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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도 포기한 대공자-168화 (168/265)
  • 드워프의 마을, 슈레겔(2)

    * * *

    소란이 잦아들자 예상과는 달리 빠른 속도로 검문이 이루어졌다.

    유피테르와 오흐트가 있던 줄도 예외는 아니었다. 앞에서 조용히 기다리던 사람들은 하나둘 검문에 들어갔다.

    “마스터는 어떻게 이 줄이 가장 빠를 거라는 걸 알았어?”

    오흐트가 옆의 줄을 확인하며 물었다.

    양옆 어디를 둘러보아도 유피테르와 오흐트가 제일 먼저 검문을 받을 게 분명했다. 바로 앞사람만 끝나면 그들의 차례였다.

    반신반의하며 기다렸더니, 유피테르의 말이 현실이 되어 돌아왔다.

    시에라 제국에 비슷한 시간대에 들어온 자 중에서 정말로 일등이었다.

    “그건 비밀이야.”

    “에에…. 치사해 마스터는 바보.”

    유피테르는 이유를 말해주지 않았다. 오흐트는 입을 삐죽였지만, 검문을 맡은 기사들의 손짓에 활짝 웃으며 뛰어갔다.

    “흐름을 읽어줄 만 알면 간단히 해결할 수 있는 문제야.

    유피테르는 오흐트의 뒤를 따라가며 작게 중얼거렸다.

    검사들의 제국답게 검문소도 필요한 물품만 갖춰져 있었다.

    기사의 종자 두 명이 몸수색을 맡았고, 기사는 자리에 앉아서 대기했다. 그는 은색의 약식 갑옷을 입은 상태였다. 옆에는 언제든지 뽑을 수 있도록 검이 놓여 있었다.

    기사의 위로 시에라 제국의 문양이 휘황찬란하게 빛났다.

    “신분을 증명할만한 것이 있으신가?”

    자리에 앉은 기사가 몸수색을 마치고 온 유피테르와 오흐트에게 물었다.

    기사라고 보기에는 앉은 자세도 삐딱했고 말투도 시정잡배와 다를 것이 없었다.

    “여기 있습니다.”

    모욕적인 언사에 순간적으로 오흐트가 마법을 사용하려고 했으나, 유피테르가 손으로 제지했다.

    아직, 그들은 델포이 아카데미 소속이었으니까.

    “호오… 델포이 아카데미의 교수와 아카데미생이시로군. 무슨 일로 이런 촌 동네까지 오신 건가?”

    기사는 건들건들한 태도 속에서도 할 일은 제대로 했다. 마치, 그것이 그의 룰 인 것처럼.

    “스카우트입니다. 시에라 제국에서 꽤 뛰어난 마법사가 있다고 들어서요.”

    “마버어업사? 역시, 첨단 마도 공학이 살아 숨 쉬는 곳에서 오신 분은 표현력부터 다르구만?”

    “시에라 제국도 자연 풍경이 아름답고, 독자적인 기술로 성장한 곳 아닙니까?”

    “그렇게 띄워줘도. 들여보내 주기가 싫은데.”

    기사는 그렇게 말하며 한쪽 손을 펴서 은근슬쩍 내밀었다. 손바닥이 위를 향해 있었다.

    그걸 본 유피테르는 기사가 원하는 걸 깨달았다.

    ‘돈을 달라고…?’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시에라 제국은 무(武)를 숭배하는 유일한 국가였다. 용기 있는 행동을 권했고, 비겁한 행동을 싫어했다. 리투아나 아르메 제국과 마찬가지로 그들만의 특성이었다.

    제국의 역사가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비리 역시 늘어난다는 것 정도야 유피테르도 알았다.

    그러나 제국의 첫인상을 결정할 수 있는 이곳에서 저런 태도를 보이는 게 믿기지 않았다.

    “이거 정말 델포이 출신이 맞나. 이 신분증명서 조작한 거 아니야?”

    유피테르가 묵묵부답이자 기사는 트집을 잡기 시작했다.

    “맞습니다. 맞습니다. 자세히 보아하니 이들은 범죄자 같은 얼굴입니다.”

    “아니면 도피 여행 중인 귀족일지도 모르죠.”

    남자 종자와 여자 종자가 기사의 말을 든든하게 받쳐주었다. 그들의 생사여탈권을 껄렁껄렁한 기사가 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좋아도, 싫어도 다른 선택지 자체가 없었다.

    “허어…. 이런. 범죄자들이 시에라 제국에 들어오게 할 수는 없지.”

    기사는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옆에 있던 검을 쳐다보더니 오른손으로 뽑았다.

    치링ㅡ

    검은 생각보다 손질이 잘되어 있는지 검집에서 부드럽게 딸려 나왔다.

    ‘돈에 타락했어도 기사는 기사인가.’

    기사를 바라보는 유피테르의 눈이 이채를 띠었다.

    태도도, 성격도, 말투까지 그 어느 한 곳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검을 다루는 것만큼은 진심인 듯 보였다.

    “자. 범죄자들이여. 마지막으로 할 말은 있나?”

    기사는 멋들어지게 검을 휘둘러 유피테르의 목 앞에서 정확하게 멈췄다.

    “다른 이들에게도 이런 식으로 행동하나?”

    “천만에…. 너희들 같은 놈들에게만 이럴 뿐이다. 나는 정의로운 기사거든. 사회의 어둠을 먹고 자라는 이들은 미리미리 싹을 잘라내야 하지 않겠나?”

    유피테르가 물었으나, 기사의 귀에 그 말이 닿지 않았다.

    이미 기사의 머릿속에서 유피테르와 오흐트는 범죄자로 낙인찍힌 지 오래였다. 유피테르와 오흐트의 말을 들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드워프의 문제도 그렇고 뭔가 이변이 벌어지고 있군. 천검 학원의 검호들과는 완전 딴판이야.’

    트리아와 칼리스토들이 조사한 정보와 실제 시에라 제국은 너무나도 달랐다. 교차 검증을 위해 델포이 도사관에서 수집한 정보와도 일치하지 않았다.

    이런 일을 벌일 수 있는 건 오직 마족뿐이었다.

    라플라스가 드워프의 도시에서 무언가 일을 꾸미고 있다는 이스캐리엇의 말은 사실인 듯했다.

    “으응…. 아직도 대답할 생각이 없나? 범죄자답구먼. 그럼 잘 가라.”

    기사는 잘 정돈된 검을 양손으로 고쳐 쥐고서 유피테르를 일도양단하려고 했다.

    유피테르 식 얼음 마법 ― 빙벽

    푸르른 얼음이 솟아나며 그대로 검을 휘감았다.

    “시동어만으로 마법을 쓸 수 있다니. 쳇. 역시 델포이 출신인가.”

    예고도 없이 나타난 유피테르의 마법에 기사는 당황했다.

    시에라 제국에도 마법이 없는 건 아니었으나, 비주류였기에 현저하게 유행에 뒤처져 있었다. 그래서 생긴 오해였다.

    유피테르의 얼음은 시간이 지나도 녹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검을 집어삼키고 기사에게까지 마수를 뻗쳤다.

    기사는 어쩔 수 없이 검을 포기하고서 유피테르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고작 저 정도 시선에 움찔한 유피테르가 아니었다. 그는 마족도 웃으면서 얼려버린 초월자였으니까.

    “다시 내 소개를 하도록 하지.”

    유피테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옆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오흐트도 마스터를 따라 했다.

    “범죄자에게 이름도 있었나? 하, 아직 세상이 좋구만. 시에라의 준귀족인 기사 앞에서 감히!”

    검을 잃었어도 기사는 여전히 기세등등했다. 두 명의 종자는 기사의 양옆으로 이동해 머릿수를 맞춰주었다.

    “델포이 제국 아르테미스 공작가 가주 대리. 유피테르 아르테미스다.”

    유피테르의 단호한 목소리가 방안을 울렸다.

    “뭐…라고?”

    기사는 마치 이상한 말을 들은 것처럼 되물었다.

    “아직 사태 파악이 되지 않았나 보군? 아니면, 제대로 신분증명서를 보지 않았던 거거나.”

    “그럴 리 없다!”

    기사는 책상에 있던 유피테르의 서류를 집어 들고서 빠르게 훑어 내려갔다.

    가장 상단에 분명히 유피테르 아르테미스라고 적혀 있자 기사는 두 눈을 의심했다. 그가 처음 이 서류를 검토했을 때에는 그런 말이 없었으니까.

    “이 서류 자체가 조작이구나! 델포이 제국과 같은 강대국의 귀족이 제대로 된 호위 없이 들어올 리 없다.”

    당황했어도 기사는 나름 머리를 굴렸다.

    좌천된 이후 계속 국경에서 근무했었다. 이 때문에 평민들만큼이나 귀족들도 많이 보았었다.

    기사의 기억 속에서 귀족들은 늘 권위 의식에 가득 차 있었다. 상인 연합을 제외하면 귀족들은 거기서 거기였다. 조금은 괜찮은 귀족이 있었을 뿐.

    이런 식으로 혼자 다니지 않았다.

    “아직, 정신을 덜 차렸나 보군. 이걸 보여주면 믿을 텐가?”

    “무슨 짓을….”

    유피테르는 가지고 있던, 반지 아티팩트에 마나를 불어넣었다. 그러자 초록색이었던 눈 색이 서서히 은색으로 변했다.

    “은발에… 은안… 이라니. 설마 진짜 아르테미스 공작가?”

    실시간으로 변하는 유피테르의 모습을 본 기사는 말을 더듬었다.

    아르테미스 공작 가문에는 워낙 흉흉한 소문이 많이 돌았다. 반쯤은 카르멘 때문이었으나, 전통적으로 냉혹한 판단으로 유명했다.

    차가운 북쪽의 날씨를 겪으며 자라서 그렇다고 호사가들이 말할 정도였다.

    “이제, 자신의 잘못을 알겠나?”

    주도권이 유피테르에게 넘어간 지 오래였다.

    “살려주십시오. 제발. 목숨만 살려주십시오.”

    “제게는 곰 같은 남편과 토끼 같은 딸이 두 명이나 있습니다.”

    흘러가는 사태를 파악한 두 명의 종자는 유피테르 앞에 무릎을 꿇고서 빌었다.

    “그, 그래도. 타국의 귀족이라고 한들 시에라 제국에서는 의미가 없다. 힘만이 전부란 말이다!”

    막다른 길에 몰리자, 기사는 억지를 부렸다.

    신분증명서, 얼음 마법 그리고 은발과 은안까지.

    백 명에게 물으면 백 명 모두 아르테미스 공작가의 사람이 맞다고 긍정할 정도로 완벽한 증거였다.

    “어쩔 수 없나.”

    유피테르 식 얼음 마법 – 얼음 감옥

    검을 붙잡고 있던 얼음벽에 마나가 흘러들어가자 모습이 변했다. 눈 깜짝할 새 푸른 감옥을 완성하고서는 기사를 가두었다.

    “거기서. 자신의 잘못이 무엇인지 뉘우치고 있도록.”

    기사를 옴짝달싹 못 하게 만들어 버린 뒤, 유피테르는 종자들에게 물었다.

    “이곳의 총 책임자는 누구지? 그도 이렇게 타락했나?”

    “아, 아닙니다.”

    “총 책임자는 시에라 제국의 공주님이십니다.”

    유피테르의 질문에 종자들은 감히 눈을 마주치지도 못했다. 그래도 원하는 정보에는 꼬박꼬박 잘 대답했다.

    “공주?”

    종자들의 말에 대답한 건 오흐트였다.

    그녀가 가진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일국의 공주가 이런 변경에 있는 건 처음이었다. 국경을 지키는 일은 기사들에게도 힘든 일이었다.

    “그 이분은…?”

    남자 종자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오흐트 역시 어딘가의 귀족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니까.

    초대 성녀였던 오흐트는 아름다움과 귀여움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 겉으로만 보면 영락없는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란 귀족 집 딸처럼 보였다.

    “그렇게 신경을 쓰지 않아도 돼 이 친구는 그냥 델포이 아카데미생이니까.”

    유피테르는 가볍게 말했지만, 그 의미는 너무나 무거웠다. 델포이 아카데미 출신은 세아니아 대륙 곳곳에서 중용받았으니까.

    오히려 중소 귀족보다 델포이 아카데미 출신이 더 득세하는 때도 종종 있었다.

    “맞습니다. 막내 공주이신. 세이라 공주님께서 이곳의 총 책임자십니다.”

    말을 잇지 못하는 남자 종자 대신 여자 종자가 오흐트의 질문에 답을 해주었다.

    “그럼. 그 세이라 공주가 있는 곳으로 안내를 좀 해줄 수 있나?”

    “얼마든지요. 바로 가시겠습니까?”

    “명색이 제국의 공주인데 약속도 잡지 않고 만날 수 있는가?”

    “예. 문제가 있으면 찾아오라고 공언까지 하셨습니다.”

    그렇게 유피테르 일행은 국경 검문소 대장인 세이라 공주를 만나러 자리를 이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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