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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도 포기한 대공자-154화 (154/265)
  • 사도 이스캐리엇(1)

    * * *

    “쉽네.”

    유피테르는 어렵지 않게 웨스트의 낙원 마법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그가 가진 마나 제어력은 가히 마왕에 비교할 수 있을 정도였으니, 이 정도는 간단했다. ‘그녀’가 계획하고 칼리스토들이 함께 진행된 훈련은 일반인들이 버텨낼 수준이 아니었다.

    그 후, 웨스트가 준비해왔던 낙원 마법을 그대로 소멸시켜 버렸다. 그 행동에는 단 한 줌의 망설임도 들어있지 않았다.

    웨스트가 고생하면서 펼친 낙원 마법에 맞아줄 생각 따위 없었다.

    이미 분석이 끝난 마법을 상대하는 건 시간 낭비일 뿐이었다. 낙원 마법은 마족의 마법의 아류작에 불과했을 뿐, 정보를 빼내는 건 불가능했다.

    ‘역시 프레이야. 그걸 쓰지도 않고 이겨내다니 대단한데?’

    신전 안에서 벌어졌던 싸움도 이제는 끝난 듯 보였다. 낙원교의 대사제를 이겨낼 수 있을까 걱정했지만, 그건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유피테르는 성검이 없어져 힘들어하는 프레이야에게 한 가지 선물을 주었다.

    물론, ‘그녀’가 남겨준 바실리 컬렉션을 남에게 빌려주고 싶지는 않았다. 그건 오로지 그를 위해 준비된 물건들이었으니까. 게다가 인간의 손에 넘어가기에는 위험한 것들도 많았다.

    하지만, 마족이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 모르기에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성검을 뺏긴 성녀는 절대로 마족에게 대항하지 못할 게 분명했으니까.

    “대체 어디서 그 기술을 배운 거냐! 그건 사도님과 같은…!”

    마법이 파훼 된 웨스트는 놀라움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지금 유피테르가 보여준 기술은 사도와 비슷했다. 아니, 거의 똑같은 수준으로 보였다.

    이미 발동하고 있는 마법의 제어권을 뺏는 건 어려움을 넘어 불가능했다. 꽤 능력이 있다고 자부하는 대사제 사우스도 신이 내린 기술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마법을 발동하면 그대로 자신을 공격해버리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대로 포기할까 보냐. 아직, 정화를 다 끝마치지 못했단 말이다!’

    강제로 마나를 먹힌 후유증은 생각보다 컸다.

    다리는 나뭇가지처럼 후들거렸고, 팔은 풍선처럼 이리저리 흔들렸다. 전신을 바늘로 찌르는 것 같은 통증도 점점 더 심해졌다.

    그러나 웨스트는 무릎을 꿇지 않았다.

    온갖 힘을 다해 발가락으로 무게 중심을 옮겨 어찌저찌 버텨냈다. 그리고서는 고개를 똑바로 들어 유피테르를 노려보았다.

    그러자 여유가 넘치는 은발 마법사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럴 만도 했다.

    아직 제대로 된 마법을 사용하지도 않았으니.

    유피테르가 엄청난 악력을 선보이긴 했으나, 그건 마법이라고 보기 힘들었다. 굳이 따지자면 육체 강화법에 가까워 보였다.

    실제로, 템플 기사들 중에 비슷한 기술을 사용하는 자들을 여럿 알았다.

    기사들은 축복의 효과에 만족하지 못하고, 다른 방법을 시도했다. 그중 하나가 신성 마나를 직접 육체에 집어넣는 거였다.

    강렬한 기운을 지닌 신성 마나를 심자 엄청난 고통이 쏟아졌다. 몸속에 마나를 모으는 것과 응축된 신성 마나를 집어넣는 건 하늘과 땅 차이였다.

    이를 악물고 견딘 기사들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민첩함과 근력을 가지게 되었다.

    “그럼. 슬슬 정리하자.”

    유피테르는 한 발자국씩 웨스트에게 걸어갔다.

    지루한 싸움보다는 사도와 라플라스를 쫓는 게 먼저였다. 하루라도 빨리 성국의 일을 해결해야 바실리를 구하는 데 집중할 수 있었으니까.

    천천히 다가오는 유피테르를 보는 웨스트의 눈동자는 적의가 가득했다. 어떻게 해서라도 저 신의 믿음을 저버린 자를 없애버리고 싶었다.

    인간은 신의 선물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다.

    창조신 레아께서는 인간을 사랑했다. 그래서 마나라는 강력한 힘을 손에 쥐여 주었다. 인간은 신의 의도대로 조금씩 위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가진 힘에 만족하지 못하게 되어버렸다.

    어떻게든 신이 정한 한계를 벗어나려고 노력했다. 그 과정에서 창조신께서 직접 하지 말라고 명시한 것들에 손을 데기 시작했다. 힘을 추구하다 미쳐버린 고대 마법사들처럼 말이다.

    이래서야 마족과 다를 바 없었다.

    ‘레아 님을 제대로 모실 자격이 있는 건 정말로 적어.’

    교황이나 성녀는 레아의 뜻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너무 높은 곳에 있어서 자세히 살펴볼 수 없었다. 또, 마족을 감시하는 일에 몰두해야만 했다.

    신의 뜻을 받들 수 있는 건 역시 자신뿐이었다.

    템플 기사들과 친하게 지내며 공격형 신성 마법을 배웠다. 말이 신을 섬기는 기사였을 뿐 타락한 자들이 꽤 있어서 어렵지 않았다.

    어디서 소문을 들었는지 여러 사제들과 기사들이 뜻을 같이하겠다고 찾아왔다. 그러나 그들은 순수한 신앙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런 마음으로는 신벌을 받을 뿐이었다.

    “너도 나처럼 신이 만들어준 울타리를 부순 거냐?”

    웨스트가 눈앞까지 다가온 유피테르에게 물었다.

    “신의 울타리?”

    “그렇다! 초월자 놈들은 모두 독특한 방법으로 한계를 돌파했다지. 그건 다시 말하면 신의 뜻을 거절한 것이다!”

    “그럼 넌 뭔데. 대사제쯤 되었으면 자신들이 손을 잡은 게 마족이라는 것쯤은 알지?”

    반격도 하지 못하는 웨스트를 죽이려고 하던 유피테르는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대체 이 미친놈이 뭐라는 거야?’

    유피테르가 가지고 있는 상식으로는 웨스트의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했다.

    먼저, 그와 웨스트는 그리 잘 알고 있는 사이도 아니었다. 심지어 그가 어떤 방식으로 강해졌는지조차 몰랐다.

    다음으로, 웨스트는 레아가 제일 싫어하는 마족과 손을 잡은 상태였다. 자신도 깨끗하지 않은데 다른 이를 욕하는 게 어이가 없었다.

    그야말로 몽둥이를 잃어버린 오크가 무기를 부서트린 오우거를 욕하는 수준이었다.

    “나는 신의 선택을 받았기에 괜찮은 것이다! 레아 님께서 나를 선택하셨다. 이 두 손을 피로 물들이라고! 그리고 세상을 정화하라고!”

    유피테르가 딱히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자, 웨스트가 핏대를 높였다. 두 팔을 벌리고 하늘을 쳐다보며 말하는 그 모습은 광신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세상과 작별하는 김에 하나 진실을 알려줄게. 사실 말이지 나는….”

    유피테르는 웨스트에게 더욱 다가가 귓가에 그가 알고 있는 진실을 말해주었다. 반쯤 넋이 나간 표정으로 위를 쳐다보던 웨스트의 표정이 변했다.

    눈동자는 전에 없을 정도로 커졌고, 입술을 파르르 떨렸다. 지금 들을 걸 절대로 믿을 수 없다는 걸 얼굴로 보여주었다.

    “마, 말도 안 돼. 그렇다면 넌….”

    세계를 둘러싼 진실 중 일부를 들은 겁에 질려 유피테르를 쳐다보았다. 그의 말이 모두 거짓이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들은 말로 레아교 경전에 대한 의구심이 모두 풀려버렸다.

    “잘 가.”

    유피테르 식 얼음 마법 – 얼음 창

    푸슉.

    유피테르가 만든 한 자루의 얼음 창이 웨스트를 찔렀다. 날카로운 푸른 날은 부드럽게 심장을 관통했다. 뚫린 구멍에서 피가 새어 나왔지만, 얼음 속성 때문에 그대로 얼어버렸다.

    조금씩 온기를 잃어버리고 있는 웨스트는 고통보다는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레아 님. 이게 정말로 당신의 뜻입니까…?’

    낙원교 대사제 웨스트는 그렇게 세아니아 대륙에서 사신의 품으로 떠났다.

    “네가 그렇게 원하던 여신의 품으로는 가지 못하겠네. 잘 가라.”

    유피테르는 꽁꽁 얼어버린 웨스트의 시체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웨스트는 창조신에게 미쳐있었다. 광적으로 집착한 상태에서 이상한 선민의식까지 가지고 있어 불쌍하지는 않았다.

    노스를 가볍게 정리한 유피테르는 성녀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서 바로 이동했다.

    파사삭.

    유피테르가 떠나자마자, 얼어붙었던 웨스트는 산산이 부서졌다.

    원래의 모습조차 잃어버린 조각들은 공중에서 아름답게 빛날 뿐이었다.

    * * *

    크레이타 중앙 지역에 위치한 교황청.

    낙원교의 사도 이스는 교황의 의자에 앉아 조용히 눈을 감고 있었다. 평소와 다르게 로브를 입고 있지 않았다.

    “호오….”

    이스는 가볍게 중얼거리며 번쩍 눈을 떴다.

    그는 대사제들의 전투를 멀리서 지켜보는 중이었다. 예상대로 대사제들은 적들에게 쓰러져 목숨을 잃었다.

    낙원교를 같이 세운 부하들이 죽었는데도 이스는 미소 지었다.

    처음부터 그는 대사제들에게 큰 기대를 걸고 있지 않았다. 사우스는 그런대로 봐줄 만했지만, 다른 이들은 우스웠다. 마인약을 두 번이나 마시고 살아 있는 건 기적 같은 일이긴 했다.

    하지만, 원판은 변하지 않고 그대로였다.

    이스트는 욕망에 잡아먹혔고, 웨스트는 다른 생각을 품고 있는 게 뻔했다. 노스는 마나 제어와 유지가 불완전했다.

    “역시 신의 사랑을 받는 자는 다르군.”

    이스는 머릿속으로 유피테르를 떠올렸다.

    빛나는 은색의 눈동자와 어깨까지 내려오는 아름다운 은색 머리카락을 지닌 마법사. 그는 참 인상적인 존재였다.

    역경으로 가득했던 어린 시절과 모두가 인정하는 성공적인 복귀. 그 뒤로 이어진 전설적인 일화들까지.

    유피테르는 그야말로 영웅 같은 존재였다.

    그러나 이 모든 건 운이 좋았기 때문이었다. 뭐, 나름대로 노력하긴 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얻은 힘을 자유자재로 쓰지 못해 손가락질을 받았을 테니.

    그와 자신은 많은 공통점이 있었으나 분명히 달랐다.

    자신은 오로지 노력만으로 이 자리까지 올라섰으니까. 높은 신분도 버렸고 누군가의 도움도 바라지 않았다.

    단지, 될 거라는 믿음만 가지고 있었을 뿐.

    그때, 주변에서 마나 반응이 느껴졌다.

    숨기려고 노력한 흔적이 보였으나, 사도의 감지망을 피해 나가는 어려운 일이었다.

    “물건은 찾았나?”

    “제대로 찾았습니다. 하지만, 꺼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 자리에 나타난 건 마지막 남은 대사제 사우스였다. 낙원교로 전향한 템플 기사는 무릎을 꿇고 최고의 예의를 보였다.

    “잘했다. 이만 쉬어라.”

    “예.”

    두 사람의 대화는 길지 않았다.

    사우스는 확실한 사실만을 사도에게 전하고 나서 다시 모습을 감추었다.

    ‘대체 무슨 속셈인 거냐. 어서 네 본색을 드러내란 말이다!’

    사도와 사우스의 관계는 어색했다.

    겉으로는 상하 관계가 완벽하게 지켜졌다. 그러나 속이 문제였다.

    다른 대사제들과 다르게 사우스는 정말로 충성을 다하는 기사처럼 행동했다. 특별한 욕망을 보이지도 않고 명령 그대로 행동했다.

    마치, 대륙 전쟁 시기에 존재하던 제국의 기사처럼.

    사람의 마음을 읽는 데 자신 있는 사도도 사우스의 생각을 읽어내는 데 실패했다.

    하지만, 이제 이 지겨운 왕자에서 기다리는 것도 끝이었다.

    “고작 이 정도로 마족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나. 어리석은 아스라엘.”

    사도는 교황을 비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몇 발자국 앞으로 간 그는 몸을 뒤로 돌렸다.

    그러자 교황의 지팡이가 보였다.

    교황의 지팡이는 그의 마력으로 봉인된 상태였다. 가만히 있어도 신성 마나를 내뿜는 위험한 물건을 내버려 둘 순 없었다.

    마족의 마나를 지닌 낙원교도들에게 치명적인 독이었으니까.

    그는 고민하지 않고 교황의 지팡이 근처로 걸어갔다.

    치지지직

    교황의 지팡이는 격렬하게 사도를 거부했다. 그러나 봉인되었기에 따끔할 뿐, 독이라고 하기에는 민망할 정도로 약했다. 사도는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지팡이에 손을 갖다 댔다.

    사도의 검은색 마나와 흰색의 신성 마나가 섞이기 시작했다.

    잠시 후, 저항하던 지팡이는 침묵에 빠졌다. 동시에 본래의 빛이 아닌 애매한 회색빛의 마나를 만들어냈다.

    “그래. 아티팩트는 말만 잘 들으면 되는 거다.”

    그렇게 말하는 사도의 눈이 붉은색으로 환하게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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