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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도 포기한 대공자-189화 (189/265)
  • 아직 한 발 남았다(1)

    * * *

    다음 날,

    황제가 서거했다는 사실이 시에라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흐흐흑…. 황제 폐하 고이 잠드소서.”

    “하늘도 야속하시지. 좋으신 분을 이렇게 빨리 데려가고 싶으셨을까.”

    “원래. 나쁜 사람이 더 오래 산다고들 하잖아.”

    그를 성군으로 굳게 믿고 있던 자들은 울음을 터트리고야 말았다.

    낮은 세율과 다양한 구휼 정책으로 자신들을 위한 정책을 펼쳤던 황제를 너도나도 그리워했다.

    하지만, 모두가 황제의 죽음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건 아니었다. 황제의 새로운 정책으로 혜택을 받은 자들이 있었다면, 그 예외도 존재했으니까.

    “그럼 다음 황제는 누구래? 그걸 알아야 도망가든 말든 하지.”

    “쉿. 쉿. 너 그렇게 말하다가 경비대에 잡혀간다고. 황족 모욕죄는….”

    “알 게 뭐야. 난 나일 뿐이라고. 누구도 날 대신할 수는 없어.”

    “그러니까 지나가다 아무거나 주워 먹지 말랬지! 이 화상아. 너 때문에 내가 죽겠다.”

    “내가 뭘 주워 먹었다고 그래? 산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나처럼 행동한다고.”

    “넌 항상 그런 식이야.”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정책이란 처음부터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평민을 우선하는 정책을 시행하는 황제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시에라는 기사 제국의 후예들이 세운 국가였다. 자연히 황제와 기사들 사이에서의 ‘충’이 가장 중요했다. 충성의 대가가 기사 계급이 아닌 평민들에게만 향하자 불만이 터져 나오는 게 당연했다.

    그래서 황제가 죽자마자 최고 귀족 회의가 소집되었다.

    “눈엣가시 같던 황제가 드디어 죽었소. 다들 지금까지 잘 참아주었소.”

    전 재상이었던 시무르크가 회의의 시작을 알렸다.

    시에라도 마법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던 그는 키마라가 등장하자마자 좌천되었다. 귀족 중의 귀족인 그는 사사건건 황제와 대립했기에 놀라운 사실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귀족 회의를 주관할 정도로 권력을 지닌 인물이었다.

    “별거 아닙니다. 시무르크 의장님. 그나저나 차기 황제로 생각한 자가 있으십니까?”

    시무르크의 말에 대답한 건 파날이라는 남성이었다.

    얄쌍한 몸을 지닌 그는 손바닥을 비비며 어떻게든 잘 보이려고 애썼다. ‘정치력’만 높은 검사라고 손가락질받는 데는 다 이유가 존재했다.

    시무르크는 파날을 무심하게 쳐다보더니 다른 여성 귀족에게 물었다.

    “자네의 생각은 어떠한가. 메데인”

    “딱히, 생각은 없군요.”

    “시무르크 의장님께서 물어보시는데! 대답을 하지 않다니? 죽고 싶어서 환장한 거냐!”

    “그만두게. 파날.”

    “어. 어, 어 어째서 저런 발칙한 자식을 가만히 두시는 겁니까.”

    파날은 의아한 표정으로 시무르크에게 따졌다.

    어째서 자신과 저 여자의 취급이 다른 건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으니까. 그러나 시무르크는 이번에도 그를 무시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대신 얄미워서 죽이고 싶은 메데인이 입을 열었다.

    “그건 당신이 약해서 그런 거 아닐까? 검사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볼품없잖아.”

    “이, 이, 이…!”

    “딱히 반박을 못 하는 거 보니. 당신도 내 말에 동의하는 거 맞지? 그러니 평소에 검이나 좀 잡아보지 그랬어.”

    “그만.”

    탁!

    시무르크가 와인을 테이블에 내려놓자 모두가 말을 멈추고 숨을 죽였다.

    재상이란 자리에 있어서 놓치기 쉽지만, 그는 일류 검사였다. 그가 선보이는 중검(重劍)은 천하무적이라는 소문이 자자했다. 당연히 검사들에게 있어서 존경심을 가졌다.

    ‘쓸만한 놈이 없군.’

    시무르크는 자리에 모인 5명의 면면을 살펴보았다.

    마검 소유자 엘메인.

    정치의 파날.

    용병왕 켈라우

    레아교 신관 팔미라

    마법사 히르마

    모두가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인재들이었다.

    엘메인과 파날은 원래부터 시에라 제국 귀족이었고, 다른 자들은 대륙에서 직접 초빙한 강자들이었다. 그래도 시무르크는 만족하지 못했다.

    이 정도로는 황실의 그림자나 세이라 공주의 지지세력을 이겨낼 수 없어 보였다.

    ‘그래도 그게 있으니 다행이군.’

    시무르크는 구석에 앉아있는 히르마에게 물었다.

    “준비는 모두 끝났나.”

    “네? 네. 모두 끝났습니다. 계약대로 일해준 건 시무르크 님께서도 보시지 않았습니까.”

    “황제가 죽은 건 확실하다고 하더군. 수고했다,”

    “아, 아닙니다.”

    히르마는 시무르크를 어려워했다.

    아카데미에서도 퇴출당한 자신을 데려온 이유를 도무지 알 수 없었기에. 인생에서 얻은 두 번째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 목숨을 걸었다.

    설령 그게, 대륙인들의 손가락질을 받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곧 우리의 세상이 올 거다. 시에라를 위하여!”

    “위하여!”

    * * *

    황제의 집무실

    큰일이 있었던 황제의 집무실은 원래의 모습으로 완벽히 돌아오지는 못했다.

    부서진 것들을 모두 치우고 피까지 말끔히 지워내도 보이지 않는 공허함이 맴돌았다.

    어떻게든 분위기를 바꾸고자 세이라 공주가 황제의 의자에 앉았지만, 역부족이었다.

    싸늘하게 식어버린 의자의 촉감을 느끼며 세이라 공주는 생전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렸다.

    ‘결국, 이기지 못하셨네요.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이 손으로 꼭 복수해드릴게요.’

    황제는 엄하면서도 누구보다 자식을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편안히 눈을 감지 못하게 한 마족을 용서하지 못했다.

    “앤.”

    “부르셨습니까? 공주님.”

    이름을 부른 것만인데도 그림자의 수장이었던 노파가 모습을 드러냈다.

    푸른 종달새에서 보여주었던 옷이 아닌 제국 그림자로서 제복을 갖춰 입은 상태였다. 돌아왔다는 결심을 보여주기에 알맞았다.

    “시무르크는 어때.”

    “역시 그자를 걱정하시는 겁니까?”

    “오빠들과 언니들이 모두 죽었는데도 조용하잖아. 그 사람의 능력이라면 황제에 자리에 오를 수 있다는 것 정도야 알아.”

    “어찌 그런 슬픈 말씀을….”

    “날 바보 취급하지 마. 앤. 그리고 너희들을 용서한 것도 아니라고.”

    세이라 공주가 본격적으로 앤을 쏘아붙이려고 할 때, 밖에서 대기하던 호위가 노크했다.

    “무슨 일이지?”

    “공주님. 유피테르 아르테미스 님이 오셨습니다.”

    “들라 해.”

    “알겠사옵니다.”

    끼이익!

    집무실에 어울리는 거대한 문이 천천히 열리며 은발의 마법사와 귀여운 소녀가 안으로 들어왔다.

    유피테르와 오흐트였다.

    두 사람은 세이라 공주의 앞까지 차분하게 걸어온 후, 걸맞은 예의를 갖춰 인사했다.

    “오랜만입니다. 세이라 공주님.”

    “언니! 제대로 잠은 잤어? 꼭 자라고 했는데.”

    “무엄하다!”

    마지막 남은 황제의 핏줄에 대한 예의가 성에 차지 않다고 생각한 앤이 끼어들었다.

    그러나 세이라 공주는 그런 앤에게 호통을 쳤다.

    “무엄한 건 당신이야 앤. 오흐트는 내 여동생이나 다름없는 아이니까.”

    “이런 정체를 알 수 없는 자들을 믿는 건….”

    “그 둘이 제국이 무너질 뻔한 걸 찾은 건 잊은 거야? 이 둘은 내 사람이야. 그렇게 알아둬.”

    확신으로 가득 찬 세이라 공주의 말에 앤은 입을 다물고 무릎을 꿇었다.

    그건, 복종하겠다는 그림자 특유의 표현이었다.

    “미안해 유피테르. 내가 맡긴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어.”

    “당신 잘못이 아냐. 굳이 마족을 상대한 건 내 판단이었어. 그렇게 자책하지 않아도 좋아. 그보단 괜찮나?”

    “뭐가?”

    “차기 황제가 되려면 헤쳐나갈 게 꽤 많아 보이던데.”

    유피테르의 말대로 시에라 제국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먹구름 속에 있었다.

    황제를 죽이고 심장을 훔쳐 달아난 마족은 여전히 오리무중이었으며, 귀족들은 이 기회를 놓치려 하지 않았다. 황제의 자리와는 연이 없던 세이라 공주에게는 벅찰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황제에 버금가는 재능을 지니고 있더라고 해도, 아직 꽃이 피기 전이었으니.

    “걱정해주다니. 날 그렇게 봐주는 사람은 앤 말고, 처음인걸?”

    “그렇게 웃으면서 말하면 속마음이 다 보인다고. 당신은 이제 제국민들을 이끌어야 할 몸이야.”

    “그 정도야 나도 알아.”

    세이라 공주는 전에 없는 표정으로 입을 삐쭉거렸다. 국경의 대장으로 있을 때와는 사뭇 다른 태도였다.

    ‘이건 완전 다른 사람이 되었잖아. 의기소침해 있다니 어울리지 않아.’

    어느 쪽이 진짜 그녀의 본모습인지 유피테르는 알지 못했다. 그녀와 그리 오래 알고 지낸 사이도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가족의 죽음이 생각보다 큰 충격으로 다가온 듯했다.

    세이라 공주를 북돋아 주기 위해 유피테르는 결단을 내렸다.

    휙!

    옆에 있던 오흐트를 가볍게 잡아서 세이라 공주에게 던졌다.

    아픈 기억을 없애기 위해서는 행복한 추억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했기에.

    “이게 무슨 짓이야 마스터! 그리고 이거 놔달라고 언니!”

    “오흐트! 역시 오흐트가 최고야. 그냥 언니 동생 하지 않을래? 평생 케이크랑 달콤한 걸 줄게.”

    “케이크…?”

    달콤한 제안에 오흐트가 흔들렸다.

    델포이에서 카페의 유명인사가 되었을 정도로 사족을 못섰다. 그래도 유피테르가 만든 게 한층 더 위였다.

    “음…. 그건 어려울 거 같아. 언니처럼 우리도 해야 할 일이 태산이거든. 게다가 내가 빠지면 마스터가 힘들어할 거야.”

    “역시 그렇구나.”

    오흐트의 말을 들은 세이라 공주는 창문 너머를 바라보다 고개를 원래대로 돌렸다. 그리고서는 양손을 들어 뺨을 강하게 때렸다.

    짝!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행동이었으나 그 누구도 그녀를 말리지 않았다. 그림자의 수장으로 돌아온 앤조차도 가만히 쳐다볼 뿐이었다.

    ‘아프네. 그래. 이게 현실이야. 도망가기만 해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어.’

    세이라 공주는 붉게 물든 뺨을 어루만졌다.

    얼얼함이 손을 타고 그대로 전해졌다. 감각은 날카로워졌고 연약한 잡생각들이 한꺼번에 날아갔다.

    확실하게 마음을 정한 세이라는 먼저 오흐트에게 질문했다.

    “그래, 이런 건 나답지 않지. 제대로 해보자고. 시에라 제국의 역사를 여기서 끝낼 순 없으니까. 도와줄 거지?”

    “그러엄.”

    오흐트는 품속을 빠져나오며 긍정적인 대답을 해주었다. 레아교 초대 성녀인 그녀에게 마족은 적이었다. 또, 마족에게 당한 상처를 치유해주는 것도 그녀의 몫이었다.

    오흐트의 시선에서 세이라 공주는 아직 상처를 벗어나지 못한 환자였다.

    “유피테르 당신도 마찬가지야?”

    “기한이 없는 임무라서 말이지. 공주님을 구해줄 정도의 시간은 남아 있어.”

    “내가 뭘 시킬지 모르는데도?”

    “덕분에 드워프를 만나긴 했지. 게다가 당신 말대로만 움직일 사람으로 보여?”

    유피테르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어떤 식으로 움직일 거야? 마족의 목적을 모르는 이상 한 템포씩 느리게 반응할 수밖에 없어.”

    “아니, 그건 아니야. 짚이는 부분이 있거든. 왜 하필 시에라 제국을 노렸는지. 그리고 황족들을 노렸는지. 그 답은 하나야.”

    세이라 공주의 말에 유피테르의 눈이 이채를 발했다. 당사자인 황제도 알지 못하는 사실을 안다는 게 놀라웠다. 그녀가 허풍을 칠 성격이 아니라는 것 정도야 이미 파악한 후였다.

    세이라 공주는 목소리를 가다듬은 후, 생각을 입 밖으로 내어 공유했다.

    “마족들은 시에라 제국에 잠든 고대 병기를 깨울 생각일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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