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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도 포기한 대공자-192화 (192/265)
  • 아직 한 발 남았다(4)

    * * *

    “고, 고, 고, 고, 공주 전하?”

    “어찌 그런 사악한 비술에 몸을 맡기시옵니까! 그러고도 자랑스러운 시에라 제국의….”

    세이라 공주의 당당하고도 늠름한 자태에 귀족들은 어쩔 줄 모르며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평소 보여주던 허영심은 저 멀리 사라져 티끌조차 보이지 않았다. 맹수 앞에서 살아남기 위해 오들오들 떠는 쥐 떼들과 하나도 다르지 않아 보였다.

    ‘하찮아. 이것들이 시에라를 지탱하는 기둥들이라고?’

    온몸을 휘감는 암담함에 세이라 공주는 눈을 감았다.

    시야가 사라지자, 생각이 한층 더 깊어졌다. 아무런 방해 없이 귀족들을 하나하나 판단할 수 있었다.

    마족을 격퇴한 유피테르가 곁에 있으니 그 무엇도 걱정되지 않았다.

    ‘시에라 제국은 기사들의 혼을 이은 제국이야. 그 바탕에 있는 게 귀족들이고 그런데도 이런 모습이라니.’

    왕에게 충성하고 제국민들을 보호한다.

    시에라는 이런 기사 왕국의 정통을 그대로 이은 제국이었다.

    천혜의 지형의 도움으로 대륙 전쟁에서 적은 피해만 보았기에 가능했다.

    이건 어디까지나 상대적으로 괜찮았단 말이었다.

    대륙 전쟁 시기에는 초월자들이 날뛰었으니까. 살아남은 이들은 폐허가 되지 않은 것만으로도 감사해하며 제국을 세웠다.

    그러나 시간이 흐름 지금, 이 기사도를 잘 지키고 있는 건 시에라가 아니라 리투아 제국이었다.

    세이라 공주는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그걸 본 귀족 중 한 명이 용기 있게 질문했다.

    “대체 왜 이런 밤에 비상소집을 거신 겁니까.”

    달이 뜨고도 한참 지난 새벽

    이미 기사로서의 마음가짐을 잃어버린 자들에게는 잠에 취해있는 시간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갑자기 비상소집을 걸고, 또 그 이유조차 알려주지 않아 불만이 더 커질 수밖에 없었다.

    “정말로 짐작이 가는 데가 없나?”

    세이라 공주가 조용히 물었다.

    고작 한마디를 던졌는데 귀족들은 기다렸다는 듯 한마디씩 말했다.

    “전 황제 폐하께서도 비상소집은 잘 걸지 않으셨사옵니다.”

    “맞습니다. 비상소집은 반란이나 적국이 전쟁을 선포했을 때 정도만 사용하는 것이 아닙니까?”

    “무슨 일인지는 알려주셨어야지요. 저희는 그렇게 한가한 사람들이 아니옵니다.”

    “애초에 대리에 불과한 공주님께서 이 회의를 주관할 수는 있으신 겁니까?”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바꾸는 귀족들의 모습에 환멸을 느꼈다. 굳이 마족이 들어오지 않았어도 시에라 제국의 미래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새카맸다.

    “서로 이야기를 맞출 시간은 충분했나 보네? 아니, 내가 모르는 무슨 신호라도 오가기라도 한 걸까?”

    “그, 그게 무슨 소리옵니까!”

    “저희는 단지 시에라 제국의 정통성을 지키고자 하는 것일 뿐입니다.”

    세이라 공주의 도발에 귀족들은 쉽게 넘어오지 않았다. 표정을 관리하며 어떻게든 끝까지 잡아뗐다.

    ‘이러다가는 끝이 없겠군. 오크 군세가 다가오는 걸 아무도 눈치를 채지 못한 건가?’

    돌아가는 상황을 유심히 지켜보던 유피테르는 답답함에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느 나라나 파벌이 만들어져 서로 싸우기는 했다.

    창조신 레아를 섬기는 성국 크레이타마저 그랬으니 다른 제국은 두말하면 입이 아팠다. 아니, 애초부터 이렇게 되는 게 운명이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건 도가 심했다.

    능력이 없는 자들끼리의 파벌 싸움은 멸망으로 향하는 지름길에 불과했다.

    “지금 내 권위에 대해 도전하는….”

    꾸욱―

    유피테르가 어깨를 슬며시 누르자 세이라는 말을 하다 그만두고서는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유피테르의 미소가 그대로 눈에 들어왔다.

    지나치게 아름다운 얼굴에 정신이 아찔해졌지만, 이내 그가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알아챘다.

    자신에게 맡겨달라.

    유피테르는 그런 신호를 보내오고 있었다.

    웃는 얼굴 속에서 모든 것을 집어삼킬 분노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세이라 공주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어떤 행동을 할지 조금 기대감에 부풀었다.

    “고명하신 시에라 제국의 귀족분들 안녕하십니까?”

    자리가 자리였고, 세이라 공주를 대신하고 있기에 유피테르는 말을 높였다.

    “썩 꺼져라! 마법사놈.”

    “더러운 마법사 놈이 지금 어딜.”

    “퉤. 오늘 잠은 다 잤군. 세상이 많이 좋아졌어! 마법사가 시에라에서 숨을 쉬다니.”

    유피테르는 누가 보아도 마법사라고 생각하는 차림을 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델포이 아카데미 교수의 복장은 아니었다. 앙심을 품은 시에라의 귀족들이 델포이에 복수할 수도 있었기에.

    그런 허접한 시도에 델포이 아카데미가 무너질 리는 없었지만, 처음부터 안전한 길을 택했다.

    그 결과 전형적인 귀족 집안의 차림새를 하게 되었으나, 흥분한 시에라 귀족들의 눈에 그런 건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예상과 한 치도 다르지 않은 반응에 유피테르는 씨익 웃으며 품속에서 영상 구슬을 하나 꺼냈다.

    “뭐. 마법사를 싫어하시는 마음은 알겠습니다만. 이걸 보고 나서 이야기하시죠.”

    영상 구슬을 테이블에 올려놓은 후, 푸른 마나를 이용해 작동시켰다.

    구슬은 큰 소리를 내며 테이블 중앙에 시에라 제국이 처한 현실을 그려내기 시작했다.

    저벅저벅!

    오크 대군이 어디론가 행군 중이었다.

    평범한 오크만 있는 게 아니었다. 오크 중에서도 매섭고 복수심이 강하다는 하이 오크가 곳곳에서 지휘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하이 엘프가 엘프 왕의 핏줄인 것처럼 하이 오크는 오크 로드의 핏줄이었다.

    좀 더 몸집이 크고 잘 벼린 갑옷과 무기로 치창하고 있어 몰라볼 수가 없었다.

    “이걸 우리에게 보여주는 저의가 뭐냐!”

    “감히, 우리를 협박하는 것이냐? 네놈은 마법사가 아니라 마족인 거냐? 스스로 정체를 밝히다니.”

    “끝까지 영상을 보시고서 말씀하시죠? 아마, 그 말 후회하실 겁니다.”

    상황과 하나도 이어지지 않는 뜬금없는 영상에 시에라 귀족들은 거세게 반발했다.

    그중에서는 유피테르가 마족이 아니냐고 매도하는 자까지 있었다.

    평범한 사람이었으면 길길이 날뛸 모욕적인 표현에도 유피테르는 조용히 미소 지을 뿐이었다.

    은근히 느껴지는 강력한 카리스마에 귀족들은 슬그머니 시선을 돌려 영상에 집중했다. 유피테르를 더 쳐다보다가는 화장실에 가고 싶어질 게 분명했기에.

    “대체 뭘 보라는 거지? 고작 이런 것에 허비할 정도로 시간이 많지 않다만.”

    “하하하!. 오크에게 기사도 정신이라도 가르쳐 주라는 거 아닐까 싶습니다.”

    “마, 말도 안 돼. 오크의 대군이 있는 게 저곳이라고?”

    “저기가 어딘지 알고 있는가?”

    “파날 경. 저긴 바로 시에라의 국경입니다. 제가 직접 가보았기가 확실합니다.”

    “혹시 착각한 거 아닌가? 산속이라면 비슷한 곳이 많을 테니.”

    “지금 제 기억을 의심하는 겁니까? 아무리 파날 경이라도 그런 모욕은 참을 수 없습니다.”

    “이 정도 수의 오크가 움직이면 시무르크 님이 모를 리가 없네!”

    오크의 대군이 향하고 있는 곳이 시에라 제국이라고 판명되자, 한 편이었던 귀족들이 갈라졌다.

    파날을 중심으로 하는 세력은 오크의 영상이 날조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나마 기사로 근무했던 귀족들은 유피테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깨닫고 낯빛이 어두워졌다.

    저 정도의 오크를 막아낼 힘이 지금의 시에라에 남아 있을지 의문이었으니.

    탕탕탕!

    세이라 공주가 책상을 세게 쳤다.

    두 파벌로 나뉜 귀족들의 싸움이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자네들을 부른 건 이 오크의 대군을 어떻게 막을지에 대해 의논하기 위해서였다. 저 영상 구슬이 거짓이 아니라는 건 내 명예를 걸고 약속하지.”

    그녀의 말에 귀족들이 모두 입을 다물었다.

    황실의 핏줄이 명예까지 걸었는데 반발할 정도로 간 큰 자는 없었다.

    불만을 토로할 수는 있지만, 이건 완전히 다른 상황이었다. 여기서 함부로 말했다가는 그 자리에서 목이 잘려도 이상하지 않았다.

    “오크가 국경까지 도착하는 데 얼마나 걸립니까?”

    기사파였던 귀족 중 하나가 손을 들고 물었다.

    “3일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고 수비대가 보고하더군.”

    생각보다 더 촉박한 시간에 기사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정보를 얻으면 얻을수록 상황이 나빠졌다.

    아무리 셈을 해봐도 시에라가 살아남는 시나리오가 그려지지 않았다.

    기사가 어두운 미래에 고개를 떨구자 그 틈으로 놓치지 않고 파날이 끼어들었다.

    “대체 국경수비대는 뭘 한 건가! 조금 더 미리미리 확인해야지. 3일이라는 시간 동안 뭘 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들에게로 가는 물자를 자른 건 다름 아닌 경의 의견이었을 텐데?”

    세이라 공주가 그 말에 날카롭게 반응했다.

    실제로 국경수비대 대장으로 있을 때, 예산이 부족해서 교섭해야만 했다. 그걸로도 부족해 사비를 털어 부족한 부분을 충당하기도 했다.

    도둑이 제 발 저리듯 침묵한 파날을 뒤로하고 의견이 계속해서 쏟아져 나왔다.

    “다른 제국의 힘을 빌리는 건 어떻습니까? 마법사라면 이곳에 바로 도착할 겁니다.”

    “지금 더러운 마법사의 힘을 빌리자는 거야?”

    “상황이 이런데 고작 기사의 순수성을 지키려고 하는 겁니까? 제국민들이 불쌍하지도 않습니까.”

    “그렇게 착한 척하니 즐거워?”

    다시 한번 기사파와 파날의 세력들이 맞붙었다.

    완전하게 다른 성향을 지닌 두 집단이기에 점점 더 언성이 높아졌고 분위기가 위험해졌다.

    “그만.”

    싸움을 중재시킨 건 놀랍게도 시무르크였다.

    “파날. 국가의 위기 상황에 그런 식으로 편을 가르는 건 도움이 안 된다.”

    “죄, 죄송합니다.”

    파날을 타이르자 그를 따르는 세력들도 일제히 머리를 숙였다. 한쪽을 진정시킨 시무르크는 낮은 목소리로 기사파에게로 향했다.

    “자네들의 마음도 이해하지만, 마법사들이라고 해도 바로 이곳으로 올 수는 없네.”

    “어째서입니까!”

    “그들도 인간이니까. 무의미한 피를 흘리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이네.”

    대륙 전쟁 이후에 세아니아 대륙은 평화로웠다.

    당연히 다양한 제국이 서로 힘을 합쳐 위기를 이겨내는 경험은 전무했다. 그렇기에 마법사를 빌려주는 걸 꺼리는 경향이 있었다.

    마법사들은 곧 군사력이나 다름없었으니까.

    “그러면 조디악의 마도사에게 부탁하면 되는 것 아닙니까!”

    “맞습니다. 조디악들은 이런 경우를 대비해서 만들어진 기구이지 않습니까?”

    파날의 세력들과 다르게 기사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 노력은 빛을 발해 다른 방법을 찾아내고야 말았다.

    “그건 나도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이군.”

    시무르크는 기사들의 의견을 부정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그 모습을 본 기사파는 기세가 등등해졌다. 존경하는 시무르크에게 인정받았으니 어깨가 올라갈 만 했다.

    “그래서 여기 조디악을 부를 방법을 아는 자가 있나? 있다면 손을 들어보게나.”

    “….”

    이어지는 그의 말에 기사들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조디악의 전설적인 활약은 유명했으나, 어떻게 불러야 그들이 오는지까지는 알려지지 않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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