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도 포기한 대공자-191화 (191/265)
  • 아직 한 발 남았다(3)

    * * *

    아버지의 복수.

    확고한 목표를 설정한 이후, 세이라 공주의 행보는 거침이 없었다.

    “앤. 내 쪽으로 붙은 귀족은 몇 명이나 되지? 앞으로 남은 수는?”

    “이 수치는 이상해. 세금을 어디론가 빼돌리고 있다는 증거야. 그대로 잡아 와.”

    “국경에 주둔한 경비대와 기사단에게 마법 구슬을 지급해. 이상한 조짐이 보이면 바로 내게로 전하라고 덧붙이고.”

    세이라 공주가 숨겨둔 발톱을 꺼내자, 귀족들이 강력하게 반발했다.

    키마라 재상이 살아있을 때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았다. 황제를 적절한 선에서 멈추게 하고, 귀족들의 의견도 적극적으로 받아주었으니까.

    애초에 시에라 제국을 안부터 썩게 만드는 게 목적이었다. 탐욕스러운 귀족들을 도와주는 게 당연했다.

    “후우…. 일단 급한 불은 다 끈 건가.”

    세이라 공주는 눈을 비비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국경에서 했던 경험이 있었기에, 자신 있게 집무를 보겠다고 다짐했었다.

    하지만, 황제의 일은 해도 해도 끝이 보이지가 않았다.

    그 정도야 어렵지 않게 해낼 수 있을 거라고 말한 과거의 자신을 한 대 쥐어박고 싶을 정도로.

    “유피테르. 거기 있어?”

    “그래.”

    세이라 공주의 옆에서 유피테르가 인기척을 냈다.

    무슨 수를 쓴 건지 여전히 모습은 보이지 않았으나, 확실한 존재감이 느껴졌다.

    그가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고요해졌다.

    ‘내가 미쳤지.’

    공주는 머리를 양옆으로 흔들었다. 그러자 시에라 제국 특유의 갈색 머리카락이 이리저리 휘날렸다.

    황성으로 돌아온 지 이제 막 일주일이 지난 참이었다.

    신분이 확실하다고 해도 남자의 옆에서 편안한 마음이 드는 건 이상했다.

    “어디 아픈가? 역시, 내가 아니라 그림자들 중 한 명을 호위로 쓰는 게 나은 것 같은데.”

    유피테르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보통 저런 식으로 머리를 흔드는 건 두통이 있을 때 정도였으니까.

    이는 전적으로 오해였다.

    하지만, 유피테르라고 하더라도 모든 이들의 감정과 생각을 읽어내는 건 무리였다.

    “앤도 동의한 일이야. 게다가 마족이 나타났을 때 도움이 되는 건 너밖에 없어.”

    유피테르가 이곳에 남아 있는 건 세이라 공주의 호위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림자들이나 검사들로는 마족에 대항하지 못했다. 실적이 있는 유피테르가 적임이라고 본 것이다.

    그림자의 수장으로 돌아온 앤도 유피테르나 오흐트가 역할을 맡아주기를 원했다.

    공주가 안전해야 그들이 마음을 놓고 정보를 수집할 수 있었으니.

    귀족들은 유피테르를 호위로 둔다는 말에 강력하게 반발했다.

    “공주님! 그런 출신도 불분명한 마법사 따위를 호위로 두시다니. 천부당만부당한 일이옵니다!”

    “통촉하여주시옵소서!”

    집무실에 찾아온 귀족들은 유피테르 대신 천검 학원 출신의 강자들을 여럿 추천했다. 반대를 위한 반대가 아니라는 걸 증명하려는 것처럼.

    ‘다 자기들이 지원한 검사들이잖아?’

    명단을 살펴보자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졌다.

    귀족들이 추천한 검사들은 하나같이 강자가 아니었다. 그저 각 가문이 공들여서 키운 자들이었다.

    황실에 충성한다기보다는 귀족들의 사병에 가까웠다. 무언가 다른 목적을 가지고 호위를 맡는다고 보는 게 맞았다.

    돈은 충성보다 늘 가까이 있었다.

    “알았어. 일단 후보자들의 실력 좀 보게 내일까지 이곳으로 불러와.”

    “알겠사옵니다.”

    말해봤자 귀족들이 귀담아들을 리 없었다. 가장 큰 방해물을 치우고 싶다는 눈빛을 숨기지도 않았으니까.

    그래서 세이라 공주는 직접 후보자들을 시험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상대가 마족이라니! 이건 미친 짓이야. 나, 난 여기서 나가겠어!”

    “호위로는 저보다 제 뒤에 있는 분이 더 적합할 것 같습니다. 소인의 검술은 너무 패도적입니다.”

    “저, 저보다는 다른 분들이 하는 게.”

    공주의 목숨을 노리는 게 마족이라는 걸 듣자, 추천한 10명 정도의 검사들은 모두 줄행랑을 쳐버렸다. 그들은 강해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먹고 살기 위해 검을 배운 자들이었다.

    절차를 모두 마치자 남은 건 유피테르뿐이었다.

    “호위라면 오흐트만 있더라도 충분히….”

    유피테르는 왜 호위를 자신에게 맡겼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보통 황족의 호위는 강자가 맡는 게 상식이었다.

    그러나 지금처럼 온종일 함께할 때는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았다.

    “호위하는 게 싫은 거야? 그게 아니면 상대가 나라서 그런가?”

    “그런 건 아니야. 그냥 기분상의 문제다. 기분 상하게 했다면 미안하다.”

    자조적으로 웃는 세이라를 보며 유피테르는 입을 닫았다.

    호위를 맡은 게 싫지는 않았다.

    마족이 제일 먼저 노릴 목표 옆에 있을 수 있는 건 오히려 행운이었다. 유피테르의 목표는 어디까지나 마족을 사냥하는 것이었으니.

    게다가 시에라 제국이 모은 정보들은 모두 세이라 공주의 곁으로 모였다. 정보와 관찰이 사냥의 첫 시작점이라는 걸 고려하면 고마울 뿐이었다.

    ‘왜 나를 믿어주는지가 궁금했을 뿐이다.’

    세이라 공주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자신을 고평가했다.

    대체 어떻게 성국 해방 전선의 주인이 자신이라는 걸 아는지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 그걸 알기 위해 순순히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였었다.

    드워프를 도와주고 제국까지 위기에서 구해줬으니 당장 답을 알려달라고 하고 싶었다.

    그러나 상황이 좋지 못했다.

    세이라 공주는 어깨에는 제국에서 가장 무거운 짐이 올려져 있었다.

    마족의 등장으로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있는 상황에서 굳이 대답까지 바라지는 않았다.

    ‘미쳤어도 단단히 미쳤구나. 왜 이런 말을….’

    세이라는 세이라대로 붉어진 얼굴을 손으로 가렸다.

    유피테르와 이야기를 하다 보면 어느새인가 이런 주제로 이어지고는 했다.

    두 사람은 잠시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빼애애애애애앵!

    침묵을 깬 건 세이라 공주 옆에 올려져 있는 영상 보주였다.

    고막을 그대로 찢어버릴 것만 같은 새된 소리가 집무실을 그대로 집어삼켰다.

    앞으로 있을 위기를 미리 예견해주는 소리에 유피테르가 마법을 풀고 모습을 드러냈다.

    “세이라 공주.”

    “나도 알고 있다고. 벌써 움직임이 있을 줄이야. 귀족들이 어지간히 급했나 봐?”

    유피테르가 말하기도 전에 세이라 공주가 움직였다.

    영상 보주에 손을 얹자 빛을 내며 공중에 화면이 만들어졌다. 평범한 영상 보주가 아닌 시에라 제국이 특별 의뢰한 황실 전용의 아티팩트였기에 가능했다.

    “여기는 황제 대행인 세이라 공주다. 소속과 신분을 밝혀라.”

    “늦은 시간에 갑작스럽게 연락드려서 죄송합니다. 국경 수비대 대원 란드입니다.”

    “란드인가. 오랜만이군. 무슨 일이 일이지.”

    세이라 공주는 신분 확인 절차를 가볍게 뛰어넘었다.

    국경 수비대 대장으로 있었는데 부하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할 리 없었다.

    “그게…. 몬스터가 나타났습니다!”

    “귀족들이 거병한 게 아니라고? 몬스터의 종류와 수는 어느 정도야?”

    예상과는 다른 정보였으나 세이라 공주는 당황하지 않았다.

    곧바로 태도를 바꿔 상황을 좀 더 알기 위한 정보를 요구했다. 이 정도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파악하기가 힘들었다.

    “맞습니다. 국경 쪽으로 오크의 대군세가 진격하고 있습니다. 어림잡아도 수만 이상입니다.”

    “뭐…라고?”

    그러나 이번만큼은 평정심을 유지하지 못했다.

    오크가 수만이나 뭉쳐있는 건 대륙 전쟁 이후로 처음 발생한 일이었기에.

    오크는 고블린과 함께 가장 대중적인 몬스터이긴 했다.

    어디가 약점이며, 어떤 식의 행동 패턴을 보이는지 연구가 끝난 지 오래였다. 흔히 만날 수 있었기에 재료가 충분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폭력적일 정도의 번식력과 무리를 짓는 행동은 늘 주의해야만 했다. 하나일 땐 그리 위협이 되지 않았으나, 뭉치면 골치가 아파졌으니까.

    “어느 정도 후에 국경에 도착하는지 예상할 수 있나?”

    혼란에 빠져 어쩔 줄을 모르는 세이라 공주대신 유피테르가 물었다. 란드는 다른 사람이 말을 걸었는데도 막힘없이 보고를 계속했다.

    “순찰을 나간 대원의 말로는 3일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가. 계속 결과를 관찰하게. 이후 행동방침에 대해선 바로 하달하겠네.”

    “알겠습니다!”

    파지직!

    대화가 끝나자 세이라 공주는 힘없이 손을 뗐다. 그러자 영상 보주에 들어왔던 불빛이 사라졌다.

    그 후, 나지막한 목소리로 유피테르에게 물었다.

    “유피테르.”

    “왜 그러지?”

    “너는 마족들이 분명히 이걸로 끝나지 않을 거라고 했잖아. 이게 그거야?”

    “귀족들이라고 해도 몬스터를 움직일 방법은 없을 거다. 그렇게 생각하는 게 맞겠지.”

    몬스터를 부릴 수 있는 건 오직 마족들뿐이었다.

    마왕이나 공작급 마족을 제외하면 힘으로 지배하는 것에 불과했지만 말이다.

    이외에도 다른 방법이 있긴 했으나 그건 실전된 방법이었다. 현재 마법사들에게는 분명히 불가능했으며, 시에라에는 마법사가 거의 없었다.

    “도와줄 거지?”

    “거절한다는 선택지가 있다면 도망가고 싶은데.”

    “그런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지 말고.”

    “들켰나.”

    유피테르의 가벼운 장난에 세이라 공주의 눈에 이성의 빛이 돌아왔다.

    “거기 누구 있어?”

    “예. 있습니다.”

    세이라의 부름에 시종 중 하나가 대답했다.

    “귀족 회의를 소집해줘. 위급 상황이야.”

    “예. 알겠습니다.”

    * * *

    “이 밤중에 우리를 부르다니. 정녕 황제가 되었는 줄 아는 거요 뭐요?”

    “그러게나 말입니다. 정작 황제도 우리를 이렇게 턱짓으로 부리지는 않았단 말압니다!”

    오밤중에 강제로 모이게 된 주요 귀족들은 하나같이 불만을 터트렸다. 무슨 일인지조차 알려주지 않았으니,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그 중심에는 정치왕이라고 불리는 파날이 있었다.

    “그렇소. 우리 역시 황제만큼 시에라를 지탱하는 기둥들이오. 공주님께서 오시면 한마디 합시다.”

    “맞소 맞소!”

    “그렇게 하십시다!”

    파날의 말솜씨는 좋은 양념이 되어 분위기를 끌어 올렸다. 중립을 지키는 귀족들도 천천히 파날의 말에 빠져들어 하나가 되었다.

    모두가 씩씩대며 세이라 공주의 뒷말을 하고 있는 그 순간.

    번쩍!

    “뭐가 그렇게 불만이실까.”

    세이라 공주와 유피테르가 투명화 마법을 풀고 모습을 드러냈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세이라 공주의 모습에 모든 귀족이 얼어붙었다.

    “왜? 내가 오면 한마디씩 해준다며. 해봐. 용서해줄 테니까. 충언도 잘 들어줘야 좋은 황제가 된다고 누가 그러던데.”

    세이라 공주는 웃으며 말했지만, 결코 훈훈한 분위기가 아니었다.

    시종을 통해 귀족들은 소집한 세이라 공주는 곧바로 대회의실로 향했다. 아무도 오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한 그녀는 유피테르의 도움을 받아 존재감을 지웠다.

    귀족들의 숨겨진 속마음을 확실히 알 기회를 놓칠 생각은 없었기에.

    ‘네놈들이 범인이 아니라고 해도 상관없어. 일할 시간이야. 욕심만 많은 돼지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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