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르 대혈전(11)
* * *
마족은 구체가 결계를 무시하고 유피테르를 관통하리라 굳게 믿었다.
그건 의심할 여지 없는 사실이었다.
날고 기는 마법사라고 해도 고작 인간이었으니까. 마족이 사용하는 한 수 위의 마법을 막아내는 건 불가능했다. 마족이 인간에게 지는 건 동화책 속에서나 가능한 상상이었다.
하지만 마족의 상상은 끝내 현실에서 이루어지지 않았다.
뛰는 마족 위에는 훨훨 날고 있는 초월자가 숨을 쉬는 세상이었기에.
“그것만으로 충분할 거라고 생각하다니. 요즘 마족들은 개념 공부를 더 해야겠어.”
유피테르의 결계는 마족의 공격에도 끄떡없었다.
나비들은 유유히 하늘을 날아다녔고, 아름다운 푸른 빛의 마나는 마족의 마나를 전부 먹어치웠다.
“어, 어찌 인간이 저런 힘을….”
“그냥 처음부터 저 사람에게 무릎 꿇고 부탁하는 게 맞았을 것 같은데요?”
“그래, 그럴지도 모르겠구나.”
예상이 보기 좋게 빗나간 상황에서 노파와 그림자들은 멍하니 유피테르를 쳐다보았다.
그것도 잠시 젊은 그림자들이 유피테르에 대해 알고 있는 사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아 저 마법! 성국에서 열렸던 교류전에서 본 것 같은데요? 얼음 마법도 왠지 낯이 익어요.”
“바보야. 아까 말했잖아 델포이 아카데미의 교수라고.”
“그, 그런가?”
“그림자라면 당연히 정보 수집에 목숨을 걸어야지. 우리가 늘 암살이나 호위만 하는 줄 아니?”
“알았으니까 이제 그만해! 아직 전투가 끝난 건 아니라고!”
놀란 건 인간들뿐만이 아니었다.
“어, 어째서냐! 어떻게 고작 인간 주제에 내 마법을 막을 수 있는 거냐!”
“인간이 아닌 거냐? 고대의 마법사들도 이런 건….”
마족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
몇 번이고 눈을 감았다가 떠도 현실은 변하지 않았다. 검은 구체는 온데간데없었고 결계만 유유히 남아서 존재감을 보였다.
“이 정도로 놀라긴 이르지.”
한 번 하겠다고 마음을 먹은 이상, 유피테르는 가차 없었다.
결계를 유지하면서도 또 하나의 마법을 바로 완성해냈다.
유피테르 식 특제 마법 – 니플헤임
파스스슷!
지독한 냉기가 그대로 집무실을 집어삼켰다.
시간조차 얼어붙게 만드는 유피테르의 압도적인 마나에 아무도 움직이지 못했다. 이렇다 할 반응도 하지 못한 채로 니플헤임의 범위에 휩쓸리고야 말았다.
설령, 마족이라도 예외이진 않았다.
“마스터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이건 범위가 너무 넓잖아!”
아군은 아니더라도 지켜야 할 인간들까지 휘말리자 보다 못한 오흐트가 나섰다.
이대로 가다간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죽을 지경이었으니까. 니플헤임은 시트시거나 에키드나도 두려워하는 마법이었다.
‘일단 믿을게. 마스터.’
대답을 해주지 않더라도 오흐트는 직접 해결책을 내놓았다. 신성한 마나를 여기저기 흩뿌리며 유피테르의 마나를 중화시켰다.
니플헤임 자체가 강력한 독과도 같아서 마법을 사용하는 건 오히려 위험하다는 판단에서였다.
“가, 감사합니다!”
마나를 받은 사람들은 기운을 조금이나마 회복한 후, 오흐트에게 감사 인사를 보냈다.
그중에서는 유피테르에 대한 팬심을 숨기지 않는 자들도 있었다.
“이것도 교류전에서 봤다고! 역시, 저 마법사는 인기투표 1위의 그 유피테르잖아!”
“제발 좀 진정해. 지금 그럴 때야?”
“하지만….”
“하지만은 무슨! 그만 정신을 차리고 긴장해. 아직 마족은 쓰러지지 않았다고.”
그 말대로였다.
마족은 불길한 검은색의 마나로 방어막을 만들어 공격을 견뎌냈다.
그마저도 완벽하지는 않았다.
유피테르의 마나는 사라지지 않고 계속해서 방어막을 얼려버렸다. 마족은 그때마다 새로운 마법을 만들어내서 간신히 막아내는 것에 불과했다.
“대단하군. 인간. 인정해주겠다.”
“왜 너 같은 재능이 인간의 한계에 만족하고 있는지 모르겠군. 우리에게 오지 않겠는가?”
마족이 고작 이 정도로 한계를 내비칠 리는 없었다. 항복하는 대신 유피테르에게 마족 편으로 오라고 권유했다.
“나는 인간의 편이라고. 일단은 말이지.”
유피테르는 고민해보는 기색도 없이 그걸 거절했다.
“너희에게 격의 차이란 무엇인지 알려주겠다!”
“굳이 벌주를 마시겠다면 나에게도 다 생각이 있다. 별다른 말은 필요 없겠지.”
마족들도 유피테르를 진심으로 꾀려고 생각한 건 아니었는지, 별 타격이 없어 보였다.
오히려 시간을 벌어 새로운 공격을 시도했다.
마족이 뿜어낸 검은색의 마나는 무서운 줄도 모르고 유피테르의 마나에 맞섰다.
유피테르의 마나가 거대한 파도 같았다면, 마족의 마나는 촘촘한 거미줄처럼 남은 틈을 뺏어갔다.
그 결과, 거대한 두 마나가 부딪쳐 마나 폭풍이 발생했다.
“마스터!”
마나 폭풍이 점점 커지자, 오흐트가 유피테르에게 경고했다.
“나도 알고 있다고!”
“알고 있으면 빨리 해결해봐. 나로서는 이걸 중화하는 것만으로도 힘들어!”
유피테르는 곧바로 행동에 나섰다.
‘이걸 노린 거였나. 마족이 아니랄까 봐 음흉하군. 그래도 확실히 효과적인 방법이야.’
마왕과 공작급 마족도 압도하는 유피테르의 마나를 일개 마족이 이겨내는 건 처음부터 불가능했다.
그래서 이런 선택을 한 거였다.
유피테르는 어쩔 수 없이 니플헤임을 멈췄다. 그러자 세계를 잡아먹던 푸른 마나가 서서히 약해졌다.
그 순간.
마족은 흩트렸던 마나를 한곳으로 모은 후 그대로 쏘아냈다.
콰아아앙!
마나는 기세 좋게 나아가 집무실 한쪽 벽을 뚫었다. 마침, 창문이 있는 곳이었다.
확실한 위력이었기에 매캐한 연기조차 나지 않았다.
“목 빼놓고 기다려라. 꼭 복수해줄 테니.”
“다음에 보면 절대로 가만히 두지 않을 거다! 반드시 다시 만날 거다.”
마족은 구멍이 난 걸 확인하자마자 그 구멍으로 도망가버렸다. 재빠른 행동에 모두가 어안이 벙벙할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마스터?”
“왜 그러지? 할 말이 있으면 그냥 해.”
“쟤네 안 잡아도 돼?”
“나도 도망갈 거라고는 예상 못 했어. 인간에게 겁을 먹고 돌아가는 건 상상이 안 되니까.”
마족이 도망친 이상 따라잡는 건 쉽지 않았다.
유피테르의 봉인이 풀린 상태라면 또 몰랐으나, 적어도 지금은 힘들었다. 마족에게는 다양한 도피 수단이 있었기에.
“일단 다친 사람을 돌봐줘. 너라면 할 수 있지?”
“당연하지. 맡겨만 둬.”
유피테르의 부탁을 받은 오흐트는 다른 사람에게 뛰어가 상태를 확인했다.
“자네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유피테르가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그림자의 전 리더였던 노파의 얼굴이 시선에 잡혔다.
“무슨 일이지?”
“아닐세. 우선 황제 폐하의 복수를 해준 게 고맙네.”
유피테르가 반말해도 노파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떨리는 두 손으로 유피테르의 손을 잡았을 뿐.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야.”
“그 일 덕에 이곳에 있는 모두는 살아남았네. 그러니 일단은 감사의 인사부터 받는 게 어떤가.”
“그러지.”
유피테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노파가 간신히 울음을 참고 있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따르던 주인을 잃은 그림자의 슬픔을 감히 이해하려는 생각은 없었다.
“이제 어떡할 거지?”
노파가 슬퍼할 시간을 충분히 주었다고 판단한 유피테르가 물었다.
제국의 대들보인 황제가 목숨을 잃었고, 그 밑에서 모든 일을 담당하던 재상 역시 죽은 거나 다름없었다.
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지가 궁금했다.
“우리도 아직 방향성을 잡지 못했네. 폐하의 다른 자제분들이 죽었다는 걸 어제야 알았거든.”
“그럼 세이라 공주뿐인가?”
“그렇다네.”
암담한 현실 앞에서 유피테르와 노파 어느 쪽도 이야기를 잇지 못했다.
유피테르는 이런 분위기가 거북했다. 어떤 식으로 위로를 해야 할지 하나도 감을 잡지 못할 정도로.
“마스터! 치료를 다 끝냈어. 딱히 아픈 사람은 없더라고.”
다행히 오흐트가 돌아와 침묵이 깨졌다.
발랄한 기운을 지닌 초대 성녀는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적막을 깨는 고마운 존재였다.
“아가씨도 정말 고맙네. 이런 자와 같이 다니니 평범한 아카데미생은 아닐 테지?”
노파는 애정이 듬뿍 담긴 눈빛으로 오흐트를 쳐다보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으응? 일단은 아카데미생이긴 한데. 다들 크게 다친 곳은 없더라고! 실력이 있는 편인가 봐.”
“아가씨에 비하면 별거 없는 실력이겠지만 말이지.”
“에이, 아냐 아냐. 나는 연약한 치유사일 뿐이라구.”
노파와 오흐트 모두 진심으로 이야기 중이었으나, 제대로 맞물리지 않았다.
서로의 상식이 달랐기 때문이었다.
노파가 볼 때, 오흐트는 마족과도 맞설 가능성이 있는 뛰어난 치유사였다.
하지만, 오흐트에게는 유피테르는 물론 칼리스토 자매들과 바실리라는 엄연한 기준이 있었다. 이 정도로는 성에 차지가 않았다.
“오흐트 미안하지만, 부탁 하나만 할까.”
유피테르는 오흐트를 불렀다.
노파와 대화하고 있던 오흐트는 쪼르르 달려와 초롱초롱한 눈동자로 그를 바라보았다.
유피테르의 부탁은 언제든지 환영이라는 태도였다.
“뭔데 마스터?”
“세이라 공주를 이곳으로 데려와 줘.”
“이보게. 아무리 그래도 국경에서 여기까지는 거리가 마차로도….”
노파는 유피테르에게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지 말라며 한마디를 해주려고 했다. 하지만, 오흐트가 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그만 입을 다물고야 말았다.
“응 알았어! 그럼 다녀올게.”
“그, 그곳으로 가면 위험해! 언니랑 같이 계단으로….”
“얘! 그런 건 위험하단다!”
오흐트는 유피테르의 말이 끝나자마자 창문으로 뛰어내렸다. 그림자들 중 몇 명이 걱정스러운 눈길로 쳐다보았으나, 오흐트는 무사히 땅에 착지했다.
그리고서는 빠르게 시야에서 사라졌다.
“음? 무슨 할 말이라도 있어?”
“아무것도 아닐세. 그러면 세이라 공주님은 언제 이곳에 도착하나.”
노파는 상식을 깨부수는 두 사람을 이해하기를 포기했다. 검사가 아니라 마법사가 있었어도 선택은 달라지지 않을 거라고 자조했다.
“다음 황위는 세이라 공주가 잇게 되는 건가?”
“귀족들이나 넘어야 할 게 많다네. 게다가 마족의 문제도 아직 해결되지 않지 않았나.”
“확실히 그렇지.”
노파의 말에 유피테르는 마족을 떠올렸다.
‘원래 인간인 것 같지는 않았어. 그런 식의 마족은 처음 보는 건데.’
몬스터 중에서는 트윈 헤드 오우거와 같은 변종이 있었지만, 마족 중에서는 본적 없었다. 적어도 바실리는 그런 존재에 대해서 알려주지 않았다.
황제의 심장을 가져간 이유조차도 파악해내지 못한 상황.
트리아의 정보가 많이 엇나간 상황에서 유피테르가 할 수 있는 건 극히 적었다. 그래서 할 수 있는 걸 하자고 노파에게 제안했다.
“최고 귀족 회의 같은 건 시에라에도 있지?”
“물론 있다네. 자네가 그걸 어떻…. 아, 아르테미스 공작가 출신이라 그런가.”
“오흐트가 오기 전에 언질을 보내놔. 그림자들이라면 그 정돈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불가능한가?”
“가능하네. 하지만, 귀족들을 불러서 뭘 어쩔 생각인가?”
“원래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잖아. 그걸 해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