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도 포기한 대공자-153화 (153/265)
  • 성국 해방 전선(8)

    * * *

    성녀 프레이야가 낙원교 대사제 노스와 양보 없는 공방을 이어가고 있을 무렵.

    피유우융ㅡ.

    유피테르는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빠르게 날아갔다. 그의 손에는 낙원교 대사제 웨스트의 목덜미가 꽉 쥐여 있었다.

    “이 자식아! 커흑. 내가. 커흑. 누군지. 커흑 아느냐!”

    웨스트는 어떻게든 유피테르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애를 썼다. 낙원교 대사제의 명예를 떠나, 압도적인 속도가 만들어내는 무게감을 견디기가 힘들었기 때문에.

    하지만, 소박한 꿈은 끝내 수포가 되었다.

    메르카르트로 강화된 유피테르의 근력을 이길 방법은 애초부터 없었다. 은발의 마법사는 마인은 커녕 마족 공작보다도 위였으니까.

    이 상황을 만든 당사자는 정작 다른 생각을 하는 중이었다.

    ‘설마 노스의 정체가 에이프릴이었을 줄이야.’

    웨스트와 노스의 대화를 훔쳐 들었을 때, 엄청난 기시감이 들었다. 어디선가 노스의 목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러나 정확히 누구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결국, 유피테르는 기묘한 느낌을 지우기 위해 기억의 도서관을 뒤지기로 마음먹었다. 대사제들은 유피테르와 성녀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기에, 시간은 꽤 널널했다.

    도서관에는 셀 수 없을 정도의 책들이 빼곡했지만, 유피테르는 포기하지 않았다. 왠지 꼭 알아내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으니까.

    유피테르는 여러 기억을 뒤진 끝에 결국 노스의 정체를 밝혀내는 데 성공했다.

    에이프릴 다르크.

    그 목소리와 일치하는 사람은 성녀의 하나뿐인 여동생뿐이었다.

    낙원교가 대체 어떻게 그녀를 포섭했는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 프레이야와 에이프릴은 부러울 정도로 사이가 좋았었으니까.

    언니를 배신하고 낙원교의 대사제가 되는 그림은 아무리 해도 완성되지 않았다.

    ‘라플라스. 이번 판은 꽤 정교하게 짜놓았네.’

    유피테르는 성국을 뒤흔든 라플라스에 대한 평가를 바꿨다.

    나태의 공작 라플라스

    그는 마족 공작 중에서 가장 낮은 서열을 지니고 있었다.

    보유하고 있는 마법도 크게 인상적이지 못했고, 육체적으로도 연약한 편이었다. 심지어, 공작 무기를 제대로 사용하지도 못했다.

    물론, 허허실실의 전술을 잘 생각해내기는 했다. 그러나 그건 정면에서 받아칠 힘이 없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라플라스가 이번에 둔 한 수는 신묘했다.

    교황과 레아교의 복수를 다짐한 성녀라 할지라도 여동생 앞에서는 멈추어 설 수밖에 없었으니까.

    그래서 유피테르는 두 사람만의 공간을 만들어주고서 신전 밖으로 나왔다.

    애써 만든 ‘성전’이라는 명분을 사도가 즈려밟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자매간에 얽히고설킨 실을 직접 푸는 게 제일 좋았다.

    “이거 놔라 이 자식아! 안 놓으면 죽여버리겠다!”

    바깥의 빛이 보이자 웨스트는 한 번 더 몸을 비틀었다. 유피테르의 속도가 줄었기에 그나마 뭔가 해볼 만한 타이밍이었다.

    웨스트는 눈앞이 핑핑 도는 걸 간신히 참으며 검은빛 마나를 뿜어냈다. 마나로 자그마한 단검을 만들어 유피테르의 손목을 그었다.

    사각ㅡ.

    정확히 틈새를 노린 공격

    그 바람에 유피테르의 손힘이 잠깐이나마 약해졌다. 웨스트는 그걸 놓치지 않고서 탈출했다. 공중으로 몸이 내던져졌으나, 이 정도 속도는 충분히 견뎌낼 수 있었다.

    웨스트는 묘기에 가까운 몸놀림으로 균형감 있게 바닥에 착지했다. 빨개진 목을 제외하면 별다른 상처도 보이지 않았다.

    “넌 원래 뭐하던 사람이야?”

    유피테르가 놀라운 기술을 선보인 웨스트에게 물었다.

    “이스트의 유일한 친구이자. 사제였다.”

    “네가 레아교의 사제였다고?”

    사제가 평소 어떤 일을 하는지 유피테르가 모를 리 없었다. 그는 무려 교황과 성녀와 아는 사이였으니까. 저런 동작은 템플 기사들에게나 가능한 거였다.

    궁금증이 하나도 풀리지 않자 유피테르가 되물었다.

    “사제는 그런 걸 하지 못한다고. 레아교의 사제들이 방금 정도의 일만 할 수 있었어도 이렇게 쉽게 주도권을 넘겨주지는 않았을걸?”

    “사람 말을 믿지 못하다니. 역시 신의 말씀을 거부하는 자답군.”

    “창조신을 저버린 건 내가 아니라 너희들 아니야? 날 배신자라 몰 생각이라면 어림도 없다고 충고를 해줄게.”

    “이스 님의 말씀대로 오만방자하군.”

    재빠르게 상태를 확인한 웨스트는 말로만 끝내지 않았다.

    제법 아픈 곳을 찌르기는 했으나, 아직 부족했다. 이스트의 복수와 함께 가슴 속에 품어왔던 소망을 현실로 이루어내야만 했다.

    촤악ㅡ.

    웨스트는 양손을 옆으로 펼쳤다. 그러자 그가 신관복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애초에 뼈다귀가 생각날 정도로 마른 몸이었다.

    “네가 어떠한 자라도 상관없다. 사도님께 가기 전에 사신의 품에 보내주도록 하지.”

    웨스트 식 낙원 마법 – 낙원의 사자

    말이 끝나자마자 웨스트의 주변에서 진한 검은색 마나가 뿜어져 나왔다. 마나는 대사제의 앞에서 사자의 형상을 이루어냈다.

    한 마리, 두 마리… 다섯 마리.

    “확실히 너는 이스트와는 다르네. 네 쪽이 훨씬 강해.”

    뛰어난 마법사는 마나 제어력만 보고도 상대방의 수준을 가늠하는 게 가능했다.

    유피테르가 볼 때 웨스트는 지금껏 만났던 낙원교도 중 제일 강했다. 이스트와 같은 비교 선상에 두는 것 자체가 미안할 정도였다.

    “가라 사자들아! 왕의 힘을 각인시켜주어라!”

    유피테르의 칭찬에도 웨스트는 흔들리지 않고 사자들에게 명령했다.

    검은 불꽃이 넘실거리는 사자들은 뛰지 않았다. 유피테르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고 조금씩 거리를 좁혀 왔다.

    서두르지 않는 모습에서 제왕의 품격이 느껴졌다.

    “그래도 그걸로는 부족하다는 거 너도 알지?”

    고작 그 정도 마법에 흔들릴 유피테르가 아니었다. 마족이 연루된 사건들에서 유피테르는 늘 가장 강력한 상대와 전투를 벌여왔다.

    그리고 그때마다 승리했던 건 다름 아닌 그였다.

    유피테르는 코웃음을 치며 마나를 끌어 올렸다. 그리고서는 어떤 마법을 사용할지 잠시 고민했다. 이기는 건 확정된 사실이었다. 하지만, 사도의 정보를 최대한 끌어내야만 했다.

    “크, 크르르르. 깨, 깨갱.”

    당당한 발걸음으로 다가오던 사자들이 갑자기 멈췄다. 유피테르의 압도적인 기운에 겁을 먹고서는 오히려 뒷걸음질 쳤다.

    “왜 그러냐? 너희들은 백수(百獸)의 왕이 아니냐!”

    사자들이 마치 꼬리를 내린 개처럼 행동하자 웨스트가 소리를 지르며 독려했다.

    그러나 사자들에게 웨스트의 말은 닿지 않았다. 마족의 마나로 만들어졌어도 동물은 동물이었다. 본능적으로 사람보다 기운에 민감했다.

    개죽음당하고 싶지 않았던 사자들은 마나로 되돌아가 버렸다.

    “이거 불쌍해서 어쩌지? 사자들이 내가 무서워서 싸우고 싶지 않다는데?”

    “큭….”

    상황이 마음대로 풀리지 않자 웨스트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얼마나 강했는지 피가 주르륵 흘렀으나 아픔 따위 느껴지지 않았다.

    그 대신 유피테르를 죽이고 싶다는 감정만 커졌다.

    ‘네가 얼마나 강한지는 이미 들어서 알고 있다.’

    은발과 은안을 가진 마법사, 유피테르 아르테미스.

    사도 이스는 늘 그를 조심하라고 했다. 그래서 웨스트는 늘 멀리서 유피테르를 관찰했다.

    게이트를 타고 왔을 때도,

    이단 심문관들에게 끌려갔을 때도,

    교황과 이야기를 했을 때도,

    능력이 닿는 한 유피테르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러자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유피테르라는 마법사는 실전된 마법을 자유롭게 사용한다는 것을.

    “이스… 라고 했지. 사도에 대해서 이야기를 좀 해주면 살려는 줄게.”

    유피테르가 웨스트를 힘으로 눌러버리지 않은 건 이것 때문이었다.

    라플라스가 이 반란의 흑막이라는 건 알았으나 사도의 정체에 대해서는 하나도 건진 게 없었다. 대사제들을 선택했고, 마족과 연이 있다는 것 정도밖에 몰랐다.

    “사도라…. 그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다면 스스로 알아내 보시게.”

    노스를 제외한 대사제들은 원해서 낙원교의 사도를 따르는 게 아니었다. 사도가 레아교를 뒤엎기 위해 그들을 이용한 것처럼, 그들도 사도를 이용한 것뿐이었다.

    물론, 유피테르는 이 사실을 몰랐다.

    “그게 가능했으면 널 상대하지 않고 바로 사도 놈을 찾아가지 않았을까?”

    “그것도 그렇군.”

    “사도의 목적은 역시 성배를 찾아내는 거지? 결계를 부수기 위해서. 마족이 생각할 만한 건 뻔하지.”

    “당신이 뭐라 하든 간에, 나는 대답해줄 수 없다.”

    유피테르의 끈질긴 질문에도 웨스트는 끝내 입을 다물었다.

    사도가 싫긴 했어도 유피테르가 좋은 건 아니었다. 눈앞에서 미소를 짓고 이는 저자는 이스트를 죽인 자였으니까.

    다른 대사제들은 몰랐으나 이스트를 죽은 건 용서할 수 없었다.

    ‘이스트만이 내 꿈에 찬성해주었다.’

    웨스트는 낙원교의 일원이 되기 전부터 레아교에 의구심을 가진 상태였다.

    그렇다고 해서 창조신 레아를 부정하는 건 아니었다. 레아의 빛은 분명하게 인간에게 전해졌으니까.

    다만, 썩어빠진 일부가 문제였다.

    레아교의 사제들, 기사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부정을 저질렀다. 위에서 얼마나 파악하고 있는지는 몰라도, 밑에서 올려다보니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신성 마법이라는 특권은 고이다 못해 썩어버렸다.

    이 때문에 낙원교의 힘을 빌려 레아교를 정화하려고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사도를 믿은 자신의 판단이 잘못되었다는 건 알았지만, 이미 주사위가 던져진 후였다.

    침묵을 깨트린 건 웨스트였다.

    “내 입에서 낙원교에 대한 정보를 얻고 싶다면, 힘으로 알아내라.”

    웨스트는 속과는 다른 말을 내뱉으며 정신을 가다듬고 마법을 준비했다. 신성 마법을 응용한 마법으로는 턱도 없었기에 바로 가지고 있는 최강의 패를 꺼내 들었다.

    웨스트 식 낙원 마법 – 정화의 물결

    숨이 막힐 정도의 마나가 웨스트의 곁에 모여들었다. 낙원교의 대사제라는 칭호가 걸맞은 위력이었다. 방금 보여준 사자들을 만든 마법은 장난이라고 이야기하는 듯했다.

    쿠르릉ㅡ.

    마족을 떠올리게 하는 힘에 대기가 공포에 떨고, 소리를 질렀다. 삽시간에 버려진 신전 주변에 먹구름이 끼고, 번개가 치기 시작했다.

    오히려 비가 오지 않아 공포스러웠다.

    “이게 내가 사도님께 받은 낙원 마법이다.”

    온갖 힘을 다해 마법을 제어하며 웨스트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자부심이 가득 담겨있었다. 사도가 도와주긴 했으나 이 마법을 완성한 건 어디까지나 그였으니까.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유피테르는 담담했다. 마치, 이렇게 될 줄 예상했다는 투였다.

    “그게 바로 내가 원하던 거야.”

    “뭐…?”

    집중하는 대사제를 내버려 두고서 유피테르는 버려진 대신전 주변의 마나 제어권을 뺏어오기 시작했다.

    “어, 어떻게!”

    마법의 제어가 힘들어지자 웨스트의 눈이 커졌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머리는 이해하고 있으나, 마음으로는 인정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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