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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도 포기한 대공자-166화 (166/265)
  • 낙원 해방(3)

    * * *

    성국의 일을 끝마친 유피테르는 델포이 아카데미가 있는 파르니소스 산으로 이동했다.

    전이문을 사용해서 움직여야 할 정도로 먼 거리였으나, 유피테르에게 걸리면 이 정도는 차가운 포션 먹기였다.

    “델포이는 여전히 델포이로군. 일 처리가 빨라.”

    산 정상에 도착한 유피테르는 곧바로 옴팔로스가 있던 자리를 향해 움직였다.

    델포이 상층부가 약속한 일 처리를 확인해야만 했다.

    과거와 달리 옴팔로스는 많은 역할을 부담하지 못했다. 그러나 아직도 강한 아티팩트라는 것도 사실이었다.

    결계 유지나, 아카데미에 필요한 에너지를 생산하는 건 평범한 아티팩트들에게는 불가능했다.

    터벅터벅.

    몇 번이나 다녀봤던 길이기에, 막힘 없이 옴팔로스의 앞에 도착했다.

    우우우우웅!

    유피테르는 압도적인 마나를 뿜어내냈다. 어떠한 마법도 사용하지 않았는데 공기가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아직, 에고가 돌아오진 않았나.”

    무언의 시위에도 옴팔로스는 반응이 없었다. 여전히 본래의 역할을 할 뿐이었다.

    그 후, 몇 번이고 검증의 시간을 보냈다.

    사람이었다면 피를 토하면서 살려달라고 할 정도의 압박이었으나, 옴팔로스는 결국 통과하고야 말았다.

    옴팔로스의 에고가 부활하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할 듯 보였다.

    “그럼, 다음은 부학장인가.”

    짧게 중얼거린 유피테르는 서둘러서 다음 목적지로 향했다.

    옴팔로스를 확인했으니 당연히 귀환했다는 보고를 할 순서였다. 한 소리 들을 게 뻔했지만, 한 번쯤은 겪어야만 하는 일이었다.

    * * *

    학장의 집무실.

    본래라면 피티아가 유피테르를 반겨주어야 정상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건강상의 이유로 휴가 중이었다.

    때문에 제프리스 학장 대리가 대신 사무를 보고 있었다.

    똑똑.

    집무실에 도착한 유피테르가 문을 두드렸다.

    아무리 강한 힘을 지니고 있다고 해도 델포이에서는 특별 교수에 불과했으니까.

    “들어와도 좋다.”

    반쯤 건성인 대답해 유피테르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너, 넌? 대체 어디서 무엇을 하다 지금에야 돌아왔는가!”

    유피테르의 얼굴을 확인한 제프리스 부학장의 눈은 급격하게 커졌고, 언성은 높아졌다.

    예고도 없이 찾아온 유피테르를 보니 울화통이 터지는 것만 같았다.

    “죄송합니다. 레아교도들의 눈을 피하다 보니. 조금씩 늦어졌습니다.”

    “자네의 실력이라면 곧바로 도망칠 수 있었던 것 아닌가? 게다가 연락 한 번 정도야 할 수 있지 않은가!”

    사실, 유피테르는 소식을 전하긴 했다. 오흐트와 패스로 연결되어 있기에, 생존 신고 정도는 남겼었다.

    제프리스의 의문은 이상한 게 아니었다.

    상층부와 교수들은 유피테르의 실력을 직접 눈으로 봤기 때문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교류전에 대표로 참여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네가 여기서 놀고 있는 사이에, 성국을 원상태로 해놓고 놨다고.’

    유피테르는 유피테르대로 할 말이 많았다.

    교황의 부탁을 들어줘야 했던 건 물론이고, 낙원교를 몰아낼 방법을 찾느라 여기저기 뛰어다녔다. 지원군도 제대로 바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 와중에 레아교의 남은 이들을 찾아다니며 규합했고, 낙원교 대사제들과 사도들을 세상에서 지워버렸다.

    그야말로 눈코 뜰 수 없이 바쁜 나날이었다.

    물론, 이 내용을 델포이 아카데미에 곧이곧대로 이야기해줄 수야 없었다.

    성국 해방 전선에 유피테르가 개입했다는 건 극히 소수에게만 알려진 비밀이었으니까.

    “그나저나 성국의 상황은 어떻지? 여전히 낙원교라는 신흥 세력이 레아교보다 위인가?”

    유피테르의 마음속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듯한 질문이 칼 같은 박자로 들어왔다.

    “아닙니다. 성국이 반격에 성공해서 지금은 조금 다른 상황이라고 봅니다.”

    “그래에…?”

    제프리스 학장은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빠졌다.

    ‘조사한 자료와 같아. 다른 이가 변장한 것은 아닌가. 아티팩트 역시 거짓말이 아니라고 판단한 건가.’

    제프리스는 유피테르가 혹시 마족이 아닐까 의심했다.

    낙원교의 뒤에 마족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델포이 아카데미 조사대가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마족들이라면 변장할 수도 있었기에, 조심하라고 이야기가 나온 상태였다.

    그래서 피티아 학장실에 갖춰지어 있던 거짓말 탐지기를 이용해봤다. 성국에서 만들어낸 아티팩트는 신뢰할 수 있었으니까.

    그 결과는 그의 말이 단 하나의 거짓도 들어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만일, 유피테르 교수가 마족이었다면 아티팩트가 먼저 반응했을 것이다.

    “그래서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는가?”

    “특별 교수직을 사퇴하고 싶습니다. 애초에 언제든지 떠날 수 있다고 피티아 학장님과 약속되어 있었습니다.”

    유피테르는 피하지 않고 본론을 던졌다.

    “지금은 아직 학기 중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는가? 교류전이 취소되었다고 해도 그건 외부의 일일 뿐일세.”

    “하지만, 피티아 학장님이 제게….”

    “조용히 하게나. 지금 학장의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은 바로 나일세.”

    제프리스는 유피테르의 말을 딱 잘라서 거절했다.

    저렇게 완강하게 나와버리자 유피테르도 딱히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사실, 제프리스의 말에 불합리한 점은 없었다. 피티아와 약속을 한 건 사실이지만, 교수의 처우는 학장의 업무 중 하나였다.

    학장의 업무는 지금 제프리스의 고유한 영역이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어색한 분위기를 깬 건 의외로 제프리스였다.

    “그럼 이렇게 하는 것이 어떤가. 아카데미 생들이 인정하는 수준의 대체자를 찾아오게.”

    “대체자요…?”

    의외로 좋은 제안이 나오자 유피테르가 진짜인가 싶어 되물었다.

    “내가 알기로 특별 교수직은 강의가 있는 이상 함부로 아카데미를 떠날 수 없게 되어 있을 걸세. 게다가 자네를 그리워하는 아카데미생들도 꽤 많다네.”

    제프리스의 말에 유피테르는 잊어버리고 있던 사람들을 떠올렸다.

    바로, 마나의 이해 강의를 듣던 아카데미생들이었다.

    첫 시간에는 유피테르를 인정하지 않으려 했지만, 차차 그의 강의에 빠져들었다.

    유피테르가 외모가 출중한 것은 물론 강의력도 뛰어났기 때문이었다. 열정적으로 강의에 임하고 아카데미생의 눈높이에서 친절하게 설명해주니 싫어할 수가 없었다.

    델포이 아카데미는 학년이 올라갈 때마다 하위의 성적을 지닌 이들을 탈락시키기 때문이었다.

    ‘어쩔 수 없나. 어차피 몇 달만 더 있으면 되는 거니. 정보 수집은 칼리스토들에게 맡길까.’

    유피테르는 곧바로 떠나려던 계획을 수정했다.

    델포이에 조금 더 근무하는 대신, 칼리스토들에게 힘을 실어주기로 했다.

    강의를 듣던 아카데미생들과 정이 들어버렸으니까.

    “알겠습니다. 그러면 이번 학기는 끝마치고 가겠습니다.”

    “잘 생각했네. 어차피, 교류전이 취소되었기에 대부분 자습하고 있을 거네. 그럼 수고하게.”

    “네. 감사합니다.”

    유피테르는 제프리스에게 인사를 하고서 방 밖으로 나왔다.

    그 후, 따사로운 햇살을 맞으며 배정된 교수 연구실로 천천히 걸어갔다.

    “어?”

    연구실에 도착한 유피테르는 걸음을 멈췄다. 그곳에 누군가가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델포이에 돌아온 걸 아는 사람은 두 명뿐이었다.

    한 명은 부학장이자 학장의 업무를 맡은 제프리스였다. 행정 총 책임자이기도 했기에, 반드시 만나야만 했다.

    다른 한 명은….

    “마스터어어어어어어어!”

    문 앞을 지키며 기다리던 그자는 발소리에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유피테르의 얼굴을 잠시 확인하더니 엄청난 속도로 달려왔다.

    …다름 아닌 오흐트였다.

    “내가 없는 사이에 고생했다.”

    유피테르는 울먹이는 오흐트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어 주었다.

    그가 없는 사이에 오흐트는 순탄치 않은 삶을 살았다. 카테리나를 돌보는 건 물론, 매일같이 불려 다녔다.

    유피테르와 연결된 ‘패스’를 아티팩트로 위장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실종된 교수와 연락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기에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로 바빴다. 그렇게 좋아하던 케이크도 입맛이 없어 못 먹을 정도였다.

    유피테르는 오흐트를 연구실 안으로 안내했다.

    오랜만에 방문한 거지만, 안에는 먼지 하나 없이 깨끗했다. 청결을 유지하도록 와주는 마법진 덕이었다.

    그 후, 케이크를 꺼내주고 홍차를 타주며 이야기를 나눴다.

    “그럼 당분간은 이곳에 있는 거네?”

    유피테르의 이야기를 다 들은 오흐트는 어이가 없다는 듯 물었다.

    “맞아. 어차피 길어야 두 달이야. 실제로는 그것보다 빠를 거고. 너희들에게 미안하네. 내가 더 움직여야 하는데.”

    이게 유피테르의 진심이었다.

    바실리가 봉인된 이후 칼리스토들은 제대로 쉴 수 있는 시간조차 갖지 못했다.

    원래 임무가 없을 때는 칼리스토의 저택에서 시간을 보내곤 했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이 모든 게 유피테르가 지닌 힘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마스터 그런 표정 짓지 말랬지. 지금 최선을 다하는 중이잖아. 인간치고는 진짜 잘하고 있는 거야.”

    재빠르게 홀케이크 하나를 해치운 오흐트는 유피테르에게 다가가 등을 딱―소리가 나게 쳤다.

    “오흐트?”

    “이러는 건 마스터답지 않아. 원래대로 행동하라고.”

    초대 성녀의 일격은 매서웠지만, 곧바로 따뜻한 충고가 이어졌다.

    모두에게 희망을 주었던 그녀의 말솜씨는 여전했다. 비밀로 하고 있을 뿐, 그 당시의 능력이 어디로 사라지지는 않았으니까.

    “그래, 이러는 건 나답지 않군.”

    그걸 들은 유피테르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델포이에 남게 된 이상, 후회하는 시간조차 아까웠다.

    라플라스는 지금까지의 마족들과는 달랐다. 대담하면서도 허를 찌르는 방식을 사용했다. 대륙 전쟁 시기의 마족과 짜증이 날 정도로 닮아 있었다.

    실제로, 유피테르가 강제로 교류전에 참가하게 되지 않았다면 성국은 이미 마족들의 땅이 되었을 게 뻔했다.

    라플라스를 사냥하기 위해서는 특단의 대책이 필요했다.

    ‘혼돈 마법…. 그것도 확실히 문제가 되겠군.’

    이스캐리엇이 보여주었던 혼돈 마법이 마음에 걸렸다. 그것도 라플라스의 무기가 될 수 있었으니까.

    빛과 어둠이 합쳐진 혼돈 마법을 생각하자 문득, 카테리나의 상태가 궁금해졌다.

    “카테리나는 어때. 여전히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거야?”

    “응. 내 마법으로 치유하고는 있는데. 일어나지는 못해. 그래도 어디 아픈 건 아니야. 내가 직접 확인했고 치료했는데 못 믿는 건 아니지?”

    유피테르는 오흐트를 믿었지만, 카테리나가 걱정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래. 치유 마법만큼은 네가 세상에서 제일 잘 다루니까. 바실리도 인정할 정도였잖아?”

    “헤헤….”

    유피테르의 칭찬에 오흐트의 콧대가 드높아졌다. 기분이 좋아진 그녀는 유피테르에게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할 거야? 드워프의 마을에 있다고 해도 라플라스를 찾는 건 쉽지 않을걸.”

    “사냥의 기본은 언제나 인내심이야. 한번 기다려보자고.”

    그렇게 유피테르는 다음 계획을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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