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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도 포기한 대공자-169화 (169/265)
  • 드워프의 마을, 슈레겔(3)

    * * *

    종자들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세이라 공주를 만나러 가본 적이 있었는지 그들의 발걸음은 거침이 없었다.

    유피테르와 오흐트는 두 종자와 몇 번이나 부딪칠 뻔했다. 속도가 너무나 느렸기 때문이었다. 그 후, 두 종자는 빠르게 속도를 올려 다시는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았다.

    아마, 무언가 특별한 훈련을 받은 듯했다.

    검문을 진행했던 방에서 계단을 사용해 위로 올라가자, 얼마 지나지 않아 세이라의 방이 나왔다.

    “여기서 잠시만 대기해 주십시오.”

    남자 종자는 일행을 멈춘 뒤, 여자 종자와 눈빛을 교환했다. 그리고서 방문 쪽으로 걸어가 노크했다.

    똑똑.

    “세이라 대장님. 손님들을 모셔왔습니다.”

    “그래? 들어와도 좋아.”

    일련의 과정을 본 유피테르는 속으로 감탄했다.

    ‘생각보다 규율이 잘 잡혀 있는 거 같군. 그 기사만이 이상한 건가.’

    종자의 실력도 나쁘지 않은 수준이었고, 성벽이나 기타 방어체계의 정비도 잘 이루어지고 있었다. 더구나 대장인 세이라는 기사와 전혀 다른 성격의 사람인 것 같았다.

    왕족이 예약되지 않은 손님을 받는 건 대단한 일이었다. 평소 자기 관리가 확실하다는 증거였으니까.

    “들어가시죠. 귀족님.”

    남자 종자가 문을 연 채로 유피테르에게 말했다. 아마, 같이 들어가지는 않는 것 같았다.

    “수고했다.”

    “고마워! 그럼 나중에 또 봐.”

    유피테르는 자연스럽게 종자들의 행동을 받아들였고, 오흐트는 해맑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 후, 두 사람은 세이라 공주가 기다리는 방 안으로 들어갔다.

    손님들이 목적지에 도착한 걸 확인한 남자 종자는 소리가 나지 않게 살살 문을 닫았다.

    * * *

    세이라가 업무를 보는 방은 공주가 사는 곳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살풍경했다.

    흔히 걸어두는 화가들의 그림 대신 다양한 종류의 식물이 자리를 차지했다. 그 외에는 장인이 벼린 듯한 검 하나가 눈길을 잡아끌 뿐, 기사의 방과 유사했다.

    “무슨 일로 여기까지 왔나. 유피테르 아르테미스? 아, 그 의자에 앉으면 되네.”

    세이라 공주는 방안을 살펴보던 유피테르에게 말을 걸었다. 그리고 손으로 손님용 의자를 가리켰다.

    유피테르와 오흐트는 가볍게 목례를 하고서 자리에 앉았다. 왕족이 사용하는 가구인데 생각보다 푹신푹신하지는 않아 조금 놀라웠다.

    “궁금한 게 몇 가지 있어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왔습니다. 폐가 되었을까요?”

    왕족의 앞이었기에 유피테르의 말은 절로 공손해졌다.

    아르테미스의 가주가 되었다고 해도 여전히 왕족보다는 아래였다. 설령 그게 리투아 제국보다 작은 나라라고 해도.

    게다가 가주의 자리에 올랐다는 사실은 아직 외부에 알려지지 않은 상태였다.

    “궁금한 거라. 그게 뭐지?”

    세이라 공주가 웃으면서 말을 걸자 유피테르는 잠시 고민했다.

    어떤 식으로 말을 걸어야 할지 애매했기 때문이었다. 타국의 사람이 치부를 들추는 건 그리 보기 좋은 그림은 아니었다.

    금발과 청안을 지닌 그녀는 전형적인 시에라의 문화를 따라는 사람인 듯 보였다.

    혹시라도 추측이 틀리면 그 뒤의 일은 생각하기조차 싫었다.

    그런 유피테르 대신에 오흐트가 나섰다.

    “원래 기사들이 이렇게 돈을 원해? 되게 노골적이던데.”

    “아하. 꼬마 아가씨는 굉장히 직설적으로 말을 하는군그래.”

    “꼬마 아닌걸! 내가 너보다 나이가 많다구.”

    “하하. 늘 여동생이 있었으면 했었는데, 너 내 여동생 안 할래?”

    세이라 공주는 오흐트의 반말도 시원하게 웃어넘겼다. 심지어, 오흐트를 여동생으로 삼고 싶다는 욕망도 숨김없이 드러냈다.

    ‘완전히 기사스러운 성격은 아닌가? 욕망을 숨기지 않는 건 마족 같네.’

    오흐트가 벌어준 시간을 유피테르는 소홀하게 쓰지 않았다. 최대한 빠르게 정보를 분석해서 그녀의 성향을 알아내려고 노력했다.

    패턴 정립이 어느 정도 끝나자, 유피테르는 대화에 참여했다.

    “리투아 제국이나 아르메 제국도 썩은 부분이 분명히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처럼 대놓고 돈을 요구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건 충고인가?”

    “아닙니다. 제가 느낀 걸 솔직하게 말씀드리는 것뿐입니다.”

    “흐음…?”

    세이라 공주는 유피테르를 빤히 쳐다보았다. 마치, 그의 진심이 무엇인지 알아내려고 하는 것처럼.

    “그렇게 쳐다보셔도 저는 이미 마음에 둔 사람이 있으니까요.”

    유피테르는 부담스러운 눈빛을 이기지 못하고 가볍게 농담을 던졌다.

    분위기를 풀기 위한 도박이었다.

    “하하하하! 이거 걸작이군, 정말로 걸작이야. 자신의 외모를 무기로 삼아 이런 소리를 할 줄이야. 리투아 제국에 부러운 인재가 있군.”

    의외로 이런 식의 농담을 좋아하는지, 세이라 공주는 크게 웃었다. 그런 공주를 향해 오흐트가 대답을 촉구했다.

    “그래서 정답은 뭐야. 공주님?”

    “우리 동생은 생각보다 성격이 급하군그래. 그런 모습도 치명적이야.”

    세이라 공주는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오흐트를 쳐다보더니 책상 한편에 있던 서류를 유피테르에게 던져주었다.

    “경계 기사단 일지?”

    엉겁결에 서류를 받은 유피테르가 서류 맨 앞장에 적힌 글자를 읽었다.

    그건 시에라 제국의 국경을 지키는 기사단의 행동일지였다. 아르테미스 마법사단에도 비슷한 서류가 있었기에 확실했다.

    “호오… 공용어가 아닌데도 읽을 수 있는 건가? 이거 자네도 탐이 나는걸.”

    세이라 공주는 시선을 유피테르에게로 돌렸다.

    ‘이거 실수한 건가….’

    공주의 말대로 이 서류는 대륙 공용어가 아닌 시에라 제국의 언어로 적혀 있었다.

    시에라는 리투아나 아르메 제국보다 크지 않았기에, 굳이 그 나라의 언어를 공부하는 자는 없었다. 사실, 대륙 공용어만 제대로 구사할 줄 알아도 잘만 살아갔으니까.

    수요가 없으면 자연스레 공급이 떨어지는 건 당연한 섭리였다.

    “이런 건 외부인에게 보여줘서는 안 되는 비밀 서류 아닙니까? 높으신 분들이 싫어하실 텐데요.”

    실수해버린 유피테르는 화제를 돌렸다. 귀찮은 질문이 들어오기 전에 잘라버리는 게 나았다.

    상황은 유피테르가 생각한 대로 움직였다.

    “높으신 분들 위에 있는 하늘이 바로 나야. 걱정하지 말고 그거나 읽어봐.”

    “알겠습니다.”

    그녀가 이 서류를 자신에게 준 것에는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렇게 판단한 유피테르는 서류를 읽는 일에 정신을 쏟았다.

    은발의 마스터가 혼자만의 세계로 빠져들자, 심심해진 오흐트는 세이라 공주에게 말을 걸었다.

    “공주님 혹시 여기에는 케이크나 차 같은 건 없어?”

    “우리 동생은 달콤한 음식들을 좋아하는구나. 또 새로운 정보를 얻었네.”

    “맞아 맞아. 입에서 사르르 녹는 게 얼마나 행복한데!”

    “아쉽게도 여기에 그런 기호품들은 없거든. 혹시, 녹차라도 좋아할까? 조금 쓴 건 싫어?”

    “아냐! 그것도 좋아.”

    서로 하고 싶은 말만 하고 있지만, 의외로 두 사람은 대화가 잘 통했다.

    오흐트와 더 친해지고 싶었던 세이라 공주는 책상 구석에 있던 벨을 울렸다.

    챠랑ㅡ.

    청아한 소리가 울리자, 여성 종자가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어 또 보네! 안녕. 무슨 일이야?”

    먼 타국에서 아는 얼굴이 나타나자 오흐트가 반갑게 말을 걸었다. 하지만, 그녀는 세이라 공주만을 쳐다보았다.

    “시키실 일이 있으십니까?”

    “이 애가 먹을만한 것들 좀 챙겨오렴. 그리고 녹차도 부탁해.”

    “알겠습니다.”

    여성 종자는 명령을 입력하고서는 뒤돌아서 방 밖으로 나갔다. 발소리가 하나도 들리지 않는 게 인상적이었다.

    “히잉…. 내가 싫어진 거야? 왜 내 말을 무시하는 건데!”

    오흐트는 볼을 빵빵하게 부풀렸다. 여성 종자에게 무시당해 심통이 났다는 걸 온몸으로 보여주는 중이었다.

    “종자들은 제 일에 충실한 것뿐이야. 우리 동생은 화가 난 것도 이렇게 귀여울까.”

    “진짜로? 그럼 내게 화난 건 아닌 거지.”

    “그럼 그럼.”

    탁!

    세이라 공주와 오흐트의 대화가 이어지는 와중 큰 소리가 났다.

    100장이 넘는 두꺼운 서류를 전부 섭렵한 유피테르가 책상에 올려놓으면서 난 소리였다.

    “혹시, 제가 대화를 방해한 겁니까?”

    “아니. 어차피 널 기다리고 있었어. 그걸 다 읽은 소감이 어때?”

    “이 서류의 데이터가 전부라면 지금 시에라 제국은 멸망하기 바로 직전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이라 공주가 원하는 건 진실한 대답이었다. 그런 분위기를 느낀 유피테르는 가감 없이 대답했다.

    “어떤 점이 가장 위험하다고 판단했어?”

    “주민들의 실종과 드워프에 대한 기억의 상실입니다.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건 아무래도….”

    “마족이겠지.”

    자신과 생각이 겹치자 유피테르는 깜짝 놀랐다.

    평범한 사람은 고작 이 정도의 단서로 마족을 유추할 수는 없었으니까.

    그러나 놀라움은 이제부터가 진짜였다.

    “시에라 제국의 백성들은 진짜가 아니야. 전부 만들어진 가짜에 불과해. 누군가가 시에라 제국을 노리고 있는 게 확실하다.”

    시에라 제국의 사는 사람들이 가짜라는 말에 유피테르의 머릿속에 불현듯 한가지 가설을 떠올랐다.

    ‘나라 밖으로 나간 시에라 제국의 사람들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돼서 돌아왔어. 공통점은 드워프에 대한 기억이 사라졌다는 것 정도인가.’

    서류 속 정보들은 대부분 평범한 내용이었으나, 이상한 점이 분명히 존재했다.

    기괴한 현상은 바로 이곳, 국경 검문소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임무 중에 기사 한 명이 사라졌는데, 아무리 찾아도 도통 보이질 않았다. 반쯤 포기한 상태로 기다리자, 갑자기 돌아와서는 딴사람이 된 것처럼 행동했다.

    이상한 음식이라도 주워 먹었나 싶었지만, 이런 현상은 점점 더 많은 사람에게서 발생했다.

    세이라 공주가 눈치챘을 때는 많이 늦은 상황이었다.

    “설마, 이곳에서 근무하게 된 이유가 이 현상 때문입니까?”

    “맞아. 이걸 알아챈 사람이 거의 없었거든. 게다가 누굴 믿어야 하는지 점점 어려워졌으니까.”

    세이라 공주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전부 의심하면서 사는 건 피곤하고 힘든 일이었다. 며칠이야 그걸 유지할 수 있겠지만, 시간이 지속될수록 피로가 쌓였다.

    그리고 그 끝은 사람들 사이에서의 고립이었다.

    하지만, 아직도 의문이 남았다.

    ‘이건 처음 만난 사람에게 갑자기 말할만한 내용이 아니야.’

    자신과 세이라 공주는 사이에는 전혀 접점이 없었다. 그렇다고 숨긴 비밀을 알아챈 것 같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굳이 이런 식으로 시험하지 않았을 테니까.

    사건에 대한 의심은 세이라 공주에게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혼자 고민해봤자 달라지는 건 없었기에, 유피테르는 공주에게 직접 물었다.

    “왜 이런 이야기를 제게 하시는 겁니까. 저는 타국의 귀족이자 델포이의 교수일 뿐인데요?”

    “성국 해방 전선을 도와준 사람이 바로 당신이잖아. 유피테르 아르테미스.”

    세이라 공주는 웃으면서 엄청난 위력의 폭탄을 터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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