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르 대혈전(6)
* * *
“숨어 있는 마족을 어떻게 처리했는지만 빠르게 듣고 싶다. 가능한가?”
유피테르는 앞뒤 내용을 전부 자르고 마족을 처리한 내용만을 요구했다.
“그래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에에…. 마스터 그건 좀 잔혹하지 않아? 이제부터가 재미있는 부분인데!”
갑작스러운 제안에도 미스틸은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오흐트가 칭얼거리며 투정을 부렸다.
유피테르는 그들의 마음을 모르지 않았다. 이야기꾼으로서 미스틸의 실력은 수준급이었으니까.
어지간한 음유시인의 노래보다 훨씬 몰입이 잘 되었다. 지금 당장 문화의 도시에 가면 떼돈을 벌 수 있을 정도로,
문제는 왜 황성에 들어가는 이야기를 하지 않느냐는 거였다. 미스틸은 원래 부탁했던 내용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드워프가 마족과 싸워서 이길 리는 없어. 일부러 자극적인 소재를 꺼내와서 화제를 돌리려는 건가?’
유피테르가 알기로 드워프는 지능이 떨어지는 종족은 아니었다. 대범함이 지나쳐서 자잘한 걸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일 뿐.
그러나 전투력이 낮은 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수천 명의 드워프 전사들이 달라붙어도 하급 마족 하나 이기지 못할 정도였다.
50명도 되지 않는 젊은 드워프들이 마족에게 복수한다는 이야기는 얼토당토않은 망상에 불과했다.
‘어차피 곧 밝혀지겠지.’
유피테르는 전투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면 직감이 제대로 된 결론을 내주리라 믿었다. 만일, 이걸 거부하기라도 한다면 더 들어볼 필요도 없었다.
그러나 상황은 유피테르의 예상과는 완전히 다르게 흘러갔다.
“알겠습니다. 그럼 필요한 부분만 이야기하겠습니다.”
미스틸은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서 요청을 받아들였다. 유피테르가 이런 질문을 할 거라는 걸 미리 알았던 것처럼.
꿀꺽!
미스틸은 테이블의 올려져 있던 냉수를 시원하게 들이켰다. 맥주를 마시는 듯한 호쾌함이 그대로 느껴졌다.
그리고서는 다음 부분을 이어서 말하기 시작했다.
“드워프의 마을을 나왔을 때, 무리 속에 마족이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고 의심했습니다. 그리고 슈바인이 죽었을 때 저는 확신했습니다. 마족이 있다는 걸 말입니다.”
* * *
파즈가 쓰러진 후, 드워프들은 얼어붙은 듯 아무도 움직이지 못했다.
슈바인이 죽었을 때의 광경이 그대로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마을에서 사랑을 받으며 자랐던 그들에게 고달픈 삶과 동료의 죽음은 큰 충격이었다.
그저 두려움에 덜덜 몸을 떨 뿐, 범인을 찾을 생각을 하지 못하는 상황.
이걸 해결하기 위해 앞으로 나선 건 다름 아닌 미스틸이었다.
“에메랄!”
“그렇게 친한 척 부르지 말아 주겠어? 난 너와 친구가 된 적이 없거든.”
미스틸은 한 드워프의 이름을 부르며 찾았다. 그러자 드워프 한 명이 냉기를 풀풀 흘리며 반응했다.
파즈만큼 몸집이 크지는 않았지만, 평범한 체형을 가진 여성 드워프였다.
그러나 품질 좋은 옷으로 치장했으며, 귀에는 인간이 주로 사용하는 귀걸이가 걸려 있었다.
그건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냈던 다른 드워프들과 명백하게 차이가 나는 모습이었다.
“우리가 친구였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나만의 착각이었던 걸까?”
“그게 무슨 소리지?”
“함께 작품을 완성했었잖아. 설마 그걸 잊어버린 건 아니겠지?”
“아아…. 그걸 말하는 건가.”
걸렸다.
애매한 표정을 지으며 웃어 보이는 에메랄을 보며 미스틸은 확신했다.
무슨 방법을 사용했는지는 모르지만, 이 드워프는 진짜 에메랄이 아니었다. 어느 부분을 보더라도 거짓의 향기가 풀풀 풍겨 코가 아플 지경이었다.
슈바인의 약혼녀였던 에메랄이라면 단칼에 말을 끊어버리거나, 처음부터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테니.
“에, 에메랄? 너 어디 아픈 거 아니지? 좀 이상해.”
“슈바인이 죽어서 슬픈 건 알지만….”
그 소리를 들은 에메랄 파벌의 드워프들이 깨어나 호들갑을 떨었다. 평소 그녀가 보여주었던 태도와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기 때문이었다.
상황이 묘하게 돌아가자 에메랄은 황급히 상황을 수습하고자 입을 열었다.
“너희들 이상하다? 우리는 동료인데 이런 식으로 한 명을 따돌리는 건 옳지 않아. 죽은 슈바인도 이런 걸 원하지는 않을 거라고.”
그러나 그건 완벽한 악수(惡手)였다.
“언제부터 그렇게 착한 드워프가 되었을까? 뭔가 이상하지 않아?”
미스틸은 에메랄을 몰아붙였다.
방금의 발언으로 에메랄이 드워프가 아니라 마족일 거라는 가설이 진실로 바뀌었으니까.
“넌 원래 드워프 사회에도 확실한 신분제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쪽이었잖아.”
“마, 맞아! 진짜 이상해.”
“혹시 미스틸의 말이 사실인 거 아니야? 슈바인이 죽은 것도 그렇고.”
“마족이 에메랄로 변신해있다는 말? 에이 설마.”
미스틸에게 향하던 의심의 눈길은 에메랄로 목표를 바꾸었다.
다른 드워프들은 미스틸을 믿고 싶지 않았다. 혼자만의 세계에 갇혀 선지자처럼 구는 사람을 좋아할 수가 없었으니까.
그러나 그의 말에는 틀린 점이 없었다.
“그런데 마족이 왜 굳이 우리들 중 하나로 변신해있어야 하는 거야?”
한 남성 드워프가 미스틸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건 지극히 타당한 말이었다.
애초에 마족을 만난 건 슈바인 혼자였다. 다른 드워프들은 마족의 비밀은커녕 무슨 일이 벌어지는 조차 몰랐다.
게다가 드워프들을 학살할 만큼의 힘을 보유한 마족들이 굳이 잠입해 있을 필요는 없었다.
잠입과 같은 정보전은 원래 피를 보기 싫어하거나, 상대방보다 힘이 부족할 때 사용하는 방법이었다.
마족과 드워프 같은 역학 관계에서는 불필요했다.
“그건….”
핵심을 찌르는 질문에 미스틸은 말문이 막혔다.
머릿속으로는 이미 완벽하게 받아치는 그림이 그려졌지만, 몸이 굳어버려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누군가가 강한 힘으로 목을 조르는 것처럼 호흡하기조차 힘들어졌다.
뭔가 당했다.
그런 기분이 들어 미스틸은 에메랄이 있던 곳을 쳐다보았다. 고개를 쉽게 돌릴 수는 없었으나, 의지가 육체를 뛰어넘어 기적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곳에 에메랄은 없었다.
“후후후후…. 버러지 같은 드워프 중에서도 괜찮은 놈이 하나 있었군요.”
어둠의 기운을 뿜어내는 여 마족만이 있었을 뿐.
“일단은 고맙군요. 슬슬 이 역할 놀이에도 흥미가 식어버려서 지루했거든요.”
“역할 놀이라고?”
미스틸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그러자 에메랄이었던 마족이 빙긋 웃으며 대답해주었다.
“그래요. 원래 알려줄 생각은 없었지만, 약간의 변덕을 부려보죠. 뭐든지 물어봐요.”
분명히 웃고 있었지만, 그녀에게서 쏟아져나오는 기운은 파괴적이었다.
전투와는 담을 쌓은 드워프들은 그걸 견뎌내지 못하고 하나둘 쓰러졌다.
“왜 우리들 사이에 숨어있었던, 거지?”
그건 미스틸도 예외는 아니었다.
어찌어찌 마나의 기운을 버텨내고는 있었으나, 편하게 말을 잇지는 못했다.
“으음…. 재미있으니까요?”
“마족들은 피를 보면서 즐거워하는 게 아니었나?”
살육과 파괴.
그게 드워프들의 구전 동화에 나오는 마족들의 취미였다.
누군가와 계약을 하거나 힘을 빌려주는 것도 전부 이 두 개의 행동으로 이어졌다.
“그건 마족마다 다르답니다.”
마족은 입맛을 다시면서 대답했다.
“이제 어찌할 거지 나를, 우리를 죽일 건가?”
“글쎄요 어떻게 할까요?”
마족이 질질 끌면서 해답을 주지 않자 미스틸은 애가 탔다.
은근슬쩍 주변을 둘러보니 서 있는 드워프들이 하나도 없었다. 마족의 마나에 모두 정신을 잃은 듯 보였다.
‘죽일 생각은 없는 건가?’
미스틸은 이 마족의 생각을 읽는 걸 포기했다.
인간과 드워프가 쉽게 이해할 수 없듯이, 마족과도 생각을 공유하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그럼, 잘 가.”
“…?”
그게 미스틸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 * *
“…이렇게 된 일입니다.”
“뭐야…. 그러면 마족을 제압한 게 아니야? 어떻게 살아 돌아온 거야.”
처절한 전투를 기대했던 오흐트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드워프가 마족을 이길리는 없었으나, 살아 돌아온 것이 현실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마족의 마나를 내뿜지도 않았고, 언데드의 반응도 없었다.
이겨서 돌아온 거라는 게 합당한 결론이었다.
“그럼 마족을 이기지 못하고 그냥 돌아온 건가?”
“네 맞습니다.”
미스틸은 그렇게 말하며 편지 하나를 유피테르에게 공손히 건네주었다.
“이게 뭐지?”
“눈을 뜬 저희의 앞에 두 장의 편지가 놓여있었습니다. 하나는 드워프에게였고 다른 하나는….”
“유피테르 아르테미스에게, 라니 흥미롭군.”
편지를 살펴보던 유피테르의 눈이 이채를 발했다.
아르테미스라는 성은 드워프들에게 알려준 적이 없었다. 게다가 미스틸의 표정도 장난을 치는 것 같아 보이지 않았다.
유피테르는 편지를 뜯고 안에 있는 내용을 빠르게 읽어내려갔다.
“마스터, 그거 무슨 내용이야?”
유피테르가 편지를 다 읽었다고 확신한 오흐트가 물었다.
늘 천진난만한 모습을 보여주는 오흐트라고 해도 중요한 일을 방해하지는 않았다. 유피테르나 칼리스토들에 비하면 부족한 거지 그녀가 살아온 세월의 무게는 가볍지 않았다.
“오흐트.”
“응…? 무슨 일인데 그런 눈빛으로 쳐다봐.”
유피테르는 눈을 마사지하며 대답했다.
“일이 좀 커진 것 같다.”
“얼마나?”
“이곳에 있는 건 라플라스가 아니었어.”
“뭐? 그게 정말이야?”
성국에서 벌어진 일들은 모두 라플라스를 배후라고 지목하고 있었다. 미리 입을 맞춰 놓은 것처럼 다른 존재의 흔적이 하나도 없었다.
마족 공작이 상상도 하지 못할 정도로 강하다고 하더라도 이런 일을 벌일 수 있는 존재는 셋뿐이었다.
마왕 티폰, 마왕비 에키드나 그리고 나태의 공작 라플라스
한 명은 그의 손으로 죽었고, 에키드나는 이런 짓을 꾸밀 마족은 아니었다. 그녀는 바실리의 봉인을 풀 열쇠를 노리고 있었다.
즉, 성국에 개입할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
‘당연히 라플라스가 나선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두 마족을 빼버리니 라플라스밖에 남지 않았다.
라플라스의 힘이라면 기억을 조작하는 것도, 반마족으로 변하는 약을 준비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게다가 인간의 기억을 바꿔서 전쟁을 유도하는 것마저 가능했다.
“그러면 나는 대체 누구랑 싸워야 하는 건데.”
답답함을 이기지 못한 오흐트가 유피테르를 졸랐다.
유피테르의 반응을 볼 때, 거짓말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그래도 무언가 숨겨진 사실이 있을 것만 같았다.
“자.”
유피테르는 대답 대신 그가 읽었던 편지 봉투를 오흐트에게 보여주었다.
편지의 내용을 알려주지 않고 봉투를 주자, 의문이 더욱 커졌다. 미스틸이 해준 이야기의 끝부분은 동화책에서도 나오지 않을 정도였으니까.
‘어디 보자 수신인은 유피테르 아르테미스고, 발신인은…. 어? 말도 안 돼. 어떻게 이 사람이.’
편지를 보낸 사람의 이름을 확인한 오흐트는 놀라서 의자에서 떨어질 뻔했다.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되는 이름이 그곳에 적혀있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