 두고 싶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