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한 발 남았다(6)
* * *
유피테르의 말에 오흐트는 추억 속에서 헤엄쳤다.
눈을 감지 않아도 바실리와 함께 했던 일들이 사르륵 지나갔다. 그저 떠올리는 것뿐인데도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마스터와 함께 있어서 내가 나로 있을 수 있었어. 다시 만나자는 그 말 지켜줄 거라 믿어도 되지?’
희대의 마법사 바실리.
그녀는 칼리스토를 위한 계약 마법을 만들었고, 유피테르라는 사기적인 능력을 지닌 마법사도 찾아냈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교육까지 끝냈다.
고마운 전대 마스터 덕에 무겁게만 느껴졌던 성녀의 짐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물론, 레아교의 치유사로 활동하는 건 좋았다. 지금도 같은 길을 걷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사람들의 기대감 어린 눈빛이 점점 부담스러워졌다.
의지해주는 건 기뻤다. 하지만, 성녀도 사람이었다.
신의 목소리를 들은 건 위대한 업적이지만, 마음속은 다른 사람과 다를 바 없었다.
현실의 벽에 막혀 허우적거릴 때, 바실리가 찾아왔다.
“나랑 함께 가지 않을래?”
그 말 한마디에 오흐트의 마음은 구원받았다. 그 후, 칼리스토의 일원이 되었고 세계의 비밀에도 가까워졌다.
이 중 하나라도 새어나간다면 대륙이 뒤집힐 게 분명했다.
‘마스터라는 직책은 비밀을 하나씩 품고 있어야 할 수 있는 건가?’
현 마스터 유피테르도 꽤 비밀이 많은 마법사였다. 그래도 전대 마스터인 바실리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호위 중에 다른 생각을 하는 건 위험하다고 안 배웠어?”
“난 치유사야. 마스터도 그걸 알잖아? 그냥 전대 마스터 생각을 좀 했어.”
“아, 이제야 기억해 낸 거야?”
“응. 왜 까먹었는지 모르겠네. 천칭의 마도사는 칼리스토의 주인을 뜻한다는 걸.”
대륙의 사람들이 들으면 놀랄 이야기를 두 사람은 너무나 쉽게 입에 올렸다.
세아니아 대륙 사람들은 천칭의 마도사가 누구인지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보통 조디악의 자리에 오르면 어떤 자인지 소문이 퍼지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천칭은 달랐다.
오직 천칭만이 제대로 된 정체가 알려지지 않았다. 그저 여러 뜬 소문만이 돌고 돌 뿐이었다.
11명의 다른 조디악들은 어떻게든 천칭의 정체를 밝혀보려고 했다. 그러나 압도적인 힘의 차이를 겪고는 포기해버렸다.
그 이후, 천칭은 조디악의 리더이자 세계의 조율자로 남게 되었다.
“그럼 좀 갔다 올게. 일반 마족이 상대라면 혼자서도 충분하지?”
“그렇긴 한데. 어디 가게?”
“약속했으니 지키러 가야지. 대충 생각해 놓은 조디악이 있으니. 빨리 올 거야.”
“마스터도 참. 사서 고생이라니까. 그래도 그런 마스터의 모습이 좋다구.”
“그럼. 갔다 올게.”
유피테르는 그 말만을 남겨두고 자리를 떴다.
* * *
유피테르는 어렵지 않게 성 밖으로 빠져나왔다. 드워프의 지도 덕이었다.
사각지대만을 이용하고 투명화 마법까지 사용하니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휘이잉.
서늘한 밤바람이 볼을 스쳐 지나갔다. 고개를 들자 높은 산 위에 걸쳐 있는 달이 보였다.
휘영청 밝은 빛을 내는 달을 보니 아르테미스 가문과 카테리나가 떠올랐다.
‘카테리나는 아직도 깨어나지는 않은 건가.’
마왕의 심장과 융합한 카테리나는 지금 터지기 일보 직전의 폭탄이나 다름없었다.
초대 성녀인 오흐트가 포기했다면, 기적을 바라야만 했다.
만약, 여동생이 깨어났다면 부회장 리오나가 먼저 연락했을 거였다.
그러나 연락용으로 건네준 아티팩트는 깜깜무소식이었다.
카테리나의 옆에 있어 주고 싶었으나, 해야 할 일이 아직도 많이 쌓여있었다.
유피테르는 고개를 돌려 시에라 제국의 황성을 쳐다보았다.
그리고서는 어떤 조디악이 이 일에 어울릴지 생각에 잠겼다.
조디악이 많으면 많을수록 쉽게 해결될 일이었다. 허나, 이곳에 데려올 수 있는 건 한 명뿐이었다.
오크와 싸울 사람이 필요한 거였지, 괴물들이 날뛰는 전쟁터로 바꿀 생각은 없었으니.
애초에 한 명만 데려오기로 약속했고, 조디악끼리 사이가 좋지 않은 경우도 많았다.
“역시 사자자리(Leo)의 그 녀석이 좋겠군.”
고민 끝에 유피테르는 사자자리를 맡은 조디악으로 결정했다.
털털한 성격에 압도적인 화력을 지니고 있어, 이런 물량전에 제격이었다.
“그럼 가볼까.”
마음을 굳힌 유피테르는 공간 이동 마법을 사용했다.
공간 이동을 위해서는 엄청난 양의 마나가 필요했는데, 어떤 검사들도 유피테르가 마법을 사용한 걸 눈치채지 못했다.
이게 유피테르와 시에라 검사들의 실력 차이였다.
유피테르가 향한 곳은 놀랍게도 모국인 리투아 제국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황성이나 아르테미스의 얼음성은 아니었다. 그저, 중부 지역에 있는 적당한 크기의 영지였다.
“그 옷을 어디에다가 뒀더라.”
유피테르는 결계를 치고 나서 아공간을 뒤적였다.
사자자리의 조디악을 만나기 전에 천칭의 모습이 되어야만 했으니까.
이대로 가면 천칭의 정체가 자신이라는 걸 사방팔방 소문내는 것에 불과했다.
아공간은 정리가 잘 되어있는 편이어서 원하는 걸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었다.
유피테르는 가면과 로브 그리고 반지 아티팩트를 착용한 후, 얼음으로 거울을 만들어 냈다.
“완벽하군.”
거울 속에 비친 모습은 의심할 여지 없는 천칭의 것이었다. 단 한 부분도 은발의 대공자를 연상시키는 곳이 없었다.
유피테르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는 반지에 마나를 불어넣었다. 그러자 마나의 색이 흰색으로 변했다.
준비를 끝마친 유피테르는 저 멀리 보이는 거대한 건물들로 향했다.
“합!”
“그것밖에 못 하나!”
“하아압!”
“허리에 힘을 넣어! 주먹에 마나를 잔뜩 담으란 말이다! 그런 식으로는 헤라클레스의 비기를 깨달을 수 없어!”
아직, 새벽이 되기도 전인데 기합 소리가 생생하게 들려왔다.
호기심이 생긴 유피테르는 잠시 방향을 틀어 훈련장에 다가갔다.
가까이 가기 전 마나를 이용해 최대한 기척을 지우고 투명화 마법까지 사용했다.
‘역시 헤라클레스인가. 무식할 정도로 훈련하는군.’
압도적인 훈련량에 유피테르는 쓴웃음을 지었다.
강하다고 소문난 아르테미스의 마법사단도 잠과 휴식마저 방해하지는 않았다. 물론, 특별 훈련 기간이나 테스트 때에는 여지없이 잠자는 것도 방해했지만 말이다.
흥이 식은 유피테르는 원래의 방향으로 돌아섰다.
그가 잠시 구경하다 갔는데도 훈련장에는 마나의 잔향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헤라클레스의 성은 훈련장으로 가득 차 있어 처음 온 이들은 길을 잃곤 했다.
그러나 유피테르는 익숙하게 건물들 틈을 빠져나갔다.
그렇게 몇십 분을 걸었을까.
“멈춰.”
누군가 뒤를 잡았다.
평범한 마법사라고 하기에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마나가 넘실거렸다.
“내가 보이나요?”
“그럼. 아주 잘 보이는데. 고작 밤이라고 이런 걸 못 보면 헤라클레스의 마법사라고 할 수 없지.”
유피테르가 물은 건 그게 아니었다.
투명화 마법은 그렇다고 하더라도, 존재감을 지우는 마법은 특제 마법이었다.
바실리와 공부하던 시절 너무나 힘들어서 이 방법을 이용해 도망친 적이 있었다. 초월자들에게도 충분히 먹히는 걸 보고 놀랐었다.
평범한 마법사가 그를 눈치채는 건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놀랐나? 놀라고 있는군. 이 시간대에 그런 모습으로 움직이면. 나 수상한 사람이에요―라고 말하는 거라고?”
마법사는 씨익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너무 놀라서 말도 나오지 않나 보군. 그럼 좀 따라오겠나? 어떻게 보호 결계를 돌파했는지 이야기를 좀 듣고 싶은데.”
마법사는 유피테르에게 항복을 권했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결판이 난 듯했다.
‘설마, 날 몰라보는 거야?’
유피테르는 심각하게 고민했다.
지금 협박하는 저 마법사가 찾고 있는 당사자였다. 마나의 향과 말투, 게다가 행동까지 판박이였다.
문제는 그가 ‘천칭’을 까먹은 듯한 태도를 보이는 거였다.
그는 누구보다 천칭과 한 판 붙어보고 싶어 하는 자였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알아보지 못하니 당황했다. 시트시거와 같은 느낌이라도 이건 도를 지나쳤다.
“말이 없는 거 보니. 항복하려는 마음은 없나 보군. 그럼!”
유피테르가 묵묵부답이자, 마법사가 행동에 나섰다.
슈웅!
공기를 가로지르는 묵직한 일격을 유피테르는 가볍게 몸을 틀어 피해냈다.
“호오? 이걸 피하다니 보통 놈은 아니군. 더 궁금해지는걸!”
슈웅! 슈웅! 슈웅!
마법사는 멈추지 않고 주먹을 날렸다.
한 방 한 방이 회복력 강한 트롤을 관통할 정도로 강력했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그 자리에서 눈을 감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유피테르는 단 한 대도 맞지 않았다. 오히려 그게 마법사를 불타오르게 만들었다.
“그만하는 게 어때요?”
“그 목소리… 어디서 들은 거 같은데. 에이 몰라. 그냥 때려눕힌 후에 묻지 뭐.”
참다못한 유피테르가 한 마디 날려도 듣지도 않았다.
반지 아티팩트의 힘을 빌어 천칭의 목소리를 내고 있지만, 그런 건 신경 쓰지 않는 것만 같았다.
“이렇게 즐거운 상대를 만났는데 가만히 있으라고? 날 이렇게 만든 건 네 탓이니. 받아달라고!”
헤라클레스 식 육체 강화법 ― 에리만토스
마법사는 그렇게 소리치더니 마법을 완성했다.
마법사들은 늘 완성된 마법을 적에게 날렸다. 그러나 이 마법사는 다른 방법을 택했다. 애초에 공격 마법이 아니라 육체를 강화하는 지원 마법이었다.
금방이라도 쏘아나갈 듯한 마나는 그대로 마법사의 육체에 스며들었다.
신기한 건, 이전보다 그의 기세가 줄었다는 거였다.
‘후우…. 요즈음 제대로 계획대로 되는 일이 없는 거 같은데, 착각인가’
더는 싸움을 피할 수 없을 것 같아, 유피테르도 생각을 바꾸었다.
적이 온갖 준비를 하고서 달려드는데 가만히 있는 건 멍청한 짓이었다. 평화라는 건 그걸 지킬만한 힘이 있어야 유지할 수 있었으니까.
천칭의 역할을 하고 있었기에, 얼음 마법은 사용할 수 없었다. 그래도 일단 거리를 더 벌려야만 했다.
헤라클레스 가문의 사람들은 시에라의 검사들과 유사한 면이 많았으니.
“덤비세요.”
육체 강화법을 이용해 거리를 벌린 유피테르가 손가락을 까딱였다.
“좋지. 좋아. 이런 불타오르는 분위기가 제일 좋다고!”
마법사는 소리를 지르며 땅을 박찼다.
고작 그것뿐인데도 한 걸음 만에 유피테르가 만든 거리를 따라잡았다.
‘역시 원조는 못 이기겠군. 근육이 많을수록 강해지는 마법이라니 이게 진리를 탐구하는 마법사의 생각이 맞긴 한가.’
유피테르가 사용하는 메르카르트는 이 마법사의 원리를 다르게 해석한 것에 불과했다. 뛰어난 재능으로 단점을 드러내지 않았으나, 오리지날 앞에서는 한계가 명확했다.
“이걸 보고도 놀라지 않는다니. 역시, 그 가면을 부수고 얼굴을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