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원 해방(2)
* * *
“우선, 진정하게. 보는 나까지 숨쉬기 힘들 것 같으니. 그분이라니 어느 분을 말하는 거지?”
레아교의 사제는 달려온 평신도를 진정시켰다. 이렇게라도 말리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평신도의 모습은 꽤 지저분했다.
옷 여기저기에는 흙먼지가 묻어있었고 머리카락은 산발이 되어 원래 스타일을 도저히 가늠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최대한 빨리 소식을 전하려 하는 의지가 분명하게 느껴졌다.
“그, 그게. 조력자님이십니다.”
평신도는 숨을 고르고서 설명을 추가했다.
성국 해방 전선이 기다리는 인물은 두 명이었다.
유피테르와 프레이야.
어느 쪽도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로 중요한 자들이었다.
유피테르는 성국 해방 전선을 시작시켜준 은혜를 갚아야 될 사람이었다. 그가 없었다면 레아교는 역사에서 이름이 지워질 운명이었다.
성녀 프레이야는 이 모든 상황을 해결할 유일한 인물이었다. 성국을 재건할 명분을 가진 유일한 사람이기도 했다.
그런 그들의 앞에 로브를 입은 유피테르가 나타났다.
“어이… 저거 혹시?”
“저게 형씨가 말하던 그 사람인가? 교황의 명을 받아 비밀 임무를 수행하던가 하던 그 사람 말이야.”
“쉿. 들리겠다. 조용히 말해.”
유피테르가 등장하자 쉬고 있던 레아교도들이 쑥덕거렸다.
그냥 지나치기에는 유피테르와 관련된 소문이 너무나도 많았다. 심지어, 소문 하나하나가 믿기 힘든 수준의 이야기였다.
교황의 숨겨둔 자식이라거나, 성녀의 남자친구일지도 모른다는 건 귀여운 수준이었다.
그중에서는 유피테르가 ‘신의 사도’라는 말까지 존재했다.
낙원교의 반란에 화가 난 레아가 그녀의 의지를 대변할 자를 내려보냈다는 이야기였다.
“이쪽으로 오시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너는 가서 쉬어도 좋아. 정말 수고했어.”
레아교 사제는 유피테르를 지휘관 전용의 막사로 안내했다.
여기서는 보는 눈이 너무 많아 제대로 된 이야기를 나누는 게 불가능한 수준이었다. 조력자의 의견에 따라 성국에 미래가 바뀔지도 모르니 보안이 생명이었다.
물론, 소식을 갖고 온 신도에게 칭찬의 한마디를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거 낙원교가 사용하던 물건인가? 내가 지원해준 아티팩트 중에 이런 건 없었는데.”
“맞습니다. 이건 배신자들이 사용하던 것이지요. 꽁무니가 빠지게 도망가느라 이걸 챙길 시간이 없어 보이더군요.”
막사로 들어간 두 사람의 첫 대화 소재는 의외의 것이었다.
지휘관용 막사는 원래 낙원교가 사용하던 물건이었다. 어디서 구해온 건지 제국에서 사용하는 것과 비슷했다.
가뜩이나 휴식할 공간도 마땅찮았는데, 이걸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오히려 이런 막사가 더 있었으면 하고 생각할 정도였다.
‘이건 리투아 제국 스타일이군. 꽤나 여기저기에 동료들을 만들어놨군. 라플라스.’
막사 안을 구경하던 유피테르는 이게 리투아에서 만들어졌다는 걸 알아챘다.
막사의 쾌적함은 곳곳에 그려진 마법진 덕에 유지되었다, 그런데 그게 리투아 제국의 방식과 99% 일치했다.
‘리투아 제국 귀족들도 조사를 해봐야겠군. 할 일이 늘었어.’
유피테르는 머릿속에 리투아 제국의 귀족들도 넣어놓았다. 고여서 썩어 있는 거라면 솔직히 가만히 놔둘 예정이었다.
그러나 마족이 연관되었다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유피테르가 리투아 제국의 썩은 부분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 때, 사제가 말을 걸어왔다.
“저기….”
“무슨 일이지?”
“저희가 전투에서 계속 승리해서 낙원교를 몰아붙일 거라는 걸 알고 계셨습니까?”
유피테르에게 묻는 사제의 목소리가 바르르 떨렸다.
레아교의 숨결이 서린 곳에서 낙원교를 몰아내 기쁜 건 사실이었다.
수적으로도 불리했고, 제대로 된 훈련을 받지도 못한 일반 신도들이 이뤄낸 쾌거였다.
그러나 이 모든 게 그의 머릿속에서 기정사실이었던 거라면 무서웠다,
‘유피테르 아르테미스 당신은 어디서 뭘 하고 있었던 겁니까?’
사제는 이 질문을 차마 입에 담지는 못하고 속으로 삼켰다.
오스티안을 포함한 3명의 사제는 조력자의 정체가 유피테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아카데미 교류전에도 참여했기에 유피테르가 ‘그 대공자’라는 것도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일련의 사건에서 유피테르가 보여준 힘은 상상을 초월했다. 조디악의 마도사들도 하지 못했던 일을 너무나 쉽게 해냈다.
조력자는 신이 보내준 구원자인 게 틀림없다.
신도들이 농담 삼아 말하던 그 말이 사제들에게는 완전히 다르게 느껴졌다.
낙원교의 탄생과 신도들의 배신 그리고 땅을 적시는 피와 눈물.
이 모든 게 창조신 레아의 의지라고.
만약 그렇다면 인간들에게 진정한 의미의 자유는 없다는 말이 되었다.
“어느 정도는.”
유피테르는 순순히 인정했다.
그는 성국에서 이뤄질 전투의 승자로 레아교를 점찍었다. 개입한 이상, 패배를 용납하지 않았으므로.
유피테르는 사제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너희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낙원교는 대단한 세력이 아니었어. 단지, 성국의 취약한 점을 잘 찔렀을 뿐이지.”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아직, 내 말 안 끝났어. 어차피 내가 도와주는 건 여기까지야. 성녀를 믿고 움직여.”
“뭐, 뭐라고요?”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사제가 멍청히 되물었다. 하지만, 유피테르는 그 이상 대답해주지 않았다.
‘아직 성전이 끝난 것은 아니야. 여기서 지원이 끊기면 모든 게 허사로 돌아갈 수도 있다.’
그렇게 생각하자 퍼뜩 정신이 들었다. 아직, 레아교는 승리한 게 아니었다.
“저희는 아직 교황청을 회복하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낙원교에는 대사제들과 사도 이스라는 자가….”
“사도 이스캐리엇은 이미 죽었고, 대사제들도 딱히 너희들을 방해하지는 못할 거다.”
쿵!
가장 큰 장애물들이 사라졌다는 유피테르의 말에 사제는 놀라서 넘어졌다.
초대 교황과 비슷할 정도의 힘을 보여주던 사도가 생을 마감했다는 말은 믿기 어려웠다.
하지만, 그 말은 한 게 유피테르라는 게 마음에 걸렸다.
유피테르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일들을 손쉽게 이뤄냈으니까.
넘어졌던 사제는 손을 털고서 일어났다. 너무 과한 반응을 보였나 싶어 부끄러웠다. 그래서 슬쩍 유피테르의 반응을 확인했다.
의외로 유피테르는 사제의 상태를 거들떠보지 않았다. 고개를 돌려 다른 쪽을 쳐다보는 중이었다.
그 순간, 사제의 머릿속에서 오해의 씨앗이 무럭무럭 자라났다.
‘부끄럽지 않도록 일부로 시선을 피해주신 건가.’
늘 차갑게만 행동하던 조력자 유피테르에게서 햇살 같은 따뜻함이 느껴졌다.
그러자 유피테르의 말이 다른 방식으로 이해되기 시작했다.
‘이 어리석은 신의 종이 드디어 당신의 위대한 뜻을 이해했습니다. 성국의 일의 마무리는 레아교의 자들이 스스로 해야 한다는 뜻이시군요.’
이 사제는 레아교의 경전에 지나치게 심취해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유피테르를 경전 속 이야기와 겹쳐보았다. 위기의 상황에서 나타난 구원자의 이야기는 너무나 매력적이었으니까.
물론, 사제의 생각과 유피테르의 생각은 완전히 달랐다.
‘프레이야의 얼굴을 보지 않고 가는 게 마음에 걸리긴 하네. 델포이 아카데미에도 생존 신고를 해야지.’
유피테르는 델포이 아카데미에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고민하는 중이었다.
그가 강력한 마법사라는 건 교수들 사이에서도 유명한 일이었으나, 빨리 복귀하지 않은 데도 이유가 필요했다.
점점 착각이 커질 때 즈음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유피! 너 이곳에 있다며. 잠깐 나 좀 봐. 내가 할 말이 있다는 데 왜 막아. 나 프레이야야. 성녀라고.”
“서, 성녀님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지금 두 분은 작전 회의 중….”
그 소리를 들은 사제는 표정을 고쳤다. 망상할 때의 풀린 표정은 사라지고, 진지함만이 남았다.
“성녀님을 안으로 모셔라.”
사제의 허락에 프레이야가 막사 안으로 들어왔다.
“유피테르 너 설마 내 얼굴도 보지 않고 돌아가려고 한 거야?”
“저, 성녀님 지금은 그런 이야기를 할 때가….”
“넌 가만히 있어! 어른들 이야기하는데 끼지 말고.”
“네, 네엡.”
사제가 프레이야에게 뭐라 말하려고 했지만, 그녀의 기백에 압도당해 입을 닫았다.
가볍게 사제를 격추한 프레이야는 유피테르에게로 다가갔다.
그러자 은안에 어울리는 아름다운 외모가 그대로 눈에 들어왔다. 오랜만에 보는 거지만, 늘 새롭고 짜릿했다.
“네가 다음 순서였을 뿐이다. 그나저나 몸은 괜찮나?”
성녀의 돌발적인 습격에도 유피테르는 능숙하게 말을 돌렸다.
“거짓말.”
유피테르의 가면은 성녀에게 통하지 않았다. 역시, 사랑하는 여성의 직감은 강력했다.
“그런 것보다는 성국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어때. 교황의 부탁대로 낙원교의 상층부를 모두 없앴다.”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사실이겠지.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건데?”
다른 이들과 다르게 프레이야는 유피테르의 말을 그대로 신뢰했다.
“성국 재건은 네가 알아서 해라. 거기까지는 도와주지 않아도 되겠지?”
유피테르는 프레이야를, 아니 성녀를 시험했다.
세 개의 기둥 중 한 명이라는 명분은 확실했으나, 그녀의 마음가짐이 더 중요했다.
독하게 마음먹지 않으면 제2의 낙원교가 나타날 수도 있었으니까.
위기 때마다 유피테르가 구해줄 수는 없었다.
“당연하지. 교황청만 되찾고 낙원교를 몰아내면 내가 알아서 할 생각이었다구.”
“그래? 추기경도 없고 템플 기사도 없는 상황에서 성검도 없는 네가 뭘 할 수 있지?”
“허업….”
성검 오를레앙이 없어졌다는 소리에 사제가 반응했으나, 분위기를 읽어 곧바로 소리를 죽였다.
“성검이 없다고 누가 그래?”
프레이야는 그렇게 대꾸하고서는 아공간을 열어 오를레앙을 꺼내 들었다.
성검을 확인한 유피테르의 눈동자가 이채를 발했다.
‘에이프릴에게 돌려받은 건가. 하지만, 아직 소유권을 완전히 되찾지는 못했나 보군.’
성검은 본래의 아름다움을 완전히 되찾지 못한 상태였다. 전반적으로 하얀색이었으나 물이 든 것처럼 군데군데 검은색이 남아있었다.
아직, 마족의 마나를 다 빼내지 못한 탓이었다.
“그렇게 자신 있으면 난 돌아가도록 하지. 여기서 더는 지체할 수 없거든.”
“바쁘다면 어쩔 수 없지.”
의외로 프레이야는 유피테르를 붙잡지 않았다. 성국을 도와달라던 예전과는 확실히 다른 모습이었다.
“혼자서 잘할 수 있겠어?”
그녀의 태도에 놀란 유피테르가 물었다.
“난 혼자가 아니야. 성국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은걸. 두고 봐. 네가 상상하는 것보다 더 좋은 나라가 되어줄 테니까.”
그 말을 들은 유피테르의 표정에 미소가 지어졌다.
“그래. 나중에 다시 연락하도록 할게. 사제 당신도 수고했어.”
그 말을 끝으로 유피테르는 성국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이제, 델포이 아카데미의 일을 해결할 차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