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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도 포기한 대공자-185화 (185/265)
  • 샤르 대혈전(8)

    * * *

    “폐하 이런 건 아니 되옵니다! 후세를 생각하여 주시옵소서!”

    “시끄럽다!”

    분명 소리로만 듣고 있는데도 긴박한 현장감이 그대로 전해졌다.

    황제의 목소리는 분명한 위엄이 있었다. 하지만, 무언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위화감이 들었다.

    “마스터. 이번 황제는 성군이라고 하지 않았어? 세이라 공주는 그렇게 착했는데.”

    “뭔가 있는 건 확실하군. 한 달 사이에 사람이 저렇게 변하는 건 말이 안 돼.”

    유피테르도 오흐트의 의견에 동의했다.

    시에라 제국의 현 황제는 치세를 이어가는 성군으로 소문이 나 있었다.

    라플라스와 드워프의 발자취를 조사하던 트리아는 자연스레 시에라 제국도 범위에 넣었다. 그 결과, 소문은 사실과 하나도 다르지 않다는 걸 밝혀냈다.

    “무엇 하느냐? 내 말이 들리지 않는가? 저 반역자들의 목을 쳐라!”

    유피테르와 오흐트가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하는 와중에도, 황제는 꿋꿋하게 의견을 밀어붙였다.

    철컥! 철컥!

    철제 갑옷 소리가 울려 퍼졌다.

    육중한 소리와 다르게 걸음 소리는 전혀 들려오지 않았다. 분명, 대단한 실력을 갖춘 검사인 게 틀림없었다.

    “마마마마마, 마스터 어떻게 정말로 죽이려나 본데?”

    오흐트는 굳은 표정으로 유피테르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피와 전쟁에 익숙해졌다고 해도 그녀는 성녀이자 치유사였다.

    애먼 사람이 눈앞에서 죽는 걸 그냥 넘어가지 못했다. 심지어, 그게 구할 수 있었던 사람이라면 더욱.

    “그렇다고 여기서 모습을 드러내면 사형일걸? 저런 황제라면 100%야. 장담할 수 있어.”

    “그럼 어떻게 해야 해?”

    답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오흐트는 땅으로 시선을 돌렸다. 저 이야기를 더 듣고 있으면 답답해서 죽을 것 같았으니까.

    유피테르의 이야기는 합리적이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이야기를 했다고 목을 베라는 황제의 앞에 함부로 나설 수는 없었다.

    가지고 있는 힘은 두 사람이 더 강했지만, 그래서는 마족의 그림자를 꿰뚫을 수 없었으니까. 어중간하게 개입했다가 마족이 도망치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갈 게 분명했다.

    바로 그 순간,

    와장창!

    창문의 유리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비밀통로 안에서도 들릴 정도로 선명하고 큰 소리였다.

    “폐하아아아아아!”

    “웬 놈이냐! 여긴 황제 폐하의 앞이다. 고개를 조아려라!”

    누군가가 난입하자 집무실은 난리가 났다.

    기본적으로 황성은 험준한 산을 울타리 삼아 만들어졌다. 게다가 집무실은 어중간한 실력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위치였다.

    뛰어올라 이곳에 도달할 실력이 있는 자들이었다면, 미리 호위를 맡은 검사들이 알아챘을 것이다.

    ‘누구지?’

    유피테르는 눈을 감고서 집무실에 벌어지는 소리에 집중했다.

    마나 감지 마법은 사람의 수를 정확하게 맞춰냈다. 하지만, 난입자가 누구인지 알려주지는 않았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면 마나 감지만으로 정체를 알아맞히는 건 불가능했다.

    “너, 너는!”

    “맞습니다. 당신의 그림자였던 자입니다.”

    그림자라는 단어에 반응한 건 황제뿐만이 아니었다. 유피테르 역시 돌아가는 상황을 확실히 잡아냈다.

    ‘아, 그 노파인가.’

    난입자의 정체는 푸른 종달새의 주인으로 있던 노파였다.

    그림자라면 황성의 통로들을 꿰고 있을 법했다. 게다가 실력도 모자라지 않았다.

    원래 빛 아래 활동하는 자들보다 어둠 속에 감춰진 자들이 더 강했으니까.

    “마스터. 지금 들어온 사람은 설마….”

    “맞아. 네가 생각하는 그대로야.”

    “어, 저것 봐 혼자가 아닌 것 같은데?”

    오흐트의 말에 유피테르는 마나 감지에 정신을 집중했다.

    그러자 노파의 뒤로 수십 명의 반응이 느껴졌다. 아마 노파를 따라온 황실 그림자들인 듯했다.

    “어찌하여 이곳에 왔는가? 앤, 자네는 이미 은퇴한 몸일 텐데.”

    “그야. 제국이 위험하니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큼흠흠. 뭐라?”

    노파, 아니 앤의 말에 황제는 심기가 불편한 듯 헛기침을 했다.

    듣기가 싫다는 완곡한 표현이었으나 앤은 거침없이 자신의 의견을 쏟아내었다.

    “폐하께서 믿고 있는 재상이 이상하다고 생각해보신 적이 없으십니까?”

    “재상 키마라는 젊은 나이에도 짐을 잘 도와주었다. 감히 짐의 선택을 의심하는 것이냐?”

    “예. 그렇습니다.”

    황제가 분노가 비밀통로까지 전해지는데도 앤의 목소리는 흔들림이 없었다.

    황제에게 거스르면 어떻게 되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데도 말이다.

    “닥치거라! 감히 황제의 명령에 토를 달려고 하다니. 너라고 해도 가만히 둘 수 없구나, 여봐라!”

    앤의 태도에 화가 난 황제가 일갈하며 검사들을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폐하.”

    “앤의 목을 쳐라.”

    “하오나 앤은 저희의….”

    “나를 능멸하려는 것이냐? 앤의 목을 치라고 했다. 지금 당장 말이다.”

    제아무리 황제의 곁을 보필하는 검사들이라고 해도 그 명령에 곧바로 따르지는 못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이 앤에게 다가가 포위망을 펼쳤다. 자신들이 하지 않으면 그대로 허리춤의 검을 뽑아 들 기세였기에.

    “걱정 말거라. 너희는 그저 폐하의 말을 따르면 된다.”

    “하지만, 스승님….”

    검사들의 검은 덜덜 떨렸다. 따르던 주인의 검에 스승이 죽는 모습은 결코 보고 싶지 않았다.

    앤은 오히려 울상을 짓고 있는 이들을 위로했다. 실수한 아이들을 따듯하게 위로하는 어머니처럼.

    ‘거기서 보고 있는 것 다 안다. 판을 깔아줬으니 마음대로 휘저어 보거라.’

    앤은 비밀통로 쪽을 슬쩍 쳐다보았다.

    유피테르와 오흐트가 비밀통로에 숨어있다는 사실을 파악한 지 오래였다.

    유피테르 일행을 추적하는 건 생각보다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명색이 그림자들이었기에 결국 해내고야 말았다. 그리고 유피테르 일행이 드워프들의 도움을 받아 비밀통로에 들어가는 걸 보고서 작전을 시작했다.

    “마스터. 우리가 있다는 걸 아는 거 같은데? 방금 마나가 느껴졌어.”

    “내 생각도 그래. 그림자라면 아무 생각 없이 돌입할 리 없지.”

    아주 잠깐이었으나, 앤을 따라온 그림자들이 기운을 이쪽으로 쏘아 보냈다.

    알기 쉽게 서비스라도 해줬는지, 검사가 아닌 마법사의 마나를 사용해주었다.

    이건 나서 달라는 명백한 신호였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키마라라는 재상이 문제인 것 같네. 일단 황제와 키마라를 확보해둘까.’

    생각을 정리한 유피테르는 오흐트에게 말했다.

    “가자. 오흐트.”

    “오케이. 마스터.”

    유피테르 식 얼음 마법 – 얼음 창

    오흐트 식 신성 마법 – 신성한 창

    콰앙!

    두 개의 속성을 지닌 창이 비밀통로를 그대로 부수고 앞으로 나아갔다. 마법사가 자리에 존재하지 않았기에 아무도 그 마법에 대응하지 못했다.

    얼음 속성의 창은 순식간에 온도를 떨어트리며 황제와 키마라를 고립시켰다.

    “이익! 황제 폐하를 지켜라!”

    “뭐 하느냐. 너희들이 그렇고도 황제 폐하의….”

    충신은 충신이었는지 황제를 구하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하지만, 유피테르와 오흐트는 검사들로서는 막아낼 수 없는 강자였다.

    게다가 오흐트가 쏘아낸 신성 마나의 창은 아직 힘을 보여주지도 않은 상황이었다.

    신성한 빛을 뿜어내며 달려나간 창은 그대로 키마라에게로 향했다.

    “막아라!”

    재상 키마라는 겁을 잔뜩 집어먹은 목소리로 소리쳤으나, 모두가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었다.

    질끈.

    다가오는 죽음의 향기를 맡으며 키마라는 눈을 감아버렸다.

    저 창은 왠지 모르게 더 무시무시한 기분이 들었다. 보기만 해도 머리가 아파졌고, 심장이 두근거렸다.

    “모, 모두 살아있는가? 아, 재상. 키마라 재상 무사한가!”

    황제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마법에 의해 이곳저곳이 파괴되었지만 의외로 다친 사람은 없어 보였다.

    그다음으로 황제의 눈에 들어온 건 재상 키마라였다.

    “예, 아직은 살아있사옵니다. 폐하.”

    의외였다.

    재상 키마라는 마법의 목표였는데도 똑바로 대답했다.

    그러나 연기가 걷히고 드러난 모습은 결코 멀쩡하다고 할 수는 없었다.

    두 손과 두 발이 분열된 창들에 꿰뚫려 있었으니까.

    “재상! 그건 절대로 괜찮은 게 아니오. 내 빨리 손을 쓰겠소.”

    “부, 부탁드립니다, 폐하.”

    황제는 총애하던 재상이 저런 식으로 고통받는 모습을 지켜볼 수 없었다. 그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신하였기에.

    그래서 빨리 도와줄 자들을 애타게 찾았다. 아니, 찾으려고 했다.

    “여봐라 빨리 재상을 구하라! 뭣들 하고 있느냐?”

    하지만, 황제의 목소리는 공허하게 울릴 뿐 아무에게도 닿지 않았다.

    우우우웅!

    엄청난 기운이 자신을 둘러싸자 황제는 반사적으로 물었다.

    “누, 누구냐!”

    황제이기 이전에 그도 뛰어난 실력을 보유한 검사였으니까. 마나를 사용하지는 못하더라도 그걸 눈치채지 못하는 바보가 아니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그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타박타박.

    갑자기 들려오는 발소리에 황제는 고개를 들었다. 누군지는 몰라도 이 발소리의 주인이 진범인 게 확실했다.

    “이런 식으로 당신을 만날 생각은 없었는데 말이지. 다 마족을 믿은 실수라고 생각해.”

    “맞아. 마족이랑 손을 잡는 건 그렇게 좋은 선택이 아니었어.”

    은발의 마법사와 귀여운 소녀의 모습을 확인한 황제의 마음속에 용기가 솟아났다.

    ‘누군진 몰라도 내게 대항하려고 하다니. 삼족을 멸해주겠다. 이놈들아.’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는 앤의 경고가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원래의 총명함을 그대로 지녔더라면, 얼음 마법을 보고는 상대의 정체를 깨달았을 것이다. 그러나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차버린 지금의 황제에게는 무리였다.

    황제는 유피테르와 오흐트가 가까운 거리까지 다가오기를 조용히 기다렸다.

    검사의 거리 안에서는 어지간한 마법사들은 모두 단칼에 도륙 내버릴 자신이 있었으니까. 황제가 된 이후에도 그는 검을 소홀히 하지 않았기에 충분히 가능할 듯싶었다.

    황제의 생각대로 상황은 흘러갔다.

    ‘한 걸음만 더, 그래 한 걸음만 더다. 그러면 너희들 모두 베어주지.’

    비밀통로에서 나온 유피테르와 오흐트는 멈추지 않고 다가왔다. 그걸 본 황제는 미소를 숨기며 검에 손을 데었다.

    오흐트가 검의 거리에 들어온 바로 그 순간,

    “죽어라!”

    황제는 검집에서 검을 빼 들며 기세를 살려 그대로 오흐트의 목을 베었다.

    샤아아악!

    최강이 아니더라고 해도 고명한 검사의 가르침을 받은 황제의 검에는 망설임이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그의 검은 유려한 곡선을 그리며 공간을 잠식해나갔다.

    “하하하하하하! 이게 나를 배신한 자들의 말로다. 다들 두 눈 똑똑히 뜨고 보아라.”

    승리를 직감한 황제는 미친 듯이 웃었다.

    어렸을 적부터 자신을 가르치던 스승의 말을 그대로 따랐으니까. 모든 변수를 없앤 상황에서 최고의 일격을 날렸으니 지는 게 오히려 이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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