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도 포기한 대공자-190화 (190/265)
  • 아직 한 발 남았다(2)

    * * *

    세이라 공주의 말에 집무실의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고대 병기.

    이름만 들어도 위험한 냄새가 지독하게 났다.

    마족만으로도 골치 아픈 상황에서 또 하나의 문제가 터지는 걸 그 누구도 바라지 않았다.

    모두가 숨을 죽이고 세이라 공주의 입이 열리기만을 기다리는 상황.

    유피테르가 침묵을 깼다.

    “고대 병기라면 대륙 시절의 것인가?”

    “맞아. 시에라 제국이 어떤 거로 유명한지는…. 더는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 같네.”

    시에라 제국의 역사를 설명하려던 세이라는 다른 이들의 표정을 보고서는 즉시 그만두었다.

    “고대 병기라고 해도 다양한 종류가 있어. 이곳에 있는 건 뭐지?”

    쓸데없는 말은 필요하지 않았다.

    지금 필요한 건 마족과 고대 병기에 대한 확실한 대책이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걸 알고 있었기에 유피테르는 어떻게? 라는 질문을 생략했다.

    “기사 제국에 가장 어울리는 병기가 뭐라고 생각해?”

    “질문을 질문으로 대답하는 거야? 그렇게 나오면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사라진다고.”

    “장난이니까. 그런 말은 하지 말아줘. 너희들이 없으면 시에라는 끝이니까. 이곳에 잠든 건 골렘이야.”

    “골렘…이라고?”

    유피테르는 귀를 의심했다.

    현재 대륙의 마법사들은 골렘 마법에 거리감을 느꼈다. 과거와 다른 마법 체계가 완성되었기 때문이었다.

    다양성이 장점인 상황인데 굳이 골렘 마법을 배우길 원하는 마법사는 없었다.

    “골렘이 고대 마법 중 하나라고 해도 마족이 노릴 정도야?”

    오흐트 역시 골렘이라는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골렘은 마법사의 방패라고 불릴 정도로 쓸모 있는 마법이긴 했다. 던전 마스터로도 종종 나올 정도로.

    게다가 어지간한 마법에는 면역이며 재료에 따라 특성까지 달라져 호평을 받았다.

    “하지만, 골렘은 느리고 둔해. 기동성이 올라간 현재 마법사들에게는 쓸모가 없을 텐데.”

    수많은 장점은 곧 단점이 되었다.

    방패가 될 정도로 육중한 몸을 지녔기에 움직임이 굼떴고, 재료도 무지막지 비쌌다. 어지간한 마법사는 꿈도 꾸지 못할 정도로.

    가장 저렴한 게 돌로만 만든 스톤 골렘이었는데 이건 간단한 마법을 조합하기만 해도 쉽게 공략할 수 있었다.

    드는 수고에 비한다면 그 결과물이 처참할 정도로 좋지 않았다. 고대 마법을 공부한 유피테르는 당연히 이 정보를 알고 있었기에 지적할 수 있었다.

    “확실히 골렘은 지금 사용하기에는 제약이 너무 많지.”

    세이라 공주는 그런 질문이 나올 줄 알았다는 듯 옅게 웃었다. 그리고서는 질문의 답변을 내놓았다.

    “하지만, 산만큼 거대하면서도 아다만다이트로 만들어졌다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

    “아다만다이트라고?”

    예상을 한창 뛰어넘는 말에 유피테르는 침음성을 삼켰다.

    아다만다이트는 미스릴처럼 드워프만이 다룰 줄 아는 신의 금속이었다.

    미스릴이 마나 흡수력이 높아 인기를 끌었다면 아다만다이트는 마나 자체를 거부했다. 두 금속은 마치 N극과 S극으로 이루어진 자석처럼 대척점에 있었다.

    마나를 무시하는 듯한 성능 덕에 아다만다이트는 미스릴보다 훨씬 더 비싼 값에 거래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워낙 적은 양만 생산되었기에 시장에 나오면 바로 사라질 정도로 인가를 끌었다.

    “그 골렘이 기사 제국의 마지막 패였겠군.”

    “맞아. 다만 마음에 걸리는 건, 왜 아버님이 이걸 모르는 척하신 것인지 모르겠다는 거야.”

    세이라 공주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황제는 무슨 생각을 하면서 마족에게 맞섰던 것일까?

    앤에게 당시 상황을 전해 들은 이후부터 이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깊은 안개에 뒤덮이려 하는 분위기를 끌어올린 건 역시나 오흐트였다.

    “당황하셔서 그런 걸 거야. 아무리 성군이시라고 해도 마족을 보는 건 무서우니까. 안 그래 마스터?”

    “그렇겠지. 마족은 그 존재감만으로도 공포를 주는 자들이니까.”

    “그랬으면 다행인데.”

    유피테르와 오흐트의 말에도 세이라는 여전히 신중하게 반응했다. 혹시라도 황제가 세운 계획을 어그러트릴까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공주님 한 말씀 올려도 되겠사옵니까.”

    세이라가 다시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리자 앤이 조심스럽게 나섰다. 한시가 급한 상황에서 리더가 흔들리면 될 일도 무너졌다.

    그런 일은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았다.

    “말해 봐. 앤.”

    “재상이 마족으로 변한 상황 이후부터 마족의 지배가 풀렸다고 생각되옵니다.”

    “그럼 더 말이 안 되잖아. 유피테르가 마족을 적대하는 걸 봤다면 힌트 정도는 줄 수 있는 거 아니야?”

    “아니요. 그게 폐하의 계획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게 무슨 헛소리야?”

    세이라 공주의 목소리는 점점 커졌다. 앤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짜증이 솟구쳤기에.

    당시의 상황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들었기에 의견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세이라 공주의 화를 식혀준 건 앤이 아니라 유피테르였다.

    “그 자리에 배신자가 있었다면, 이라는 가정인가.”

    조곤조곤했지만, 유피테르의 말에는 충분한 힘이 들어 있었다.

    “뭐라고?”

    “하나의 가능성에 불과하긴 하지만, 이 모든 게 황제의 작품이라고 가정해봐. 재상이 인간이 아니라는 걸 미리 알고 있던 거야.”

    “그럴 리 없어. 아버님께서는 완전히 예전과 달라진 모습이셨으니까. 딸인 내가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어!”

    베일 것만 같은 날카로운 말에도 유피테르는 잔잔한 호수처럼 평정심을 유지했다.

    그저 담백한 눈길로 세이라 공주를 쳐다보았을 뿐, 그 이상 말하지는 않았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한 오흐트가 한마디를 덧붙여주었다.

    “일단 한 번 해봐.”

    “마스터가 그런 거라면 무언가 생각이 있는 거니까 한 번 해봐 언니.”

    “후우…. 알았어. 알았다고.”

    세이라 공주는 마지 못해 가지고 있는 정보를 전부 버렸다.

    텅―하니 빈 머릿속에 유피테르가 말해준 가설 하나를 심어놓았다. 그 후, 최대한 황제처럼 생각하려 노력했다.

    황제는 사실 모든 걸 알고 있었다.

    황제는 키마라 재상이 인간이 아니라는 걸 처음부터 파악했다. 또, 시에라의 힘으로는 재상을 쫓아내는 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선택한 게 미친 척을 하는 거였다.

    ‘성군으로 소문난 이상 이상해지면 바로 대륙에 소문이 돌겠지.’

    그러면서도 변방에서 쉬고 싶다는 딸의 어리광을 단번에 허락했다.

    마족이 드워프와 연관해 사람들의 기억을 바꿔놓긴 했다. 그러나 그 결과 유피테르가 소문을 듣고 시에라에 도착했다.

    마족이 쳐놓은 장난질 덕에 유피테르는 자신과 만나게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시에라의 위기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게 되었다.

    ‘재상과 제국민들이 무차별적으로 습격당하는 상황에서 그림자의 수장이었던 앤도 자리를 비웠다. 대체 누굴 믿어야 하는지 어려운 상황이라면….’

    자신이 죽더라도 유피테르에게는 황실의 비밀을 속속들이 하는 세이라 공주가 남았다.

    영특하고 검에도 재능이 있는 그녀라면 분명히 자신의 계획을 눈치채줄 것이다.

    그렇다면 굳이 리스크를 높이는 것보다 조용히 희생하는 게 나았다. 괜히 마족과 배신자의 심기를 건드렸다가는 적을 제압하는 게 힘들어질 테니까.

    “마, 말도 안 돼.”

    편견을 버린 것뿐인데도, 모든 조각이 소름 끼치게 맞물려 들었다.

    그 사실에 세이라 공주는 전율했다.

    “나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어. 하지만, 이걸 보고는 생각이 달라졌다.”

    유피테르는 아공간에서 무언가를 꺼내 세이라 공주에게 던져주었다.

    “이건…?”

    “일기장. 아니, 유언장이라고 봐도 문제가 될 것이 없겠지. 한 번 읽어봐.”

    유언장이라는 말에 세이라 공주의 손이 덜덜 떨렸다. 황제가 이런 걸 남겼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기에.

    황제의 사적인 물건을 유피테르가 가지고 있는 것이 이상했다. 인간을 초월한 마법을 보여주었지만, 이건 다른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의문을 그대로 입에 담았다.

    “어째서 이걸 외부인인 유피테르, 네가 가지고 있는 거야? 앤이 줬다면 모를까.”

    “그거 비밀의 방에 있었거든.”

    세이라 공주의 말에 대답한 건 유피테르도 앤도 아니었다. 바로, 오흐트였다.

    “비밀의 방이라니? 그런 건 보고받은 적이 없는데.”

    “재상으로 위장했던 마족의 반응을 쫓다가 성에서 묘한 방을 찾았거든. 나중에 데려가 줄게.”

    “일단 너희들의 말을 믿어보도록 하지.”

    다른 방법이 없었다.

    유피테르와 오흐트를 의심하기 시작하면 끝도 없이 이어질 게 뻔했다. 일단 같은 인간이 맞는지부터 의문이었으니까.

    그래서 일단 황제의 일기장을 읽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리고서는 표지를 넘겨 그곳에 써있는 글씨에 시선을 집중했다.

    잠시 후,

    일기장을 전부 읽은 세이라 공주는 눈시울을 붉혔다.

    “네 말이 맞았네, 유피테르. 아버님께서는 모든 걸 다 알고 계셨어. 너무 대단하신 분이야.”

    “그래. 황제는 제국을 위해 한 몸을 희생했지. 비록,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았지만 말이지.”

    “누구도 모르는 게 아냐. 이제 내가, 너희들이 알잖아.”

    세이라 공주는 목이 메는지 잠시 목소리를 다듬었다. 황제의 죽음을 알았을 때보다 더욱 슬펐다.

    ‘아버님 이제야 깨달았어요. 당신이 얼마나 위대한 지배자였는지. 저는, 저는 아버지의 발끝도 따라갈 수 없겠네요.’

    모든 것이 착각이었다.

    이제는 따라잡았다고 생각했는데 황제는 저 멀리 앞에서 달려가는 중이었다. 자신이 본 건 그저 황제의 그림자에 불과했다.

    “정신 차려. 세이라 공주. 시에라를 구할 수 있는 건 이제 너뿐이니까. 제국민들을 모두 마족의 손아귀에 넘겨줄 생각이야? 황제가 이런 모습을 보면 좋아하겠어?”

    유피테르는 강하게 소리쳤다.

    이런 한심한 모습을 보고자 일기장을 넘겨준 게 아니었다.

    유피테르는 세이라가 분노하기를 원했다. 분노라는 감정은 잘만 쓰면 충분히 유용했으니까. 특히, 저렇게 헤매는 상황에서 분노는 만병통치약이었다.

    “맞아. 그랬지.”

    정신이 번쩍 들었다.

    황실의 핏줄을 진하게 이어받은 건 이제 자신뿐이었다. 이변이 없는 한 차기 황제의 자리는 그녀의 것이었다. 시에라를 대표하는 사람이 될텐데 이런 못난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었다.

    살아남은 자들이 죽은 자들을 위해서 할 수 있는 건 진혼곡만이 아니었다.

    피의 복수.

    마족과 시에라의 배신자들을 완전히 처단하면 죽은 이들도 조금은 기뻐할 것만 같았다. 이는 황제의 못다 한 꿈을 완성하는 거기도 했다.

    “내가 황제가 되겠어. 하지만, 그 전에. 마족과 배신자들을 모두 털어내야겠지. 유피테르, 오흐트 그리고 앤. 나를 도와주겠어?”

    굳게 결심한 표정으로 세이라 공주는 세 명에게 손을 내밀었다.

    “좋아. 마족은 나의 원수이기도 하니까.”

    “당연하지. 언니는 역시 그런 모습이 어울려.”

    “그림자는 늘 황실 정통 후계자의 편입니다. 공주님.”

    시에라 제국에 드리운 암운을 없애는 작업이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