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도 포기한 대공자-186화 (186/265)

샤르 대혈전(9)

* * *

검사의 간격.

대륙 전쟁 시기부터 이 주제는 늘 토론의 중심이 되었었다. 최강이라는 말은 늘 가슴을 뛰게 했으니까.

검사를 대변하는 자들은 일정 간격 내에서는 무적이라고 주장했다.

마법사들에게는 ‘간극’이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마법을 펼치려면 가장 먼저 마법진을 그려내고, 마법식을 완성해야만 했다. 그 후 마나를 움직여야 마법이 발동했다.

물론, 시동어조차 생략하고 마법을 사용하는 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건 대마법사들에게만 허용되는 기적이었다.

평범한 마법사들은 근접 전투를 기피하는 성향을 지니는 게 당연했다.

황제의 자신감은 이러한 역사적 사실에 기반한 거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상대가 나빴다.

“별거 없네. 별로 강한 검사가 아닌가 봐?”

오흐트는 일격필살(一擊必殺)의 의지를 한껏 담은 공격에도 멀쩡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생채기조차 나지 않고, 오히려 생글생글 웃었다.

황제의 공격 따위는 가소롭다는 듯이.

“어떻게 마법사가 이 간격에서 버텼느냐!”

믿을 수 없는 상황에 황제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검사의 간격에서 마법사를 이겨내지 못하다니, 그저 눈을 감고 현실을 외면하고만 싶었다.

하지만, 그는 일국의 황제였다.

적으로 예상되는 이들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었다.

“음. 오히려 내가 묻고 싶은 건 왜 이렇게 약해? 시에라 제국의 황제는 대대로 검술도 강하지 않았어?”

“뭐라! 무엄하다! 네 앞에 있는 건 황제 폐하….”

오흐트의 도발에 주변에 있던 재상이 격렬하게 반응했다. 마치, 자신이 황제의 마음을 대신 말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만!”

“하오나 폐하!”

“그만하라고 하였다!”

절절한 마음이 그대로 느껴지는 재상의 모습에도 황제는 끝내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

오히려 윽박지르며 재상의 입을 다물게 했다.

‘재상, 자네가 아무리 충신이라도 내 마음을 다 아는 듯한 말은 불가하다.’

황제의 자존심은 약한 모습을 용납하지 않았다.

또, 감히 아랫사람인 주제에 자신을 속속들이 알고 있다는 뉘앙스를 풍기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제멋대로이지만 황제이기에 가능한 사고방식이었다.

“이국의 마법사여, 어찌하여 이 황성에 온 것이냐. 목적이 무엇이지?”

재상을 침묵시킨 황제가 제일 먼저 한 행동은 이유를 묻는 거였다.

리투아 제국과 아르메 제국 사이의 간헐적인 전쟁을 제외하면, 대륙 전쟁 이후에는 큰 전쟁이나 혼란은 없었다.

이미 전쟁에 신물이 났기 때문이었다.

“우리의 목적은 황제 당신이야.”

황제는 오흐트에게 물었으나, 대답한 건 유피테르였다.

“네놈들이 감히!”

“키마라! 조용히 하라고 했다.”

재상은 황제의 앞에서도 유유자적한 모습을 보이는 유피테르를 노려보며 악을 썼다. 황제가 유피테르와 대화를 하는 걸 두려워하는 듯이.

그러나 이미 마음을 굳힌 황제의 앞에서 그런 건 헛된 발악일 뿐이었다.

“내가 목적이라고 하였느냐?”

“그래. 정확히는 당신을 도와달라는 부탁을 받아서 말이지.”

“나를 돕고 싶다니…. 이국의 마법사들이?”

유피테르는 사실을 말했으나 황제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가 없었다.

‘나를 돕기 위해 황성에 몰래 침입한다라? 어이가 없군. 심지어 그림자들과도 아는 사이인 듯 보이는군.’

신뢰의 증거보다는 불신의 증거가 훨씬 많았다.

그 사실을 깨달은 황제의 말투는 점점 더 공격적으로 변해갔다.

“감히 누가 나를 심판하려고 하느냐?!”

“세이라 공주.”

“뭐라?”

“세이라 공주가 당신을 걱정했어. 그래서 구해달라고 내게 부탁했지.”

세이라 공주가 언급되자 분위기가 스르륵 풀렸다.

흉흉한 분위기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제대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장이 펼쳐졌다. 황제가 가장 사랑하는 막내딸이 지닌 위력은 그 정도로 강력했다.

“세이라 공주에게 자네 같은 친구는 없었을 텐데? 그보다 자네는 설마….”

황제의 눈동자에서 분노의 불길이 조금씩 사라졌다.

동시에 머릿속이 빠르게 돌아갔다. 평소 성군이라고 소문이 난 그의 능력이 충분히 발휘되는 순간이었다. 재상이 등용되기 이전에도 시에라 제국은 늘 부유한 국가로 부러움을 샀었다.

최대한 이성적으로 생각하며 유피테르를 훑어보자 진실의 실마리를 잡았다.

은발과 은안을 한 번에 가진 마법사의 가문은 딱 하나뿐이었으니까. 게다가 얼음 마법까지 쓰니 두말할 필요 없었다.

“유피테르 아르테미스입니다. 지금은 델포이 아카데미 특별 교수의 직위에 있습니다. 공주님과는….”

“국경에 있는 경비대에서 만났겠군. 거기서 그 애가 부탁하던가?”

황제의 태도가 누그러지자 유피테르도 말투를 바꿨다.

아르테미스의 가주라는 건 아직 대외비였다. 설령 밖으로 알려졌다 하더라도 그는 귀족에 불과했고, 상대방은 일국의 황제였다.

틱틱대는 말투를 계속 쓰다가는 사형을 당해도 할 말이 없었다.

“맞습니다. 황제 폐하의 곁에 마족이 있다고 세이라 공주님은 의심하더군요.”

“하하하하하….”

마족이라는 단어에 황제가 웃음을 터트렸다.

“마족, 마족이라…. 자네 제정신인가? 마족은 보기 힘든 종족 중 하나가 아닌가.”

“마, 맞습니다. 폐하. 마족이라고 하더라도 시에라의 거대한 방벽을 돌파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자네가 말을 하도록 허락한 적은 없다만?”

좋은 모습을 보여줄 기회라고 생각해 대화에 끼어 들은 키마라는 또다시 바깥으로 내쳐졌다.

황제는 그런 재상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유피테르에게 물었다.

“좋다. 설령 마족이 정말로 세아니아 대륙에 다시 마수를 뻗친다고 하자. 왜 하필 나지? 다른 제국들도 더 많지 않은가?”

“그것은….”

마족에게 지배당한 사람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말에 유피테르는 대답하지 못했다.

황제는 방금 전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인 것 같았다.

반짝이는 눈동자에서는 신하들의 목을 베라고 소리치는 모습이 연상되지 않았다.

‘역시, 뭔가가 숨겨져 있는 건가.’

유피테르는 곰곰이 생각했다.

황제의 말에 제대로 된 대답을 내놓지 않았기에 남겨진 시간은 적었다. 여기서 시간을 더 끌었다가는 주도권을 넘겨줄 가능성이 높았다.

물론, 힘으로 모든 걸 정리할 수도 있었다.

유피테르가 지닌 힘은 대륙 전체를 상대할 수 있었으니까. 그렇게 되면 델포이 아카데미나 아르테미스 공작가의 명성에 누를 끼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런 건 유피테르가 원하는 길이 아니었다.

‘아니 잠깐만….’

쿠르르릉!

재빨리 생각을 이어가던 유피테르의 머릿속에 천둥이 쳤다.

황제가 이상한 모습을 보일 때는 늘 재상이 연관되어 있었다. 재상이 공격당하자 마치 자신을 부정한 것처럼 행동했었다.

의외로 파랑새는 가까이에 있었다.

“폐하. 잠시 재상과 이야기를 해보아도 괜찮겠습니까?”

“재상과? 그걸로 답을 찾을 수 있는 건가?”

“그렇습니다.”

“허한다.”

황제는 미심쩍은 표정으로 유피테르를 바라보았다.

재상은 이미 오흐트의 공격으로 옴짝달싹 못 하는 상태였다. 게다가 엄청나게 흥분한 상태였다.

저런 상태에서는 무엇을 물어도 제대로된 답변을 해줄지 의문이었다.

황제의 허락이 떨어지자 유피테르는 재상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오흐트의 마법에 손발이 묶여 웃긴 상태였으나 키마라의 눈빛은 분노로 가득했다.

“당신 키마라라고 했던가?”

“하하…. 이제야 이쪽을 봐주는 건가! 그렇다 내가 바로 대(大) 시에라 제국의 재상인 키마라다!”

움직이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재상은 꿋꿋이 대답했다. 그의 목소리에서는 자랑스러움이 한껏 묻어나왔다.

“넌 마족인가?”

모든 질문을 거스르고 핵심만을 말하는 유피테르의 말에 황제의 집무실이 정적에 빠졌다.

오흐트를 제외한 자들은 모두 숨을 삼켰고, 황제는 두 눈을 부릅뜨고 상황을 주시했다.

“내가 마족이라니 무슨 헛소리냐!”

유피테르의 말에도 재상 키마라는 떳떳하다며 가슴을 폈다. 그 누구도 의심하지 못할 정도로 당당한 얼굴과 표정이 뒷받침했다.

하지만, 유피테르에게도 다 생각이 있었다.

“오흐트. 예의 그걸 부탁해.”

“알았어 마스터.”

라플라스, 오르토스 아니면 다른 마족이라도 상관없었다.

이곳에는 초대 성녀 오흐트가 있었으니까.

창조신 레아의 목소리를 들은 그녀의 마법은 그야말로 완전무결했다. 마족에게 있어 유피테르만큼 무서운 게 바로 오흐트였다.

그걸 알기에 성국을 찔러본 것이었다.

“자 그럼. 한 번 해보실까?”

오흐트는 싱글벙글 웃으며 천천히 키마라에게 다가갔다.

“무, 무슨 짓을 하려는 거냐!”

“아프지 않아. 따끔한 건 아주 잠깐이니까요.”

“허, 허, 허 헛소리를!”

이상함을 감지한 키마라는 어떻게든 도망치려 몸부림쳤다. 최대한 힘을 모아 마법을 부수려고 이리저리 노력했다.

초대 성녀의 마법은 가차 없었다.

키마라가 힘을 주면 줄수록 오흐트의 창은 공간을 뺏었다. 처음에는 넉넉했던 공간이 이제는 몸이 아플 정도로 좁아졌다.

뚜벅뚜벅.

키마라에게 다가간 오흐트는 마나를 뿜어냈다.

“마, 말도 안돼!”

“어찌 저런 소녀가 저 정도의 힘을!”

압도적인 마나에 신하들이나 검사들은 물론, 황제까지 몸을 움찔거렸다. 귀여운 외모에 숨겨져 있던 충격적인 실력을 싫어도 인정하게 되었다.

“거짓된 모습은 좋지 않다는 거 몰랐어?”

오흐트는 키마라를 얼굴을 똑바로 보며 가장 자신 있어 하는 마법을 완성했다.

오흐트 식 특제 마법 – 원상복귀

원상복귀는 원래 치유 마법이었다.

어떠한 상처를 입어도 마나가 기억하는 원래의 상태로 돌려놓는 기적이었다. 이건 초대 교황도 불가능한 오흐트만의 힘이었다.

“마, 말도 안 돼! 이 마법은!”

예상외의 일격을 맞은 재상이 고통스럽게 소리를 질렀다.

“재, 재상… 설마 자네가 정말로?”

“아, 아닙니다. 폐하. 제발 저를 믿어주시옵소서! 저는 마족이 아니….”

유일하게 움직일 수 있는 입으로 황제에게 간청하던 재상의 움직임이 돌연히 멈췄다.

우지끈!

무언가가 부서지는 엄청난 굉음이 들리며 재상의 모습이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괴상해졌다.

근육은 쉴새 없이 부풀었다가 줄어들었고, 검은 물론 마법조차 사용하지 못한다는 재상의 몸에 검은색의 마나가 깃들기 시작했다.

그 모든 소란이 끝난 후, 그곳에 위치한 건 더는 재상이 아니었다.

“빌어먹을 인간들이! 감히, 감히 내 계획을.”

“저놈이다! 저 은발 놈을 죽여버리면 된다!”

붉은 눈동자 네 개가 황제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건 틀림없는 마족의 색이었다.

“원상복귀가 제대로 먹혀들었군.”

“역시, 마스터야 전부 생각이 있었구나!”

“아니, 이번엔 도박에 가까웠다.”

“뭐라고?”

오흐트는 귀를 의심했다.

그녀가 유피테르의 말을 따른 건 지금까지 보여주었던 실적이 있어서였다. 그의 말이나 행동에는 늘 합리적인 근거가 있었었다.

“황제 폐하. 지금까지의 꿀은 달콤하셨습니까?”

“하하…. 당연히 그랬겠지. 우리의 마법인줄도 모르고!”

“그, 그게 무슨 소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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