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도 포기한 대공자-152화 (152/265)

성국 해방 전선(7)

* * *

고민은 짧았고 행동은 빨랐다.

촤르륵ㅡ.

에이프릴은 등 뒤에 매고 있던 비장의 무기에 손을 갖다 댔다. 그 바람에 로브처럼 생긴 신관복이 휘날렸다. 아직 검집에서 빼내지도 않았음에도 묵직함이 그대로 느껴졌다.

이걸 꺼내 드는 건 오랫동안 이어져 왔던 자매의 연을 끊는다는 선언이나 마찬가지였다.

‘당신과 같은 피가 흐른다는 게 용서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해.’

아마, 에이프릴 다르크로 계속 살았다면 결코 하지 못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사도의 은혜를 받은 현재의 그녀에게는 혈육의 정 따위 존재하지 않았다.

에이프릴은 등 뒤에서 존재감을 내뿜는 검을 기세 좋게 빼 들었다. 원래 자신의 검이 아닌데도 손에 착ㅡ하고 감기는 게 놀라웠다.

“오, 오를레앙! 그걸 왜 네가 가지고 있어?”

에이프릴의 손에 들린 ‘비장의 무기’를 본 프레이야는 경악했다.

수세에 몰린 상황에서도 에이프릴은 당당했다. 그걸 본 프레이야는 무언가 숨겨둔 카드가 있을 거로 예측했다.

그녀도, 교황도 남에게 절대로 알려주지 않았던 비밀이 있었으니까.

게다가 대사제 중 한 명이 너무나도 허망하게 죽었으니, 대책을 마련하는 게 자연스러웠다. 명색이 낙원교의 대사제인데 이런 걸 대비하지 않았을 리 없었다.

그 정도도 되지 않았다면 성국을 점령할 수 없었을 테니까.

“그러고 보니 이거 언니가 사용했었던 검이지?”

“했었던…?”

신경 쓰이는 단어가 들려 프레이야는 검을 자세하게 살펴보았다.

에이프릴이 만든 새장이 공간을 조금씩 빼앗고 있긴 했다. 그러나 성녀의 마음가짐이 발동하고 있는 이상 마족의 마나는 자신을 공격할 수 없었다. 덕분에 마음을 놓고 확인하는 게 가능했다.

잠시 후.

프레이야는 거대한 돌로 머리를 세게 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에이프릴이 쥐고 있는 검은 분명히 오를레앙이었다. 기억하고 있는 것과는 조금 모습이 다르긴 했다. 그러나 색이 달라지고 모양이 조금 흐트러졌다고 해서 몰라볼 리 없었다.

오를레앙은 자신의 스승과도 같았으니까.

‘흰색이 아니잖아…?’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사실은 검의 날 부분이었다.

본래 티끌 하나 묻지 않은 순수함을 가지고 있었던 날은 지독한 검은색으로 변해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힐트(hilt)라고 불리는 손잡이 부분의 색도 본래의 색을 떠올리지 못할 정도였다.

오를레앙은 성검이라는 무게를 제외하고도 하나의 예술품이었다.

그러나 낙원교에 손아귀에 들어가 무슨 실험이라도 당했는지, 예전의 빛을 완전히 잃어버린 상태였다.

“이 검은 오를레앙 같은 촌스러운 이름이 아니야.”

“성녀인 내가 성검의 형태도 알아보지 못할 것 같아? 미덥지 않아도 꽤 오랜 기간 성녀의 자리에 있었다고!”

“그치만, 이름이 바뀌었는걸.”

“뭐, 라고?”

프레이야는 어안이 벙벙해서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교황의 지팡이와 성녀의 검 그리고 결계의 성배.

세 개의 신성 아티팩트는 창조신 레아가 직접 초대 교황에게 하사한 것들이었다. 공작급 마족이 끼어들었다고 하더라도 신의 섭리를 어길 수 있을 리 없었다.

‘제발. 응답해봐 오를레앙!’

프레이야는 계속 마음속으로 오를레앙의 이름을 불렀다.

그녀와 성검은 보이지 않는 실로 엮여 있었다. 성검을 뽑아낸 것 자체가 일종의 계약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심지어 성검에 깃든 에고는 그녀를 꽤 좋아했었다.

하지만, 항상 그녀의 편이었던 성검은 침묵했다.

“그렇게 애타게 불러봐도 소용없다니까 언니. 이제 그만 포기하는 게 어때?”

겉으로 티를 내지 않았음에도 에이프릴은 성녀의 생각을 그대로 읽어냈다. 그리고서는 성검이었던 검을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오를레앙이라고 백날 불러봤자 소용없어. 아티팩트는 정확한 이름을 부르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는 건 상식이잖아. 안 그러니 그람?”

우웅.

마검 그람이 되어버린 성검은 에이프릴의 말에 곧바로 반응했다. 마치, 오랜만에 주인을 만나서 어쩔 줄을 모르는 행복한 강아지처럼.

쨍그랑ㅡ.

그걸 본 프레이야의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산산이 부서졌다.

성검이 했던 말들이 그녀의 머릿속에서 빠르게 지나갔다.

[잘하고 있어. 나쁘지 않은데?]

[저기, 레이야 디저트 없어? 나 정도의 에고가 되면 음식도 먹을 수 있거든!]

[네 여동생 언젠가는 꼭 나을 수 있을 거야.]

[나는 너를 믿는 나를 믿어. 이번에도 꼭 이기자.]

“그 표정 정말로 마음에 드는걸.”

에이프릴은 절망한 프레이야의 표정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바로 이거였다.

성녀 프레이야의 저런 얼굴을 보고 싶어서 그녀는 낙원교로 향했었다. 누군가 성녀를 탈출시켰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드디어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다.

성녀를 데려간 사람 따위 궁금하지조차 않았다.

어차피 모든 일은 사도님의 손바닥 안에서 이루어질 테니까. 중요한 건 성검을 빼앗겼다는 사실을 깨달은 뒤의 성녀가 지을 표정이었다. 복수심에 불타오르는 표정을 꼭 두 눈으로 보고 싶었다.

그래서 성녀가 숨어있다는 소문이 도는 이 버려진 레아교 신전을 찾았다.

이곳에 어떠한 함정이 기다리더라도 상관없었다. 성검을 잃은 후, 평범한 레아교 신자가 되어버린 성녀라면 상대가 될 리 없었다.

에이프릴이 아닌 노스의 이름으로 짓밟으면 그만이었다.

“잘 가 언니.”

에이프릴은 프레이야가 멍해져서 무방비해진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성녀의 몸을 감싼 신성 마나가 거슬렸지만, 마검 그람을 양손으로 들고서 화살처럼 튀어 나갔다.

타앙ㅡ

성녀의 주먹과 마검 그람이 부딪치며 둔탁한 소리를 냈다.

‘마족의 마나를 받은 건 내가 아니라 혹시 당신인 거야?’

강화된 자신의 신체보다 프레이야의 주먹이 더 단단했다. 강한 진동이 손에 그대로 전해지자 순간적으로 검을 놓아버릴 뻔했다.

에이프릴은 한 번 막혔다고 포기하지 않았다.

백 번 찍어서 안 넘어가는 나무가 없다는 말처럼 계속해서 검을 휘둘렀다. 검을 다뤄본 건 처음이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런 건 상관이 없어졌다.

어떤 검술을 사용해야 할지, 어디를 노려야 할지, 어떻게 방어해야 할지.

마검 그람이 계속해서 속삭여주었으니까.

그러나 성녀란 위명은 헛것이 아니었다.

프레이야는 무의식적으로 모든 검격을 막아냈다. 대체 무슨 마법을 사용한 건지는 모르겠으나, 유효타가 한 번도 들어가지 않았다.

“그라아암!”

이대로는 이길 수 없음을 직감한 에이프릴이 그람을 불렀다.

우우우우우웅.

그람이 강하게 몸을 떨며 반응했다. 그리고서는 게걸스럽게 에이프릴의 마나를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마나 감소증 때와 비슷한 아픔이 느껴졌지만, 눈을 질끈 감고 참아냈다.

낙원교의 대사제라면 이 정도는 해야만 했으니까.

촤아아악ㅡ.

그러자 숨기고 있던 마검의 힘이 발휘되었다.

상처 하나 없던 프레이야의 몸에 자잘한 생채기가 생겼다. 미세한 금은 끝을 모르고 영역을 넓혀갔다.

얼굴에서 목까지.

몸에서 다리를 거쳐 발까지.

그러자 프레이야의 몸은 마치, 깨지기 일보 직전의 도자기처럼 보였다. 그 후, 몸에서 피가 분수처럼 쏟아졌다.

“크, 헉.”

갑작스럽게 온몸에서 고통이 느껴지자 프레이야는 정신을 차렸다.

“이게 마검 그람의 힘이야. 맛이 어때?”

마검의 힘을 발동하느라 힘을 소모한 에이프릴은 뒤로 물러나 숨을 골랐다. 숨이 막히고 어지러워서 도저히 버틸 수가 없었다.

그람의 능력을 사용하기 위해선 엄청난 마나가 필요했다. 또, 낙원 마법까지 펼친 상태였다. 무리를 했다며 웃어넘기기에는 너무 먼 곳까지 와버린 셈이었다.

그녀가 인간을 초월하기는 했지만, 마족처럼 자유자재로 힘을 사용할 수는 없었다.

쿵.

마검에게 공격당한 프레이야의 양 무릎이 땅에 닿았다.

도저히 자세를 유지할 수 없었다. 검에 찔린 상처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고통이 끊임없이 몰려왔기 때문이었다.

“무릎을, 꿇고 있는 모습이 보기 좋네.”

“….”

에이프릴은 고소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아픈지 프레이야는 묵묵부답이었다.

‘그람의 능력은 사도님조차 놀랬으니까.’

성녀의 기운이 빠지고 마족의 마나에 주도권을 뺏긴 성검은 에이프릴을 주인으로 선택했다. 그녀는 새로운 무기를 얻은 것에 기뻐하며 마검의 힘을 직접 확인해보았다.

마검이 되어버린 성검은 검에 닿은 모든 것에 마족의 저주를 새겨넣었다.

고통, 어지러움, 느려짐, 감각의 이상, 상처 악화, 축복 반전

말도 안 되는 능력을 갖게 된 마검을 보며 사도는 ‘그람’이라는 이름을 내려주었다. 세아니아 대륙의 전설 속에서 따온 이름이었다.

끼이익. 끼이익.

에이프릴은 마검을 끌며 한 발자국씩 성녀에게로 향했다.

여전히 다리는 후들거렸고, 손에는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프레이야보다는 나은 상태였으나, 전투를 속행할 수 있는 상태는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이야말로 복수할 때였다.

‘치유 마법이 듣지 않아서 당황했나 봐? 이거 불쌍해서 어쩌지.’

에이프릴의 눈에 프레이야의 행동이 그대로 아로새겨졌다.

성녀는 어떻게든 상처를 치료하려고 노력했다. 신성 마나를 끌어 올리며 치유 마법을 사용해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말끔하게 없어졌던 상처들이 어느새 빼꼼히 고개를 들었으니까.

“이제 고통스럽지 않게 해줄게. 먼저 낙원에 가 있으라고.”

프레이야의 바로 앞에 도달한 에이프릴은 먼저 낙원 마법을 해제했다. 지금은 한 톨의 마나라도 아쉬웠다.

승리가 확정된 상황에서 불필요하게 유지할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다.

그녀는 마나의 도움을 받아 검을 들어 올려 언니였던 자의 목을 내리치려고 했다.

그 순간.

“방심했나 봐. 그치?”

퍽.

프레이야가 일어나 엄청난 속도로 에이프릴의 배에 주먹을 처넣었다.

“어, 어떻게.”

“적을 속이려면 나 자신부터 속여야 한다는 말이지.”

지친 상태에서 날아온 강렬한 한 방에 에이프릴은 견디지 못하고 그대로 쓰러졌다. 기습 공격이 먹히긴 했으나 프레이야의 상태도 좋지는 않았다.

성녀의 마음가짐

이 마법에 엄청난 비밀이 숨어있는 건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사제들이 사용하는 축복 마법과 다를 바 없었으니까. 신성 마나를 몸에 둘러 다양한 축복의 효과를 동시에 누릴 수 있었다.

다른 점은 단 하나였다.

그녀의 몸이 존재하는 공간의 마나를 완벽하게 지배하는 것뿐이었다. 100%의 마나 제어력을 통해 상대방의 마나의 영향을 최대한 적게 받을 수 있었다.

마치, 고유 결계처럼.

그러나 이 마법은 아직 완성된 게 아니었다. 그 증거로 여전히 프레이야의 몸에는 상처가 늘어나는 중이었다.

아픈 몸을 이끌고 프레이야는 쓰러진 여동생에게로 향했다.

“왜 그런 거야. 대체….”

가까이서 보자 여동생이 하나도 변하지 않은 게 느껴졌다. 사도의 간사한 혓바닥에 넘어갔을 뿐 여동생은 여전히 연약했다.

프레이야는 그런 여동생의 얼굴을 소중하게 쓰다듬어주었다.

그렇게 몇 초 뒤,

털썩.

한계가 다다른 프레이야마저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