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한 발 남았다(5)
* * *
시무르크의 말은 기사들의 용기를 꺾어버리기에 충분했다.
무인으로서 그가 이룬 경지는 존경받아 마땅했으니까.
평생 검에만 몰두해도 시무르크의 옷자락조차 잡지 못하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일국의 재상이면서도 최강의 반열에 오른 그를 이렇게 불렀다.
철벽의 시무르크
그건 검의 길을 걷는 자들이라면 몰라서는 안 되는 칭호 중 하나였다.
하지만, 그의 명성도 유피테르에게는 닿지 않았다.
“조디악을 불러올 방법은 내가 안다.”
“헛소리 마라. 조디악은 일개 마법사가 오고 가라 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본 적도 없는 젊은 마법사가 반말해도 시무르크는 끄덕하지 않았다. 저런 저급한 도발에 넘어가기에는 재상으로서 보고 들은 게 너무나도 많았다.
화를 내는 대신 유피테르의 말에 의구심을 표했다.
12명, 아니 11명만 남은 조디악들은 나사 하나 빠진 듯한 태도로 유명했다.
좋게 말해서 최강의 마도사였을 뿐, 사고뭉치에 불과했다. 종잡을 수 없는 성격과 행동에는 세아니아의 마법사들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조디악을 확실히 제어할 고삐를 쥐는 자는 ‘천칭’이 유일했다.
“그만. 이 자를 소개하도록 하지. 내 호위를 맡은 유피테르다.”
시무르크가 유피테르를 노려보자 세이라 공주가 직접 나서 중재했다. 검사들의 세상에 난입한 마법사를 인정시키는 건 어디까지나 그녀의 몫이었으니.
“오오….”
“마족을 물리쳤다는 그 마법사인가?”
“평범한 마법사가 아니라고는 했지만, 저런 외모를 지닌 자일 줄이야.”
“저런 자를 포섭하시다니 보기보다 능력이 좋으셨군.”
유피테르라는 이름은 시에라 귀족들 사이에서 유명해진 지 오래였다. 황제를 거의 구할 뻔한 데다 마족을 몰아낸 장본인이었기 때문이었다.
차기 황제에게 잘 보여야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런 중요한 정보를 놓치는 건 바보나 하는 짓이었다.
“이 험한 시기에 검사가 아닌 마법사를 호위로 두다니 제정신이십니까? 공주님 생각을 바꿔 주시옵소서!”
“저자가 마족을 불러들인 자일지도 모르지 않사옵니까.”
“그렇사옵니다.”
파날 파에 속한 귀족들은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어떻게든 세이라 공주의 꼬투리를 잡으려 했는데, 먼저 약점을 보여주니 말해주니 고마웠다.
‘용의 자식이라고 무조건 용이라는 법은 없어. 당신은 이무기에 불과해. 세이라 공주.’
파벌의 중심인 파날은 손으로 입을 가리고서는 음흉하게 웃었다.
나름대로 재능이 있는 것 같기는 했다. 하지만, 어린 나이에서 오는 경험 부족을 극복해내지는 못했다.
시에라 제국을 이끌어가기에는 정치적 감각이 너무 부족했다.
당장, 저 은발 마법사를 호위로 두는 것부터가 그랬다.
검사와 마법사의 관계는 그리 좋지 않았다. 지나가다 부딪치는 것만으로도 큰 싸움으로 이어지곤 했다. 쏟아지는 눈살을 이기지 못해 마법사들은 시에라에 놀러 오는 걸 포기할 정도였다.
이 내용이 제국민들에게 알려지면 어떤 반향을 불러일으킬지 벌써 궁금했다.
세이라 공주를 관찰하던 파날의 시선은 그 옆의 시무르크에게로 이동했다.
‘그에 비해 시무르크 님은 모두를 끌고 갈 강한 카리스마가 지니셨다.’
정치왕이라고 불릴 정도로 뛰어난 감각은 시무르크가 숨긴 날개를 찾아냈다.
사실,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시무르크 정도의 거목(居木)은 가만히 있어도 눈이 가는 그런 매력을 뿜어냈으니까.
꿀벌이 향기로운 꽃을 찾아가는 것처럼.
“유피테르가 델포이 아카데미의 교수라고 해도?”
기세에서 밀린다고 생각한 세이라 공주는 다른 카드를 꺼내 들었다.
“델포이 아카데미라 그건 좀 놀랍습니다. 꽤 젊은 마법사인 것 같은데.”
“아카데미생도 아니고 교수라면 뛰어난 실력을 갖춘 게 이해가 됩니다.”
델포이 아카데미라는 말에 몇몇 귀족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시에라 제국에서도 교류전은 흥미진진한 이야깃거리였다.
비교적 열세인 검술이 마법을 뛰어넘을지도 모르는 대결의 장이었으니. 실제로, 마법사를 상대하는 검술들은 대부분 마블링에서 완성되고는 했다.
시에라의 검사들은 다양한 아카데미 중 델포이에 가장 높은 점수를 주었다.
‘마법’에 의존하지 않고 ‘강함’을 추구하는 곳이었으니까.
“쯧. 델포이 출신이라면 적어도 이상한 짓은 안 하겠군.”
파날은 마음에 없는 소리를 하며 마지못해 동의했다.
계획을 위해서라면 패배의 쓴잔도 웃으면서 넘길 수 있었다. 잠시의 고통이 더 큰 행복을 가져올 게 명백히 보였다.
“시무르크, 당신도 유피테르를 호위로 두는 데 동의해?”
“그렇습니다. 그 정도의 강자가 공주님 곁을 지켜준다면 더할 나위 없습니다.”
“좋아. 그러면 조디악의 문제는 유피테르에게 맡기도록 하지. 그가 잘해줄 거라 믿자고.”
2인자이자 검사들의 우상인 시무르크가 인정하자 세이라 공주는 조디악 문제의 끝을 선언했다.
그러나 문제는 완전히 끝나지 않았다.
시간이 문제였다.
유피테르가 조디악을 불러낼 수단을 보유하고 있더라도, 바로 가능할 리는 없었다.
조디악은 상종할 수 없을 정도로 마이페이스인 자들이었으니. 오크의 대군을 완전히 물리치지는 못하더라도 최대한 시간을 끌어야 했다.
“조디악이 올 때까지 어떤 식으로 버티면 좋겠어? 어떤 의견이라도 괜찮으니 말해 봐.”
세이라 공주의 질문에 아무도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그럴듯한 전쟁 한 번을 겪어보지 않은 세대였기에.
몬스터를 사냥하는 것과 몬스터의 대군을 상대하는 법은 완전히 달랐다. 썩어빠져 더 내려갈 곳이 없는 귀족들이라도 그 정도는 알았다.
그때, 한 늙은 귀족이 세이라 공주에게 물었다.
“공주님.”
“닐라크인가. 자네라면 좋은 의견을 기대해봐도 되겠지?”
닐라크.
그는 선황의 충신이자 꽤 이름이 알려진 검사였다. 황제와 죽마고우이기까지 해서 호위 검사 자리까지 올라갔었다.
그뿐만 아니라 탁월한 전략가로 이름을 떨쳤다. 그래서 천검 학원에서 전략·전술 분야를 담당하는 중이었다.
“하나 물어보고 싶습니다만.”
“얼마든지.”
“오크의 대군은 방금 보여주신 그 방향 하나뿐입니까?”
“내가 파악한 바로는 그래. 내가 근무하던 국경 쪽으로만 몰려들고 있어.”
“그렇습니까.”
잠시 생각에 잠겼던 닐라크는 망설임 없이 한 가지 의견을 내놓았다.
“일단 이름있는 검사들을 최대한 모아서 수성전을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공성전이라는 건 어디까지나 지키는 편에게 유리한 싸움입니다. 특히, 지금처럼 마법이 없을 때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제아무리 몬스터들이라고 해도 다르지는 않을 겁니다.”
“나쁘지는 않네.”
세이라 공주는 닐라크의 말에 공감했다.
애초에 시에라 제국이 압도적으로 불리한 상황이었다.
수적으로도 열세인 건 물론, 마족이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조차 가늠이 되지 않았다.
무엇 하나 확실히 정해지지 않은 싸움.
공격은 최선의 방어라고 해도 지금만큼은 다른 수가 보이지를 않았다.
“수성전이 더 쉽다는 건 모두가 아는 상식이 아닙니까?”
“닐라크 님 다우신 탁월한 전략이십니다! 천검 학원의 검사들은 좋은 스승을 만나서 부럽습니다.”
“지능이 떨어지는 오크니 더 쉬울 수도 있습니다.”
“그 말이 맞습니다. 예전에 오크 토벌을 해본 적 있었습니다. 제 날카로운 검술에 두 동강이 나버렸지만, 말입니다, 하하하하!”
가지고 있는 패를 최대한 활용한 작전에 귀족들이 반색했다.
그러나 그것도 찰나의 행복일 뿐이었다.
“그러면 어떤 검사들을 보내는 게 좋겠나? 실력이 어느 정도 검증된 자들이 낫지 않나?”
시에라 공주의 말에 누구도 선뜻 나서지 못했다.
그녀의 말속에 숨겨진 뜻을 읽지 못하는 순진한 귀족은 이 자리에 오지 않았으니까.
“저희 가문이 키우는 정예들을 보내겠습니다. 그러면 만족하실는지요?”
시무르크가 강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단지 그것뿐인데도 회의실의 분위기가 완벽히 바뀌었다.
입을 꾹 다물고 눈치만 보던 귀족들이 가진 패를 하나둘씩 공개하기 시작했다. 거대한 흐름 속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해 뇌 근육을 끝까지 쥐어짜 냈다.
“저희 가문에서는 검사들을 차출하겠습니다. 제국의 위기야말로 충성을 보여줄 시기 아닙니까?”
“검사는 부족하지만, 식량을 준비하겠습니다. 때마침 모아둔 것들이 있습니다.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저희는 무구를….”
귀족들이 하나가 되어가고 있었지만, 세이라 공주는 찝찝한 기분이었다.
‘어째서 날 도와주는 거지 시무르크?’
결정적인 순간마다 시무르크는 자신을 도왔다.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그가 황제의 자리를 노리고 있다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그러나 오늘 본 그의 행동은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시무르크의 속마음을 좀 더 파악할 시간이 필요했다.
어떤 식으로 그와 단둘이 고민하다가 문득 아버지가 했던 방법이 떠올랐다.
일국의 황제는 기밀 사항을 재상과 둘이서 확정하고는 했다. 다른 곳에 정보가 샐 확률이 적어 늘 그런 식이었다.
‘아버지 한 번만 도와주세요.’
세이라 공주는 아버지를 생각하며 생각을 그대로 입으로 옮겼다.
“알겠네. 자세한 사항은 시무르크 경과 둘이서 정하겠네. 방향이 확정되면 알려주겠네. 오늘 회의는 여기서 끝내도록 하지. 수고했네.”
세이라 공주는 말을 끝낸 후 시무르크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생각을 읽기라도 했는지, 이미 자리를 정리한 후였다.
“가시지요. 공주님.”
“좋아.”
세이라가 제일 먼저 방을 떠났고, 곧바로 시무르크가 그 뒤를 따랐다.
1인자와 2인자가 없어진 상황에서 유피테르는 자신의 엄니를 유감없이 드러냈다.
“내가 공주님의 호위를 맡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 자가 있나?”
압도적이다 못해 폭력적인 마나가 휘몰아치자 귀족들은 숨을 삼켰다.
“자, 자네는 마족인가!”
“내가 마족이었으면 세이라 공주가 없을 때 너희들을 모두 죽였겠지. 안 그래?”
“뭐, 확실히….”
“마족은 사람의 마음속 약한 부분을 파고든다. 이 말을 명심해. 세이라에게 피해가 간다면 가만히 두지 않겠다.”
* * *
방에서 나간 세이라 공주는 시무르크를 집무실로 초대했다.
유피테르는 모습을 감추고서 상황을 지켜보는 중이었다. 물론, 오흐트도 옆에 있었다.
만약 저자가 딴마음을 품었을 때 가장 필요한 건 치유사였으니까.
오크의 침공에 대항하는 이야기는 재미가 없었는지 오흐트는 따분한 표정을 지으며 하품했다. 그녀의 입장에서 오크든 하이 오크든 솔직히 거기서 거기였다.
오흐트는 정신을 차리기 위해 유피테르에게 작게 속삭였다.
“마스터.”
“무슨 일이지 오흐트?”
“정말로 조디악을 부를 방법을 알고 있는 거야?”
“너에게서 그런 바보 같은 질문이 나올 줄은…. 아니다. 모르지는 않았네.”
“마스터는 바보!”
“바보는 내가 아니라 넌데. 바실리가 어떤 이름으로 불렸었는지 잊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