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도 포기한 대공자-196화 (196/265)
  • 오크의 침공(1)

    * * *

    시간은 무정했다.

    세이라 공주가 불철주야 노력해도 모래시계는 점차 끝을 향해 달려갔다.

    오크 대군세는 그녀의 노력을 비웃기라도 하듯, 속도를 높였다. 수만에 달하는 숫자가 아무런 방해가 되지 않는 것처럼.

    그들이 도착할 때까지는 단 하루밖에 남지 않았다.

    내일 아침이면 오크들이 국경에 도착하고, 시에라 제국 전역에서 전쟁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칠 게 분명했다.

    물론, 시에라 제국에 슬픈 일만 계속된 건 아니었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말처럼, 희망의 빛은 조금씩 얼굴을 내밀었다. 그중에는 유피테르가 약속했던 ‘조디악’도 포함되어 있었다.

    “당신은…! 이곳에는 어떻게 들어온 거지! 여긴 언니, 아니 세이라 공주님의 집무실이야.”

    이른 아침.

    낯선 방문객의 등장에 오흐트는 긴장감에 몸을 떨었다.

    당당히 걸어오는 모습과 풍기는 기운을 볼 때, 보통 마법사는 아닌 듯 보였다.

    ‘내게 맡겨진 일이야. 반드시 세이라 공주를 지켜내야만 해.’

    유피테르는 이 자리에 없었다.

    조디악을 찾으러 간다는 말만 남기고는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다. 평소 모습을 생각하면 연락조차 없는 게 이상했지만, 다 생각이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렇다 해도 명령은 명령이었다.

    칼리스토의 자존심은 임무 실패라는 사실을 절대로 용납하지 않았다.

    “나는 이리로 가라고 부탁을 받아서 온 것뿐이오만?”

    “여긴 황성이야. 원하는 모두가 마음대로 들락거릴 수가 없는 곳이라고.”

    “황성이라…. 확실히 그렇군. 하지만, 마법적인 방비가 너무 허술해. 이건 우리 가문보다 못한 정도가 아닌가.”

    낯선 방문객은 오흐트의 말을 듣고는 생각에 잠겼다.

    ‘이런 식밖에 되지 않으니 천칭은 날 찾아온 건가. 역시, 천칭 님은 존경할 수밖에 없는 분이시군.’

    그랬다.

    낯선 방문객은 천칭인 유피테르가 직접 초대한 사자자리의 마도사 하토르 헤라클레스였다.

    하토르와 함께 공간 이동을 한 유피테르는 시에라 황성 앞에서 사정을 설명했다.

    “같이 싸웠으면 좋았을 텐데. 다른 일이 있어서 미안해요 하토르.”

    “이 정도 일이라면 천칭 님께서 나설 필요도 없습니다. 오크들 따위 단단한 근육으로 한 방에 쓸어버리겠습니다.”

    “부탁할게요.”

    유피테르와 천칭은 동일인이었기에 같은 장소에 있는 게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해서 천칭의 정체를 속 시원히 밝힐 수도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대륙의 다른 곳에 터진 문제를 해결해야만 한다고 둘러댔다.

    변명은 의외로 잘 먹혀들었다.

    천칭이 지금까지 쌓아놓은 이미지가 좋아서인지, 아니면 하토르가 운동밖에 모르는 바보여서 그런 것인지는 아무도 대답할 수 없었다.

    “방금 그 말은 황실을 넘어서 시에라 제국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여도 되나?”

    황성에 대해 자부심을 공격받은 세이라 공주가 발끈하며 황제의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리고서 낯선 이의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 모습에선 황실의 피를 이은 자의 카리스마가 느껴졌다.

    “어, 언니!”

    오흐트는 세이라 공주를 걱정했다.

    침입자의 정체도 확인되지 않은 상황에서 저런 터무니 없는 행동은 위험했다.

    저자가 정말로 마족이라면 세이라 공주의 목숨은 언제든지 앗아갈 수 있는 것에 불과했으니까.

    “가만히 있으렴. 오흐트. 이건 다른 문제를 넘어서야. 그리고 만일의 경우에는 네가 나서줄 거잖아?”

    세이라 공주는 오흐트의 실력을 믿었다.

    유피테르가 말없이 사라진 건 화가 났으나,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유피테르는 합리적인 근거를 바탕으로 움직이는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오흐트 혼자서도 어지간한 마족은 상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게 옳았다.

    그렇게 생각하니 자신감이 한껏 차올랐다.

    강자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고 당당히 말하는 세이라 공주의 태도에 하토르는 만족했다.

    “세이라 공주님은 뜨거운 사람이구만! 그런 사람은 싫지 않아. 좋아 이 하토르가 두 발 벗고 나서주도록 하지.”

    “하토르…? 설마, 헤라클레스 가문의 그 하토르인가!”

    “역시! 검사들의 제국이라도 내 이름 정도는 알려져 있을 거라고 믿었어.”

    “하지만, 당신이 대체 왜 시에라에? 리투아 제국에는 아직 구원 요청도 하기 전인데….”

    “난 천칭의 의뢰를 받고 시에라 제국을 도와주러 왔다. 제대로 소개를 하도록 하지. 사자자리의 마도사 하토르 헤라클레스다.”

    하토르가 정체를 밝혔으나, 세이라 공주는 아직 그를 믿지 않았다.

    키마라 재상이라는 선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대신 오흐트 쪽을 흘끗 쳐다보았다. 아까와 다르게 편안한 상태였다.

    ‘적어도 마족이 숨어든 거 같지는 않네. 다행이야.’

    일단 안심했다.

    신성 마법을 사용하는 오흐트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으니까.

    신관들은 레아가 직접 인정한 자들이었기에 그들의 눈은 믿을 만했다. 설령, 썩어빠져 돌이킬 수 없는 자들이라고 해도 말이다.

    “천칭… 이라면 아저씨도 조디악의 일원이야?”

    “으음? 꼬마 아가씨는 꽤 괜찮은 마나를 가지고 있군. 신성 마법사인가?”

    “오! 근육이 대단한데. 정말로 마법사야? 거대한 검을 휘두르기만 해도 강해 보이는데.”

    “신성 마법사를 호위로 두다니 시에라 제국이 원래 이랬나?”

    깊게 생각하기 싫어하는 두 사람이 만나자 대화가 영 맞물리지를 않았다. 이야기를 듣지 않고 그저 하고 싶은 이야기만 계속할 뿐이었다.

    이대로 가다간 끝도 없어 보여 세이라 공주가 나섰다.

    “하토르 님? 이라고 하셨나요.”

    조디악은 초월자들이기에 신분에 연연하지 않았다. 그걸 알고 있던 세이라 공주는 어색하게 말을 높였다.

    “하토르면 돼. 황족에게 높임말을 들으면 오싹오싹하거든. 나도 편하게 해도 되지?”

    하토르는 높임말에 손사래를 치며 거절했다.

    “좋아. 조디악의 마도사라면 그럴 만한 자격이 있지.”

    “이런 시원시원한 태도 다른 곳에서 보기 힘든데. 역시, 공주님은 마음에 든다니까.”

    “별거 아니야.”

    세이라 공주는 다시 의자로 돌아가 앉았다. 오흐트 역시 의자 옆에 서서 하토르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게 호위의 일이었으므로.

    짝짝!

    세이라 공주는 박수를 쳤다. 그리 크지 않은 소리였는데도 문밖에서 누군가 반응했다.

    곧이어 메이드가 들어오더니 고개를 숙이고서 명을 기다렸다.

    황실에 근무하는 엘리트, 그것도 세이라 공주만을 담당하는 자들이기에 공손하면서도 신속한 움직임이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손님이 오셔서 말이지 의자 하나와 다과를 부탁해도 되겠나?”

    “예. 알겠습니다.”

    주인의 명령을 빠르고 정확하게 해내는 것이 사용인의 숙명이었다.

    그걸 해내기 위해 기품있게 몸을 돌려 나가려고 할 때, 세이라 공주가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그….”

    “혹여 더 필요하신 게 있으십니까? 얼마든지 괜찮사옵니다.”

    세이라 공주는 멋쩍은 듯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그러나 숙련된 메이드는 주인이 원하는 바를 정확하게 읽어냈다.

    “홀케이크를 따로 준비시키겠습니다.”

    “어떻게 알았어?”

    속마음을 들킨 세이라 공주는 깜짝 놀라 물었다.

    메이드를 불렀을 때부터 옆에서 엄청난 시선이 느껴졌었다. 범인은 바로 오흐트였다.

    다과의 이야기에 순간 원래 모습이 나온 게 뻔했다.

    “메이드이기에 당연한 일입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공주님.”

    메이드는 발소리조차 내지 않고 집무실에서 나갔다. 그걸 본 하토르가 휘파람을 불며 감탄했다.

    “여긴 메이드들도 검술을 배우나? 체술에 일가견이 있는 듯 보이는데?”

    “나로서는 당신이 더 이상해. 마법사인데 그런 근육을 가지고 있다니.”

    “이건 가문의 비밀이라. 전부 알려줄 수는 없다고. 일단은 강해지기 위해서라고 해둘게.”

    하토르는 헛기침을 한 번 한 뒤 이야기를 돌렸다.

    “크흠. 흠. 그래서 시에라 제국의 전술은 뭐야? 수만의 오크라면 쉽지는 않을 텐데.”

    수만의 오크는 기어 오는 재앙이었다.

    그것만으로도 벅찬데, 하이 오크들까지 관찰되었다. 그들이 있는 이상 오크 나이트나 오크 메이지도 있을 게 분명했다.

    “국경을 포기할 거야.”

    “뭐라고? 그게 무슨 소리야. 오크를 상대로 전면전을 하겠다는 거야?”

    하토르는 어이가 없어 되물었다.

    오크는 오우거 같은 강력한 힘이나 트롤 같은 압도적인 회복력을 지니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악독함”이 있었다.

    포기하지 않고 방심한 순간을 노리는 그들을 적으로 돌리면 피곤했다.

    조디악의 놀란 얼굴을 감상하며 세이라 공주는 입을 열었다.

    “국경에 있는 성은 대군을 막을 만큼 크지도 않고 지어진 지도 오래돼서 약해. 그런 곳에서 수성을 할 수는 없잖아?”

    “그건 그렇군. 내 주먹 한 방으로도 부서질 정도인가? 한 번 시험해 보고 싶어지는걸.”

    쿠웅―

    심장이 떨어질 뻔했다.

    가볍지만 무서운 뜻이 담겨있는 말에 세이라 공주는 몸을 떨었다.

    ‘역시 조디악은 생각하는 방식이 다르네. 성을 주먹으로 부숴버린다니.’

    그걸 눈치챈 오흐트가 손을 꽉 잡아주자 몸에 온기가 돌아왔다.

    세이라 공주는 고맙다는 뜻을 담아 머리를 쓰다듬어주고서는 말을 이었다.

    “운이 좋게도 오크들은 한 방향으로만 오고 있어. 국경 너머 바로 있는 성이 꽤 튼튼하거든. 여기서 맞받아칠 거야.”

    “생각이 있다면 그걸로 충분해. 나는 시키는 대로 싸워줄 테니까. 이른바 용병이라고나 할까?”

    “이쪽에서 필요 이상으로 싸우게 만들려면 어떡하려고?”

    세이라 공주는 고개를 갸웃했다.

    조디악은 모두 자존심이 강한 마법사라고 들었는데, 하토르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말을 할 때마다 주변의 기운이 흔들리지 않았다면, 조디악이 맞는지 의심했을 정도였다.

    “아, 그래도 상관없어.”

    “뭐?”

    “시에라 제국을 돕는 건 천칭 님의 부탁이니까. 그분의 부탁은 조디악에게 있어 가장 우선시된다고.”

    “그런 거였구나.”

    물론, 천칭에게 깊이 감화된 하토르가 이상한 거였다.

    다른 조디악들은 그처럼 천칭을 신격화하지는 않았다. 툴툴거리면서도 이야기를 들어주기는 했지만.

    덜컹!

    그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자 메이드 부대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실례하겠습니다.”

    여러 메이드들은 익숙하게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했다.

    하토르에게 의자를 가져다주는 걸로 모자라 테이블까지 세팅했다. 그 후, 손수레를 끌고 와서 가벼운 다과상을 완성했다.

    찻주전자에서는 녹차의 향이 진하게 풍겼고, 가벼운 느낌의 쿠키들도 상에 올라왔다. 달콤한 느낌을 주는 케이크는 오흐트의 앞에 놓였다.

    방금까지 집무실이었던 곳은 더할 나위 없는 찻집으로 변신했다.

    “시에라 제국의 메이드는 일류 이상인데? 황실이라고 해도 수준이 달라.”

    리투아 제국 황실을 경험했던 하토르는 진심을 담아 칭찬했다.

    “어머, 고마워. 여기선 이런 게 기본이거든. 다른 제국은 가본 적이 없어서 말야.”

    “이 일이 끝나면 헤라클레스 가문으로 한 번 초대하지. 그때 황실 호위들과 한번 붙어보고 싶은데. 일류 검사들은 마법사들을 압도한다면서?”

    “그 마음만으로도 충분해. 난 당신처럼 마음대로 살지는 못한다고.”

    “어느 제국이나 머리가 아픈 건 마찬가지구만. 그렇게 사는 거 힘들지 않아?”

    “전혀.”

    두 사람은 차려진 다과를 만끽하며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세이라 공주 역시 오랜만에 마음 편히 수다를 떨 수 있었다. 시에라 제국의 귀족들을 상대할 때의 찝찝함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아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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