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이스캐리엇(10)
* * *
우우우우웅!
마나 폭풍이 휘몰아치며 유피테르의 옆에 흑과 백의 소녀가 나타났다.
고대 정령들은 각자 이미지에 어울리는 마나를 화려하게 선보였다. 고작 그것만으로도 유피테르를 갉아먹던 혼돈의 마나들을 단숨에 분해해버렸다.
“뭐, 뭐냐!”
예고도 없이 나타난 두 명의 소녀들을 보는 이스캐리엇의 눈동자가 지진이 난 것처럼 흔들렸다.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지금 와서 새로운 카드를 꺼내 든다고? 그런 건 나는…. 아니, 초대 교황도 하지 못했던 일이다!’
대체 몇 개의 카드를 숨기고 있는 것인가.
현재의 서클 체계는 인류 쇠락의 증거나 마찬가지였다. 고대 마법과 다르게 한 가지 속성에만 몰두했으니까.
그렇다고 해서 고대 시절보다 더 강한 위력을 가진 것도 아니었다.
12명의 조디악도 고유 결계를 제외한다면 그리 강하지 않았다. 지속 시간도 짧았고, 혼돈 마법으로 충분히 상대할 수 있었다.
“네 마법을 박살 낼 실마리를 찾아버렸네. 어떡하나?”
아직 이스캐리엇의 마법을 완전히 파훼하지는 못했다. 그러기에는 마법식의 구조가 너무 복잡하고 기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피테르는 자신감이 넘쳤다.
‘이 두 명이 지닌 힘은 혼돈 마법과 완전히 상극이야.’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정령들의 도움을 받으면 이스캐리엇을 상대하는 게 쉬워질 거라는 걸.
그가 이런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아직 아니야.]
[불길한 기운을 빨리 지워야 해.]
정령 소녀들은 아직 만족하지 못한 듯 유피테르를 재촉했다.
아직 모습을 드러낼 타이밍이 아닌데도 힘을 빌려준 건 혼돈의 기운 때문이었다.
저 힘은 고대 시절에 있던 ‘그것’과 너무 닮았다. 지금의 인류에게 저건 재앙 그 자체였다.
한시라도 빨리 저걸 치워버리고 싶었다.
‘힘을 빌려줘. 르타모스, 아크토스.’
유피테르는 마음속으로 두 정령에게 부탁했다.
이런 싸움에서는 기회를 놓치지 않는 게 무엇보다 중요했다. 혼돈 마법의 원리를 파악하지 못한 게 아쉽긴 했다.
하지만, 이제 그런 건 상관이 없었다.
정령들의 힘을 이용하면 바실리와의 약속을 깨지 않을 수 있었으니.
[응. 좋아. 너라면 괜찮을 거 같아.]
[너에게서는 왠지 그리운 향기가 나니까.]
유피테르는 정령들의 말을 듣고는 마나를 끌어모아 마법을 펼쳤다.
지금까지 보여주었던 푸른 마나가 아니었다.
푸르른 마나에 희고 검은 마나가 섞여 있었다. 세 개의 마나는 천천히 섞여 하나의 색으로 거듭났다.
그건 달빛을 머금은 아름다운 색이었다.
그 마나를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졌다. 마치, 어머니의 포근한 품처럼.
유피테르 식 특제 마법 – 달의 경계
유피테르는 새로운 마나를 사용해 고유 결계를 완성했다. 카르멘의 앞에서 보여주었던 바로 그것이었다.
물론, 그때와는 다르게 빈틈 하나 보이지 않는 완벽한 형태였다.
“마, 말도 안 돼! 이 결계를 능가하는 마법은 이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된다!”
이스캐리엇은 유피테르의 고유 결계를 보며 경악성을 내질렀다.
혼돈 마법은 최강이었다.
그러나 생각과는 달리 유피테르가 만든 달의 결계는 이미 혼돈 마법체로 집어삼키고 있었다.
“돼!”
유피테르는 무한히 쏟아져나오는 마나로 혼돈 마법을 억눌렀다.
고대 정령이 보여준 새로운 세계는 유피테르가 상상했던 건 이상이었다. 위력도 위력이었으나, 완전히 다른 차원의 마법을 사용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몸에 차오르는 전능감에 혹시라는 생각이 들어, 봉인 마법이 걸려있는 반지를 쳐다보았다.
‘제대로 작동하고 있네.’
예상과는 달리 봉인을 담당하는 아티팩트는 부서지지 않았다. 여전히 왼손 약지에서 강한 존재감들 드러내는 중이었다.
그렇다면 이건 오로지 가주의 펜던트와 고대 정령의 힘이라는 말이었다.
쿠우우우웅!
단 한 번의 마법으로 혼돈의 결계는 소리소문없이 사라져버렸다.
“이, 이럴 수가 몇백 년을 준비했던 내 꿈이. 이런 식으로….”
혼돈 마법이 박살이 나자 이스캐리엇의 다리가 휘청거렸다.
모든 열기가 한순간에 사라지고 허무함만이 남았다.
‘창조신 레아를 만나기 위해 모든 걸 포기했다. 그리고 처음부터 다시 준비했다. 이 계획이 고작 저런 애송이에게 막혀버릴 줄이야.’
유피테르가 평범한 마법사가 아니라는 건 알았다.
이 계획을 준비하며 알게 된 자들이 유피테르의 정체에 대해서 알려주었으니까.
하지만, 그래 봐야 이제 20살이 넘은 꼬마일 뿐이었다. 레아교의 살아있는 역사인 자신과 같은 선상에 놓을 수는 없었다.
“결국, 나는 또 신에게 선택받지 못한 것인가.”
“뭐?”
“원래 내가 초대 템플 기사가 되었어야만 했다! 그 더러운 위선자 자식이 아니라! 내가 되었어야 창조신님을 슬프게 만들지 않을 수 있었을 거란 말이다!”
그러나 한 맺힌 이스캐리엇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상냥한 사람은 이곳에 없었다.
“네 말대로 했다고 해서 결과가 달라질 것 같은가? 천만에. 그건 너만의 상상일 뿐이다.”
유피테르는 달의 결계를 유지한 채 차갑게 대꾸했다.
“초대 성녀가 정녕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았는가!”
“아니, 그런 말은 못 들었다. 너를 정말로 안타깝게 여겼던 거라면 오흐트. 아니, 마리아가 내게 미리 말해줬겠지. 너라면 걔의 성격을 모르지 않겠지.”
레아교 초대 성녀 마리아.
그게 오흐트가 숨기고 싶어 하는 과거였다.
성녀로 활동했었던 일들을 싫어하는 건 아니었다. 다만, 그 이름이 지닌 무게가 너무 무거웠다.
오흐트는 초대 교황도 레아교 사람들과 함께하는 시간을 진심으로 좋아했다, 남들과는 다른 특별한 힘을 지닌 그녀도 레아교 안에서는 평범한 사람이 될 수 있었으니까.
대륙 전쟁을 겪으며 고통에 신음하는 사람들을 구하는 게 자신의 사명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성국 크레이타가 완성되자 사람들이 변하기 시작했다.
세상을 구원한다는 본래의 뜻은 옅어졌고, 무엇이 더 이득인지가 판단의 기준이 되었다.
그래서 오흐트는 신에게 기도했다. 창조신 레아는 그녀의 소원을 들어 성검을 내려주었다. 오흐트가 사라지더라도 그녀의 역할을 대신할 자를 선발하기 위해.
“웃기지 마라! 성녀가 날 기억하지 못할 리 없다. 그런 허튼수작에 넘어가지 않겠다. 성녀를 불러와라! 그녀의 입으로 직접 듣겠다.”
이미 유피테르가 유리한 상황인데도 이스캐리엇은 포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적반하장의 태도를 보이며 성녀를 불러오라고 떼를 썼다.
“미안하지만, 오흐트는 더는 레아교와 연관되고 싶어 하지 않아. 이리로 데려올 수는 없겠는걸?”
유피테르는 그의 어리광을 받아줄 생각이 없었다.
그는 바실리가 맺었던 계약을 계승한 것에 불과했다. 약속했던 것들을 파기할 생각은 없었다. 애초에 그에게 그럴 권한이 있지도 않았다.
“어린놈이 기고만장하구나. 고작 결계 하나를 부숴놓은 게 다다. 고작 이걸로 나를 이겼다고 생각하느냐?”
유피테르가 말을 들어주지 않자, 이스캐리엇은 타락한 지팡이로 땅으로 내려쳤다.
탕! 탕탕!
그러자 혼돈의 마나가 또 한 번 고개를 쳐들었다.
“귀찮게 하지 말고 사라져.”
유피테르는 이 지겨운 싸움을 그만 끝내고 싶었다.
봉인을 깰 생각까지 하게 했던 사도가 대단하긴 했다. 그러나 이제 혼돈 마법은 헛된 발버둥에 불과했다.
[저런 모습은 너무너무….]
[…추해. 빨리 해결을.]
‘나도 알고 있다고. 이게 마지막이니까. 그렇게 보채지 마.’
유피테르 식 특제 마법 – 달빛 그믐검
어느새인가 하늘 위에 떠 있던 달의 모습이 바뀌었다. 구름이 달을 뒤엎으며 그믐달로 바뀌었다.
갑작스럽게 주변의 분위기가 바뀌자 이스캐리엇은 준비하던 마법을 멈췄다.
그 대신, 하늘을 쳐다보았다.
저런 이변을 두고 마법을 끝까지 완성할 수 있는 자는 극히 소수였다.
마법이라는 기적이 보기보다 섬세했기 때문이었다.
마나의 배열이 아주 약간만 틀어져도 평상시와 다른 형태로 만들어졌다. 심지어 방향을 돌려 마법사를 공격하는 경우도 존재했다.
그리고 그건 전투에서의 패배로 이어졌다.
“달이… 보인다?”
분명 낮인데 달이 생생하게 잘 보였다. 원래라면 보이지 않아야 정상이었다.
낯에는 태양, 밤에는 달이라는 게 세아니아 대륙의 상식이었으니까.
흠칫.
하늘에 있는 달에 대해 의심을 하는 순간, 이스캐리엇은 등골이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그게 사도 이스캐리엇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 * *
유피테르는 고유 결계를 유지한 채로 이스캐리엇에게 다가갔다. 두 정령 소녀들이 그 뒤를 따랐다.
다방면으로 확인한 결과, 사도는 숨을 거둔 게 확실했다.
“사도 이스캐리엇은 죽었다. 이제 만족하나?”
유피테르는 정령 소녀들을 쳐다보며 물었다.
[고마워. 당신은 역시 달의 아이구나.]
[꼭 다시 만나. 그때에는 아마….]
가만히 유피테르의 행동을 지켜보던 그녀들은 유피테르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여전히 무표정이었으나, 왠지 기뻐 보였다.
“그래. 잘 가.”
유피테르가 인사를 받아주자, 정령들은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사라졌다.
그는 정령들이 사라진 자리를 멍하게 쳐다보다가 고유 결계를 해제했다. 정령들이 공급해주던 힘이 없어져 홀로 마법을 유지하기 힘들어졌기 때문이었다.
마법을 성공적으로 해제한 유피테르는 펜던트로 시선을 옮겼다.
‘이게 초대 가주 나이아드가 남긴 힘인가….’
초대 가주 나이아드 아르테미스.
그녀에 대한 기록 중에서는 전설로 취급되는 게 너무나 많았다. 다른 공작 가문의 시초들과 대비될 정도로.
얼음 속성의 ‘정지’를 사용하는 것만으로도 그녀의 경지와 같아졌다는 생각은 혼자만의 착각이었다. 봉인을 풀지 않고서 그녀를 이기는 그림이 그려지지 않았다.
그리고 나서 유피테르는 칼리스토들 중 기억을 읽는 힘을 가진 디오를 불렀다.
“상황이 종료되었다. 디오 지금 바로 올 수 있나?”
성국의 위기가 끝났으니, 이제 라플라스에 대한 정보를 얻어야 할 시간이었다.
“와―. 완전히 쑥대밭을 만들어 놨잖아? 이거 새로 지으려면 드워프라도 찾아야겠는데? 아니지, 레아교에 남은 애들이 뭘 할 수나 있으려나.”
유피테르의 명령에 따라 도착한 디오의 첫마디는 무너져버린 교황청에 대한 감상이었다.
“그건 이들이 알아서 하겠지. 그래서 이 자의 기억을 읽을 수 있나?”
“잠깐만 기다려봐 바로 확인할게.”
디오는 그렇게 말하고서는 사도의 시체 가까이에 가서 마법을 시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