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도 포기한 대공자-177화 (177/265)

드워프의 제국(5)

* * *

증오의 연쇄

아주 자그마한 증오의 불씨도 어마어마한 큰불로 이어질 수 있었다.

세아니아 대륙 곳곳에 충분한 장작이 쌓여 있는 상태였다. 대륙 전쟁 시기의 기억들은 여전히 아픈 손가락이었으니까.

당시의 인간들이 저질렀던 만행들은 쉽게 잊힐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그럼 어떻게 할 거야 마스터?”

오흐트가 유피테르의 눈치를 보며 물었다. 그녀의 마스터는 한 치의 고민도 없이 바로 대답했다.

“일단 드워프의 마을로 돌아가야겠지.”

“인간들은 구하지 않아?”

“대체 뭘 들은 거니. 인간들은 이곳에 있지 않다고 저 드워프….”

그러고 보니 이름도 묻지 않았네

유피테르가 그렇게 말하기 전에 드워프가 선수를 쳤다.

은발의 절대자에게서 흘러나오는 은은한 기운이 파멸적인 절망으로 바뀌는 걸 보고 싶지 않았기에.

만약 그렇게 된다면 또 하나의 슈바인이 되어 나뒹굴게 눈에 선했다.

“미스틸입니다.”

“그래, 미스틸이 이야기해줬잖아. 사라진 사람들은 마족들의 손아귀에 놓여 있다고.”

이제야 이름을 밝힌 드워프, 미스틸은 인간을 노예로 삼지 않았다고 밝혔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이곳에서 인간들로 노역을 시켰겠지만….”

기대는 언제나 어긋나는 법

야심 차게 마을 밖으로 나온 드워프들은 만만치 않은 현실과 맞닥뜨렸다.

시에라를 드워프의 제국으로 만들겠다고 선언했으나,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거의 없었다.

라플라스와 그 휘하에 있는 마족들처럼 인간을 지배해보려 했으나 실패했다. 애초에 전투력이 낮으니 제대로 된 위협조차 되지 않았다.

좋은 장비가 있어도 사용할 줄 알아야 원래의 위력이 나왔다.

드워프의 짤막한 몸에는 망치 계열 말고는 딱히 어울리는 무기가 존재하지 않았다. 당연히 온갖 검술에 통달한 검사들의 상대가 될 리 없었다.

그렇게 쫓기다시피 움직이다 도착한 곳이 이 성인데, 이것도 마족이 준비해준 거였다.

“이곳에 있어봤자 상황은 바뀌지 않는다는 거 이제는 알고 있겠지?”

“뼈저리게요.”

“그러면 우리랑 같이 돌아갈 텐가?

드워프의 마을로 돌아가자

유피테르의 말은 미스틸의 마음을 울리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그러기에 앞서 한 가지 문제를 해결해야만 했다.

“저희도 그렇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습니다. 하지만, 슈바인이…!”

그랬다.

이대로 아무 소득 없이 돌아가면 마을 어른들에게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갈기갈기 찢어져 버린 슈바인의 시체만 남았을 뿐.

큰소리 뻥뻥 치며 나온 것 치고는 수확이 제로였다. 아니, 마이너스에 가깝다고 말하는 게 옳았다. 슈바인 말고도 목숨을 잃거나 다친 자들이 꽤 있었으니까.

“너희들이 원한다면 마을까지 데려다줄 수야 있다. 선택해라.”

“잠시만, 아주 잠시만 시간을 주실 수 있으십니까? 부탁드립니다.”

미스틸의 간절한 부탁에 유피테르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기다리는 동안에도 시간은 째깍째깍 흘러가고, 라플라스의 계략도 더 큰 재해로 변해간다는 것 정도야 알았다.

하지만, 드워프 장로가 부탁한 것을 외면할 수야 없었다.

“…감사합니다.”

미스틸은 짧게 대답하고서는 몸을 돌려 동료들에게로 돌아갔다. 그리고서는 심각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아. 그냥 묻지 말고 돌아가 버리면 되지 않았어? 드워프의 문제는 드워프가 해결해야지. 안 그래 마스터?”

“저들도 혼란스러운 거니 시간을 줘야지. 게다가 슈바인을 죽인 건 우리니까.”

“아무리 그래도…!”

“잠자코 기다려. 아마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테니까.”

갑작스럽게 이야기를 끊고 회의를 시작하자 오흐트가 칭얼거렸다. 유피테르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기분을 풀어주었다.

* * *

유피테르의 말이 맞았다.

젊은 드워프들의 회의는 금방 끝이 났다.

드워프라는 종족은 목소리가 커서 고성이 오갈 거라고 예상했지만, 현실은 달랐다.

그들은 조용조용한 목소리로 의견을 나누었다.

“당신을 어떻게 부르면 되겠습니까?”

자리를 이탈했던 미스틸이 자리로 돌아와 유피테르에게 물었다.

무언가를 결심한 듯 그의 두 손은 주먹이 쥐어져 있었고, 입은 꽉 다물어져 있었다.

“유피테르라고 부르면 된다.”

“알겠습니다. 유피테르 님. 그러면 저희 드워프들의 소원을 들어주실 수 있으십니까?”

“소원? 우리가 그런 단어를 말할 만큼 친한 사이였던가?”

“맞습니다. 저희는 초면이었지요. 하지만, 이 부탁은 유피테르 님의 목적과도 관련이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 말에 유피테르가 반응했다.

“목적?”

“예. 저희 드워프를 분열시키고, 슈바인을 결국 죽게 만든 건 마족이지 않습니까?”

“계속해봐.”

미스틸에 말에 흥미가 생긴 유피테르는 잠자코 기다렸다.

“저희는 마족 놈들이 있는 거점 중 하나를 알고 있습니다. 위치를 알려드릴 테니….”

“거길 부숴달라고?”

“아닙니다. 아무리 유피테르 님이 강하다고 해도 그런 건 드워프의 의리가 아닙니다. 저희를 그곳으로 데려다주십시오.”

젊은 드워프들의 생각은 유피테르의 상상을 뛰어넘었다.

마족들을 무너트려달라고 부탁할 줄 알고 말을 끊었으나, 그 뒤에 놀라운 말이 이어졌다.

‘저지른 실수는 자신들만의 힘으로 해결한다. 이게 그들의 긍지인가.’

유피테르는 결의에 찬 눈동자를 보며 생각을 이어갔다.

검은 망치 일족은 모두 한결같았다. 드워프의 정신을 잊지 않고서 살아가는 듯했다.

바로 이게 유피테르의 마음을 자극했다.

‘지금 가진 정보만으로 라플라스의 위치를 찾을 가능성은 낮지. 그렇다면, 들어줄까?’

라플라스의 생각은 읽었지만, 그가 어디에 있는지는 또 다른 문제였다.

존재감 자체가 옅어 마나를 감지하기도 어려웠다. 칼리스토들 역시 이 점에 애를 먹고 있는 듯 보였다.

생각을 정리한 유피테르는 입을 열었다.

“좋다. 너희들을 데려가 주지.”

“감사합니다!”

젊은 드워프들은 한마음이 되어 성이 떠나가라 대답했다.

우렁찬 목소리에 오흐트의 기분도 절로 좋아졌다. 그래서 드워프들을 한곳으로 모았다.

“다 모였어? 어라, 한 명도 남지 않고 전부 갈 건가 봐?”

“그렇습니다.”

“거기 가면 99%의 확률로 너희들은 죽을 텐데. 그걸 알고도 가겠다는 거야?”

오흐트는 정말로 궁금했다.

아무리 보아도 드워프들은 전투에 적합하지 않았다. 대륙 전쟁 시기에도 기술적 차이가 나는 무구로 찍어 눌렀을 뿐이었다.

지금 상황에서 마족을 만난다는 건 세컨드 서클 마도사에게 덤비는 어린아이와 하나도 다르지 않았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슈바인의 의지를 도저히 져버릴 수가 없습니다.”

“그으래에…?”

오흐트는 미심쩍은 표정으로 드워프들을 둘러보았다.

대표로 대답한 건 미스틸이었지만, 다른 이들의 표정도 모두 같았다.

죽음을 받아들인 결사대 같은 모습이었다.

“오흐트.”

오흐트가 미간을 찌푸리고서 드워프들 하나하나를 보고 있을 때, 유피테르가 말을 걸어왔다.

“무슨 일이야 마스터?”

“일단 그들도 함께하도록 하자. 원하는 대로 해줘야지.”

“하지만 마스터…!”

잠자코 소원을 들어주라는 말에 오흐트가 반발했다.

오흐트의 뇌리에는 저기 있는 드워프들의 표정이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슈바인이 혼자 폭주할 때, 그들은 겁을 지레 먹고는 뒷걸음질 쳤었다.

그들 사이에 제대로 된 동료 의식은 없어 보였다.

‘그런데도 지금 복수를 하고 싶다고? 무슨 약초라도 잘 못 먹은 거야?’

저들의 변화에는 무언가 이유가 있다.

초대 성녀였을 때의 감이 그녀에게 강하게 속삭였다.

하지만, 칼리스토들에게 있어 마스터의 말은 절대적이었다. 그건 자리를 이어받은 2대째라도 마찬가지였다.

“오흐트. 알고 있겠지?”

“알았다고! 이들도 가면 되잖아. 거기 너 미스틸이라고 했나? 마족들이 있는 위치를 안다 그랬지?”

팽팽한 분위기 속에서 갑자기 지목당했는데도 미스틸은 쏜살같이 오흐트에게로 다가왔다.

“예. 맞습니다. 잠시, 이것을 보시겠습니까?”

미스틸은 품속을 뒤적거리더니 지도를 꺼내 넓게 펼쳤다.

촤르륵!

드워프가 가지고 다니기엔 거대한 지도가 땅바닥에 펼쳐졌다. 세아니아 대륙 전체를 그린 지도는 시중에 유통되는 것보다 낡아 보였다.

하지만, 세밀함만큼은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그려진 선 하나하나에서 드워프의 장인 정신이 그대로 드러났다. 도저히 가격으로 매길 수 없는 귀중품이었다.

그러나 오흐트는 그걸 보고도 별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냥, 처음에 떠오르는 말을 그대로 입에 담았다.

“이렇게 큰데 들고 다닐 수 있어?”

딱!

그런 오흐트에게 유피테르의 꿀밤이 날아왔다.

예상치도 못한 급습에 오흐트는 부어오른 머리에 치유 마법을 걸었다.

그렇게 세게 때린 것 같지도 않았는데 꽤 아팠다.

“히잉. 너무하잖아.”

“이야기 진행이 안 되니까 조용히 있어.”

유피테르의 말에 오흐트는 힝하고 울상을 지은 후, 입을 굳게 닫아버렸다.

‘삐진 건가. 나중에 케이크라도 잔뜩 먹여줘야겠군.’

유피테르는 오흐트의 마음을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마족의 정보를 듣는 게 더 중요했다.

어차피 오흐트는 달콤한 것들과 차를 주면 언제 그랬냐는 듯 원래대로 돌아올 게 분명했다. 치유 마법까지 썼으니 더할 나위 없었다.

그래서 오흐트를 방치하고서 미스틸에게 마족의 위치를 물었다.

“네가 가고 싶다는 곳이 대륙 어디라는 거지?”

“바로 이곳입니다.”

미스틸의 짧은 손가락은 지도를 헤치며 쭈욱 나아갔다. 시에라 제국의 영토 안으로 들어오자 그 속도가 조금 줄어들었다.

손가락이 멈춘 건, 바로 시에라 제국의 수도이자 왕성이었다.

“시에라 제국의 수도 샤르? 거긴 검사들도 많고 엄청난 방어 체계를 자랑할 텐데. 이곳에 마족이 있다고?”

유피테르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맞습니다. 이곳 샤르에 마족들이 숨어 있습니다. 제 목숨을 걸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믿어주십시오.”

“목숨이라….”

미스틸의 말을 믿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델포이 아카데미나 성국 크레이타의 선례가 있었으니까.

고삐가 풀린 마족들은 원하는 게 있으면 어떤 방법을 사용해서라도 손에 넣었다. 옴팔로스를 꼬드겼고, 교황을 죽이고 새로운 종교를 만들기까지 했다.

이제 마족들을 막을 수 있는 건 유피테르 자신과 칼리스토들 밖에 없었다.

“좋다. 네 말을 믿도록 하지.”

유피테르는 상황이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 두기로 결정했다. 인과에 간섭하는 라플라스가 상대라면 어렵게 생각하는 게 악수일 수도 있었으니까.

“감사, 감사합니다!”

허락이 떨어지자 미스틸의 표정이 환해졌다.

“그럼 이동하도록 하지.”

이동할 곳이 정해지자 유피테르는 망설이지 않았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마나를 모아 공간 이동을 준비했다.

번쩍!

유피테르와 오흐트 그리고 50명 남짓한 드워프들은 강렬한 빛과 함께 사라졌다.

그들의 목적지는 시에라 제국의 수도 샤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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