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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도 포기한 대공자-155화 (155/265)

사도 이스캐리엇(2)

* * *

사각. 사각.

버려진 신전 속을 걷는 유피테르의 발에 잔해가 그대로 밟혔다. 신발 너머 느껴지는 감촉으로 크기를 가늠할 수 있었다.

“이 근처일 텐데?”

케팔로스는 성녀 프레이야가 이 근처에 있다고 속삭였다.

유피테르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자 황량해진 신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신전 구석구석에는 마법의 흔적들이 아로새겨져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성녀와 마족의 마나도 미세하게 느껴졌다.

이것만으로도 어떤 싸움이 벌어졌었는지 머릿속에 충분히 그려졌다.

“아, 여기야. 유피.”

유피테르를 먼저 발견한 프레이야가 손을 흔들어 위치를 알렸다. 잔잔한 침묵을 깨우는 목소리에 유피테르의 자연스레 고개가 돌아갔다.

“그쪽에 있었나.”

프레이야의 상태는 멀리서 보아도 좋지 않아 보였다. 한시라도 빨리 움직여야 한다는 직감이 들었고, 그대로 따랐다.

유피테르는 길을 가로막는 장애물들을 무시하고 빠르게 자매에게 다가갔다.

“넌 하나도 힘들어 보이지 않네. 데리고 간 대사제가 생각보다 약했나 봐?”

“별거 아니었다. 웬 이상한 놈이었을 뿐이어서 놀랐을 뿐이지. 네 동생은 괜찮아?”

가까이에서 보니 프레이야보다는 여동생 에이프릴의 상태가 더 심각했다. 자매는 치고받는 정도가 아니라 그 이상으로 싸운 듯했다.

프레이야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상처를 입은 상태였다. 자잘한 상처부터 바로 사제들에게 보여줘야 할 큰 상흔까지 다양했다.

그러나 문제는 따로 있었다.

에이프릴의 호흡은 유심히 지켜봐야 알 정도로 연약했다. 심각한 상황인데 눈에 띄는 외상이 보이지 않았다.

이게 의미하는 건 하나뿐이었다.

“마나 감소증…?”

유피테르는 작게 중얼거렸다.

그건 치유 마법을 전문으로 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정도의 신호였다. 그는 어린 시절 마나 감소증과 비슷한 병을 앓았었다.

또, 마나 감소증과 비슷한 증상을 보인 한 아카데미생의 치료 과정을 지켜보기도 했었다.

어중간한 사제들보다 마나 감소증에 대해서 잘 아는 게 당연했다.

“맞아. 내 치유 마법으로 마족의 마나를 다 빼내니까 나았던 병이 다시 돌아왔어.”

“네 상처를 치료하는 게 먼저가 아니었나?”

“프릴은 내 하나뿐인 동생인걸. 그 사실은 무슨 일이 있어도 변하지 않아. 결과적으로 서로 살아남았잖아?”

“일단 돌아가지. 이런 환경은 환자에게 좋지 않다.”

지금 당장 이곳을 떠나야 한다.

유피테르는 현 상황을 그렇게 진단했다.

신전은 조금씩 부서졌고 그 여파로 곳곳에 뿌연 먼지가 가득했다.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건물은 환자에게 있어 최악의 환경이었다.

그렇다고 에이프릴을 치료할 특별한 장비가 마련되어 있지도 않았다.

“일단 비밀 거점으로 돌아가자.”

그래서 유피테르는 일보 후퇴라는 결단을 내렸다.

시간이 급했기는 했지만, 그는 인정사정없는 사람이 아니었다. 자신이 평범한 인간과는 다르다는 걸 인정했다.

하지만, 아직 마음속 한구석에서 갈등의 씨앗이 고개를 내밀었다.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기회를 놓치고 싶어?’

유피테르도 지금 이 기세를 살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잘만 하면 오늘 내로 낙원교를 멸망시킬 가능성도 존재했다. 다른 이들과 다르게 유피테르는 크게 힘을 소모하지 않았으니까.

게다가 낙원교를 지키는 인물은 사도 이스와 대사제 사우스, 둘뿐이었다.

의외로 유피테르의 갈등은 쉽게 풀렸다.

“유피, 나랑 프릴을 부탁할게.”

가장 든든한 사람이 나타났기 때문일까?

프레이야는 끝까지 버티지 못하고 털썩 쓰러졌다. 유피테르는 깜짝 놀라 그녀에게 다가가 호흡과 몸 상태를 확인했다.

“잠든 건가….”

유피테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케팔로스로 자세히 확인해보니 프레이야의 마나가 텅 비어있었다. 프레이야는 죽은 게 아니라 잠시 정신을 잃고 잠에 빠진 것뿐이었다.

교황을 잃었는데 성녀마저 잃고 싶지는 않았다. 머지않은 미래에 마족과 전쟁이 벌어졌을 때, 꼭 필요했다.

지금까지 초인적인 정신으로 버텨낸 게 대단했다.

“그래. 안심하고 푹 자. 그 후에 끝나 있을 테니.”

성녀까지 쓰러지자 유피테르의 저울이 한쪽으로 기울어졌다. 일단, 두 사람을 안전한 곳으로 옮기는 게 먼저였다.

번쩍ㅡ.

공간 이동의 환한 빛이

유피테르는 자매들을 데리고 그곳을 떠났다.

* * *

성국 해방 전선에 위치한 집중 치료실.

프레이야와 에이프릴은 침대에 의료용 캡슐 속에서 잠든 상태였다. 이 거점이 원래 연구 시설이었던 만큼 치료시설도 쓸만했다.

“두 사람은 어때?”

치료실 밖에서 유피테르가 물었다.

“성녀님의 경우 빠르게 마나가 회복되고 있어서 일주일 내로 일어나실 겁니다. 문제는….”

유피테르의 말에 대답한 건 성국 해방 전선의 리더 오스티안이었다. 그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자매들을 보살피는 중이었다.

낙원교와의 성전에 모든 교도들이 투입된 건 아니었다. 살아남은 레아교도들 중에서는 어린아이들도 있었으니까.

또, 돌아올 집을 지키는 것도 생각보다 중요했다.

유피테르가 다방면으로 지원을 해줬다고 해도 여전히 수적으로 열세였다. 성녀의 존재 덕에 기세가 등등했으나, 계속 승리만 할 수는 없었다.

이럴 때는 휴식을 취하는 게 제일이었다.

“역시, 에이프릴 쪽인가.”

“맞습니다. 성녀 님의 여동생분이 아프다는 건 들었지만 대체 저 병은 뭡니까?”

“마나 감소증.”

“마나, 감소증이라고요?”

오스티안이 유피테르의 말에 침음성을 삼켰다.

세아니아 대륙에서 마나를 사용하지 못하는 자들은 대부분 멸시받았다.

신이 준 선물을 사용하지 못하는 건, 무언가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 외에 다른 이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왜. 갑자기 기분이 나빠지기라도 했어?”

유피테르는 은근히 속을 떠보았다.

이곳은 레아교도들이 모인 곳이었고, 오스티안은 얼마 전까지 신성 기관에 속해 있던 자였다. 그렇다면 당연히 에이프릴을 싫어해야 정상이었다.

조금 특수한 환경에서 살아가던 그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설마요. 단지 가슴이 아플 뿐입니다. 성녀님께서 이 병을 고치기 위해 엄청나게 노력했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요.”

오스티안은 평범한 레아교도들과는 생각이 달랐다.

그는 해방 전선을 이끌게 되며 유피테르에게 진실의 일부를 들었다. 낙원교도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지식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 후, 오스티안은 한없이 진지해졌다.

기존의 남들과 선을 긋고 빙그레 웃으며 무시하는 버릇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레아교도 모두가 인정하는 리더로 거듭났다.

심지어, 그를 무시하던 두 명의 레아교 사제들까지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마나 감소증을 완벽하게 극복한 사람은 없지.”

“델포이 아카데미의 한 소녀가 이 병에서 벗어났다고 들었습니다. 혹시 해결책을 가지고 계신 거 아닙니까?”

쐐기를 박아버린 유피테르에게 오스티안은 델포이 아카데미생의 이야기를 꺼냈다.

‘티아나라고 했던가?’

자세히 아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하지만, 한 소녀가 갑작스럽게 마나를 잃게 되었고 그걸 치료하기 위해 성국에서 지냈다고 들었다.

결국, 갑갑함을 이기지 못하고 티아나는 델포이로 떠나버렸다. 그 후, 기적 같은 일이 벌어져 마나 감소증을 극복하고 다시 마법을 사용했다고 소문이 돌았었다.

“그건 뜬 소문에 불과해. 적어도 나는 그런 걸 들어본 적이 없어.”

유피테르는 모든 진실을 알고 있음에도 대답을 피했다.

티아나와 관련된 이야기들은 델포이의 교수들에게조차 비밀이었다. 진실을 알고 있는 건 델포이 상층부와 사건에 참여했었던 자들뿐이었다.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선 칼리스토의 존재까지 설명해야 했다. 하지만, 그녀들을 다시 세상으로 불러내기는 싫었다.

아직은 시기상조였다.

‘뜬 소문을 너무 믿었나.’

유피테르의 말에 오스티안은 입을 닫았다.

성녀님의 여동생이 앓고 있는 병은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아프다는 것 정도는 유명했다. 게다가 교황님께서 성녀와 친하게 지낸다는 것 역시 비밀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교황님께서도 마나 감소증을 치료하지 못한다는 이야기로 이어졌다.

최강의 신성 마나를 지닌 교황님도 불가능한 일을 고작 델포이 아카데미가 해낼 리 없었다.

델포이는 신성 마나나 치유와는 완전히 동떨어진 곳이었다.

‘잠깐. 유피테르 아르테미스라면….’

그러다 유피테르의 존재까지 생각이 미쳤다.

아르테미스의 대공자도 어린 시절에 마나를 사용하지 못했었다고 들었다. 성국에도 진찰 요청이 왔었기에 확실한 소문이었다.

대체 무슨 수를 썼는지는 몰랐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누구보다 강한 마법사였다. 자신은 물론 성녀님도 이기지 못한다고 넌지시 이야기할 정도로.

“당신 역시…!”

오스티안이 유피테르에게 질문하려는 그 순간.

쿠구구구구구궁ㅡ.

성국 해방 전선이 모여있는 건물이 공포에 떨었다.

유피테르는 황급히 보호막을 쳐서 성녀 자매를 보호했다. 반면에 오스티안은 치료실 밖으로 나갔다. 어차피 그 안에 있어봤자 할 일도 없어 보였으니까.

그 대신, 이 현상을 제대로 설명해줄 사람을 찾았다.

“거기 아무도 없나! 대체 무슨 일이야!”

평소대로라면 그의 목소리에 한 명쯤은 대답해줘야만 했다. 하지만 지금 거점에 남아있는 그 누구도 근처에 없었다.

이상함을 감지한 오스티안은 사람들이 주로 뭉쳐있는 곳을 닥치는 대로 뒤졌다.

“없어, 여기도 없고. 설마, 낙원교도들이 쳐들어온 건가?”

강당, 식당, 놀이방 등 선호도가 높은 순서대로 이동했지만, 인기척이 전혀 없었다. 자연스레 낙원교도의 공격을 받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흐읍…. 하―.”

정신없이 돌아다니자 숨이 차올랐다.

어디 쉴 곳이 없나 찾던 그는 벤치 하나를 골라 앉았다. 그리고서는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뇌에 산소가 들어가자 화산처럼 폭발하던 기분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그러면서 다른 가능성이 하나둘 떠올랐다.

‘낙원교도의 공격이라면 유피테르 님이 먼저 알아챘겠지. 뭔가 다른 상황인 거야.’

낙원교가 이 거점을 찾아냈어도 바로 공격할 수는 없었다.

이 연구소에는 인식 저해 마법진이 존재했다. 고대 신성 마법의 일부를 재해석해 만들었기에 엄청난 효과를 발휘했다.

그것 말고도 유피테르가 직접 결계를 한 번 더 쳐주었고, 마족의 마나에 바로 반응하는 감지기들도 곳곳에 설치한 상태였다.

그때, 사람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리더! 오스티안 리더! 어디 계세요!”

오스티안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도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저 목소리의 주인이 정말로 본인일지 아무도 몰랐으니까. 만약, 마족이 쳐들어온 거라면 환영일 수도 있었다.

“무슨 일이지?”

오스티안은 모습을 숨긴 채 대답했다.

때마침 그가 있던 곳은 훈련실이었다. 훈련 자재가 모여있는 곳들에 몸을 숨기면 마나 감지가 아니고서야 찾기 힘든 구조였다.

“성국의 결계에 구멍이 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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