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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도 포기한 대공자-181화 (181/265)
  • 샤르 대혈전(4)

    * * *

    “세계를 조율하는 자라니. 거창하다 못해 눈이 핑 도는구먼. 혹시, 나이가 어떻게 되는가 자네.”

    노파는 눈을 흘겼다.

    원래 속이 빈 사람일수록 거창한 소개를 하는 법이었으니.

    시에라 황실의 그림자였기에 다양한 성격을 지닌 사람들과 일했었다. 허영심으로 가득 찬 귀족들을 상대하기도 했고, 아무것도 모르는 순수한 어린아이들을 보호한 적도 있었다.

    그 결과 이 말이 절대적인 진리라는 걸 뼈저리게 느꼈다.

    하지만….

    ‘테헤란을 그렇게 쉽게 잡다니 보통이 아닌 놈팽이군. 마법사는 근접전에서는 쓸모가 없었는데….’

    노파는 처음으로 불변의 진리를 돌파한 유피테르를 훑어보았다.

    달빛을 연상케 하는 아름다운 긴 머리카락. 완전히 같은 빛을 지닌 빨려들 것만 같은 눈동자까지.

    이 마법사는 선 자체가 가늘었다.

    시에라에서는 어떤 식으로 봐도 좋게 평가할 육체는 아니었다. 검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근육이 준비 돼 있어야 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시무시한 실력을 보여주었다.

    대검의 테헤란.

    유피테르가 가볍게 압도한 용병대장은 평범한 검사가 아니었다.

    거대한 검을 나무 막대기처럼 마음대로 휘두르는 악명이 자자한 범죄자였다.

    대검에 사라진 이들의 원한이 두터워, 죽은 게 하나도 불쌍하지 않을 정도로.

    “근데 할머니는 이름이 뭐예요?”

    오흐트는 천진난만하게 노파에게 물었다. 누가 보더라도 마음을 빼앗길 정도로 귀여운 미소였다.

    하지만, 노파는 어둠 속에서 살아왔던 사람이었다,

    고작 이런 공격에 넘어갈 정도로 서투르지 않았다. 오히려 이걸 역으로 이용할 정도의 여유가 있었다.

    “그림자에게 이름을 묻다니. 사회 공부는 제대로 하고 다니는 거니 꼬마 아가씨?”

    “피이….”

    “그래서, 아가씨는 왜 이런 지방까지 온 건가? 곱상하게 생겼으니 저 먼 지방의 귀족이라도 되는 것 같은데.”

    “에, 엣 귀족? 난 그런 게 아니라….”

    대화의 주도권을 확―하고 채간 노파는 멈추지 않았다.

    오흐트의 공격을 역으로 이용하며 유피테르 일행의 정보를 캐내려고 시도했다.

    ‘도와준 건 고맙지만, 시기가 너무 딱 맞는 건 역시 묘해. 굳이 도와줄 정도였나?’

    유피테르가 없었어도 테헤란을 제압하는 건 가능했다. 일부로 긴박한 분위기를 만든 거니까. 그랬다면 지금보다 더 큰 피해를 볼 건 틀림없었다. 뒤에서 지원해주는 그 사람들도 한숨을 푹푹 쉴 것이고.

    그런 일을 미리 방지해주었기에 수고를 던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굳이 나선 게 이상했다.

    원래 인간은 다른 이들에게 큰 관심을 가지 않으니까. 특히, 강자일수록 그런 경향은 더 심해졌다.

    압도적인 마법 실력을 갖추고 있다면 보통 이 자리를 뜨는 걸 가장 우선으로 생각할 거였다.

    마법사란 본디 이기적인 존재니까.

    “당신을 구해줬으니 말 좀 들어줄 수는 있는 거겠지?”

    오흐트의 공격이 들어가기는커녕 오히려 농락당하고 있자, 유피테르가 직접 나섰다.

    이쪽의 패만 그대로 오픈될 게 눈에 선했다.

    유피테르에게는 그림자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숨겨야 할 것들이 많았다. 게다가 오흐트는 이런 상황에서는 걱정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요새 아가들은 성질이 급하구먼. 그런 식으로 말한다고 상대가 넘어올 거라 생각하다니.”

    유피테르의 난입에도 노파는 여유만만이었다.

    꼬마 아가씨보다야 낫겠지만, 나이에서 나오는 말발을 이길 것 같지는 않았으므로.

    “생명의 은인에게 이런 식으로 대하는 게 시에라 제국이 좋아하는 기사도인가?”

    “내 앞에서 검의 정신을 운운하는 거 소용없다는 건 아가도 알잖아?”

    “양지로 나오지 못하는 이들이라도 시에라 제국의 정신을 부정하지는 못할 텐데?”

    “아가는 꽤 말을 잘하는구나?”

    이 은발의 마법사가 어떻게 대항할까.

    그걸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두근거렸다. 오래전에 죽었던 호승심이 되살아나는 듯했다.

    “정말로 대답해줄 생각이 없다면, 우린 이만 가지.”

    “뭐?”

    유피테르의 말에 노파는 깜짝 놀라 되물었다.

    격렬한 주도권 싸움이 이루어질 거란 예상이 그대로 빗나가버렸다.

    벙찐 노파를 보며 유피테르는 곧바로 말을 이었다.

    “어떻게 보였을지는 관심도 없지만, 우린 꽤 바쁘거든. 찾아야 할 사람도 있고, 만나야 할 사람도 있으니까.”

    유피테르는 선언하듯이 말을 한 후, 자리에서 일어나 푸른 종달새 밖으로 나가버렸다.

    “에? 이게 무슨 일이야? 어라? 그냥 가는 거야?”

    오흐트는 갑작스러운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혼란에 빠졌다.

    어찌할 줄 모르며 유피테르와 노파를 번갈아 가며 쳐다보았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갈등 끝에 오흐트는 유피테르의 뒤를 따랐다.

    * * *

    “마스터 이거 괜찮은 거야? 정보를 하나도 얻지 못하고 그냥”

    “걱정하지 마. 우리가 할 일은 변하지 않았으니까.”

    “에?”

    유피테르는 오흐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른 제안을 내놓았다.

    “오흐트 네가 이 정도로 배가 찰 리는 없지?”

    “당연하지!”

    “그러면 몇 군데를 더 돌아보자. 다른 사람이 하는 이야기를 잘 들어야 하는 거 알지?”

    “그 정도는 쉽지. 진짜 고마워 마스터.”

    유피테르의 말에 오흐트는 방방 뛰며 기뻐했다.

    푸른 종달새의 차와 케이크는 일품이었다. 험상궂은 사내가 이곳저곳 부술 때 몸이 근질거려서 참기 힘들 정도였다.

    그러나 그게 다른 카페를 가지 않을 이유가 되지는 않았다.

    맛있는 음식을 많이 먹을수록 행복한 기분에 빠져있는 시간도 길어지니까.

    “그럼, 갈까?”

    “응!”

    결정은 빨랐고, 행동은 더 빨랐다.

    유피테르와 오흐트는 다양한 가게들을 돌아다녔다.

    카페가 아니더라도 시에라 제국 특유의 분위기가 있다면 가리지 않았다. 단골들이 있어야 원하는 정보가 들어올 거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의 귀는 지나칠 정도로 밝아서, 주변인의 이야기를 듣는 건 포션을 마시는 것처럼 쉬웠다. 음식을 즐기는 것뿐인데도 가게를 찾아온 손님들의 이야기가 저절로 귀에 들어왔다.

    “요새 황제 폐하를 본 적이 없다는 게 사실이니? 황실 무투회의 개최식도 주관하지 않으셨다던데.”

    “쉬잇! 그런 이야기 함부로 하면 안 된다는 거 몰라? 요새 세상이 어느 때인데. 얘가 겁도 없어.”

    “왜왜? 대체 무슨 일인데?”

    오래지 않아 유피테르의 귀에 단서가 될만한 정보가 들어왔다.

    하지만, 황제가 마족의 손에 놀아나고 있다는 것 정도는 이미 알고 있었다. 이미 세이라 공주가 입에 올린 사실이었으니까.

    이 정도로는 부족했다.

    그러나 결정적인 이야기를 해준 손님들은 그 말을 하고 나서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마치 겁에 질려 꼬리를 내린 강아지들처럼.

    ‘진짜 중요한 부분은 입에 담지를 않는 건가?’

    유피테르는 차를 입속에 털어 넣었다.

    이미 식어버린 차는 본연의 맛이 다 날아가 버린 상태였다. 평소라면 이런 차에 한 마디 쏘아붙였을 테지만,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그림자들은 분명히 정보를 물어다 줄 거야. 바실리의 교육이 틀렸던 적은 없었으니까.’

    노파와 대화를 이어가지 않고 자리를 박차고 나온 건 다 이유가 있었다.

    “그림자들은 인간성을 죽인 명령을 수행하는 골렘 같은 자들이야. 하지만, 그들도 필사적으로 움직이는 경우가 있는데….”

    시에라 황실의 그림자들이 물불 가리지 않는 상황은 딱 하나였다.

    바로 황실에 위험이 닥쳤을 때였다.

    노파가 정말로 그림자라면 자신에 대해 온갖 조사를 할 게 분명했다. 의심스러운 마법사를 가만히 둘 리 없었으니까.

    유피테르 아르테미스.

    이 이름에 도달하게 되면 그림자들은 자신의 도움을 받으러 와야만 했다.

    얼음성에서 보여줬던 기적이 한 번 더 일어나기를 믿으면서.

    “마스터. 마스터? 뭐 하고 있는 거야.”

    “더 먹고 싶은 거 있어? 그럼 날 부르지 말고 그냥 시켜도 된다고 말했….”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상념에서 벗어난 유피테르는 반사적으로 말을 하다가 멈췄다.

    델포이에서 몸에 밴 습관 때문이었다. 오흐트가 만족하지 못하고 메뉴를 추가할 때 이런 식으로 졸랐었다. 그녀의 식욕에 끝이 없다는 걸 안 뒤로는 적당히 대답하며 넘겼었다.

    그러나 오흐트의 표정을 보니 디저트 이야기는 아닌 듯했다.

    고개를 돌려 쳐다보니 손가락으로 창문 밖을 가리키고 있었다. 유피테르는 눈에 힘을 모아서 바깥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무언가가 꿀렁거리는 게 보였다.

    ‘드워프들이군.’

    저 일렁거림은 아티팩트를 사용한 결과였다.

    아티팩트의 마나가 자연의 마나와 충돌하면서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평범한 사람은 구분할 수 없었으나, 유피테르는 초월자의 반열에 든 자였다.

    유피테르는 드워프들을 반만 믿었다. 태도가 오락가락하는 게 마음에 걸렸기에.

    그래서 불완전한 아티팩트를 주었었다.

    물론, 일반인들이 보기에는 그것만으로도 전설의 무기라고 착각할 정도였지만.

    “만나러 갈 거지?”

    “얼마나 능력이 있는지 한번 구경해보자고.”

    유피테르는 창문을 향해 손을 들어 보였다.

    그러자 일렁거림이 점점 뒤로 물러나더니 어느샌가 사라졌다. 그 방향은 큰 거리가 아니라 숲이 있는 쪽이었다.

    유피테르는 계산을 마치고서 오흐트를 데리고 드워프들을 찾아 나섰다.

    * * *

    유피테르가 숲속 깊은 곳에 도착하자 드워프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이곳을 임시 거점으로 잡기라도 한 건지 건물이 몇 채 지어져 있었다. 철제 집이 아니라 나무였는데도 꽤 단단해 보였다.

    유피테르와 오흐트는 드워프들의 안내를 받으며 건물 중 하나로 들어갔다. 그러자 앉아있던 미스틸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인사했다.

    “오셨군요. 유피테르 님.”

    “편안히 말해 너와 난 일시적인 협력 관계에 불과하니까.”

    “그럴 수는 없습니다.”

    미스틸은 유피테르의 말을 완강히 거절했다.

    말을 들을 생각이 없어 보이자 유피테르는 태도를 바꿔 자리에 앉았다. 무슨 의도인진 모르겠지만, 그의 연극에 따라주기로 했다.

    유피테르가 자리에 앉아 오흐트도 그 옆에 안착했고, 미스틸도 마찬가지로 행동했다.

    “그래서 성에 침입할 방법은 찾았어?”

    “그 정도야 너무나 쉬웠습니다. 그 전에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뭐지?”

    유피테르가 궁금해하자 드워프는 바로 말을 이었다.

    “마족들이 이곳에서 마왕을 소환하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마왕 소환.

    그건 웃음이 터져 나올 정도로 터무니없는 말이었다. 현재 마왕의 자리는 공석이었으니까. 마왕 티폰을 죽인 건 다름 아닌 유피테르 자신이었다.

    그 사실에는 한 점의 거짓도 끼어들 틈이 없었다.

    델포이에서 암약하던 분노의 공작 시트시거조차 마왕을 부활시킬 거라고 말했었다.

    이미 죽은 존재를 소환한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유피테르는 이상함을 감지했지만, 표정에 드러내지 않고 물었다.

    “너희들이 그걸 어떻게 알지?”

    “그게….”

    미스틸은 황제의 성에 잠입했던 이야기를 실감나게 풀어놓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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