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국 해방 전선(6)
* * *
“왜 그렇게 놀라. 정말로 예상하지 못했어? 당신의 동료는 대충 알아챈 거 같던데.”
노스는 환하게 웃었다.
성녀의 굳은 표정을 보자 속이 뻥 뚫리는 것만 같았다. 예상치도 못한 한 방을 먹였다는 것 자체로도 행복했다.
‘넌 그런 얼굴이 어울려. 어쭙잖게 동정 어린 표정을 짓지 말란 말이야.’
노스의 기억 속에서 프레이야는 항상 미소를 짓고 있었다.
바쁜 일정과 힘든 임무에도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집에 올 때는 꼭 맛있는 음식이나 디저트와 함께였다. 꼭 시간을 내서 자신을 돌봐주는 프레이야가 너무나도 고마웠다.
‘사도님께서 내게 깨달음을 주셨지.’
그러나 사도 이스와 만난 후 세계가 뒤집혔다.
“잘 생각해보렴. 성녀가 정말로 자신의 의지로 널 구해준 것인지.”
“그, 그게 무슨 소리예요? 그분을 모함하려는 말은 듣지 않을 거예요!”
바보같이 처음에는 사도님의 말을 믿지 못했다. 당시 자신의 작은 세상에서 가장 빛나는 별이 프레이야였으니까. 성녀는 자신이 살아가는 이유 그 자체였다.
당연히, 별의 반짝임을 죽이려는 뱀의 말에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볼수록 이상했다.
왜 성녀 프레이야는 자신에게 잘해줄까?
그녀가 해줄 수 있는 거라곤 웃는 얼굴로 맞이해주는 것뿐인데. 자신은 그녀처럼 강하지도 않고, 이름을 알리지도 못했다.
성녀 프레이야의 유일한 단점으로 지목받는다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집에 있어도 신문을 보지 못하는 건 아니었으니까.
심지어, 마나 감소증 때문에 언제 죽어도 모르는 상태였다.
‘해답은 간단했지.’
값싼 동정심.
어느새인가 성녀라는 자리에 취해, 가면을 쓴 모습에 잡아먹혀 버린 것이다. 지금의 프레이야는 대가 없는 사랑을 주었던 언니가 아니었다.
그건, 신의 사도인 척하는 괴물이었다.
“프릴, 어째서 네가 그쪽에 있는 거니? 왜 낙원교의 대사제가 된 거야!”
프레이야는 믿기지 않는 상황에 울부짖었다. 그러나 노스는 입가에 미소를 띠고서 바라볼 뿐, 대답하지 않았다.
자신과 대치하고 있는 낙원교의 대사제 노스.
그녀의 정체는 다름 아닌 프레이야의 하나뿐인 여동생 에이프릴이었다.
짙은 색의 푸른 머리카락은 분명 다르크 가문의 고유한 특징이었다. 포세이돈 가문의 하늘색 머리카락과는 분명히 달랐다.
그러나 여동생의 눈동자는 녹색이 아니라 붉은색이었다.
‘왜 그런 눈으로 쳐다보는 거야 프릴.’
프레이야를 바라보는 에이프릴의 눈빛에는 독기가 똘똘 뭉쳐있었다. 마치, 가족의 원수를 보는 듯했다. 여동생이 태어난 이후, 저런 눈빛을 받아본 적은 처음이었다.
로브가 벗겨지고 노스의 얼굴이 드러났을 때, 프레이야는 눈을 의심했다. 나쁜 꿈을 꾸는 게 아니라면 이건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여동생과 연락이 되지 않았긴 했다.
유피테르조차 자신의 질문에 제대로 대답해주지 않았었다. 그는 이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바빴기에, 붙잡고 늘어질 수야 없었다. 자연스레 낙원교가 에이프릴을 인질로 잡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게 합리적인 추론이었다.
“대답해 에이프릴!”
프레이야의 간절한 외침에도 프레이야는 묵묵부답이었다.
그 바람에 프레이야는 점점 더 애가 탔다. 지독한 마나 감소증을 앓고 있는 에이프릴은 집 밖으로 함부로 나와서는 안 되었다. 바깥세상의 넘실거리는 마나는 에이프릴에게 있어 치명적인 독이었으니까.
분명 사도가 무슨 짓을 한 게 틀림없었다.
그 순간, 프레이야를 조용히 쳐다보던 에이프릴이 움직였다.
“내가 느꼈던 고통을 언니도 느껴보도록 해.”
에이프릴의 몸에서 엄청난 마나가 뿜어져 나왔다. 마족과 같은 검은 마나가 금세 버려진 신전을 메웠다.
에이프릴 식 낙원 마법 – 새장 속의 새
촤르륵.
검은색의 마나가 뭉쳐져서 하나의 선을 만들었다. 에이프릴의 마나가 있는 곳에서 모두 같은 현상이 벌어졌다.
서걱.
그렇게 만들어진 검은 선은 날카로운 절삭력을 자랑했다. 선에 닿은 기둥들은 깨끗하게 잘려 나갔다. 마치, 시에라의 검호들이 자른 것처럼.
에이프릴의 마나 제어력은 평범하지 않았다. 여러 선들이 동시에 물결치는데도 절대로 겹치지 않았다.
하얀 도화지에 붓으로 선을 그려내는 것만 같았다.
“새장…?”
완성된 낙원 마법을 보며 프레이야가 중얼거렸다.
신전을 구석구석 부숴가며 만들어진 건 분명 거대한 새장이었다. 범위가 너무 넓어서 한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놀라운 건 에이프릴은 안전하다는 점이었다. 새장을 만든 검은 선에 닿아도 그녀의 몸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모든 걸 분쇄해버리는 검은 선은 에이프릴의 앞에서는 한없이 상냥했다.
이건 일반적인 경우가 아니었다.
강한 마법일수록 마법은 마법사를 집어삼켰으니까. 마나란 신이 인간에게 준 축복이면서 동시에 저주였다.
“맞아. 새장. 이게 언니가 내게 했던 것과 같은 거잖아? 나를 그 작은 세계 속에 가둬놓아서 행복했어?”
“내가 널 가뒀다고?”
프레이야는 여동생의 말에 헛웃음을 흘렸다.
자신이 여동생을 과도하게 보호한 건 맞았다. 마나 감소증에 걸려 쓰러졌을 때부터, 곁에서 떨어지지 않았으니까. 에이프릴이 그걸 답답하게 느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건 그녀를 싫어해서 그런 게 아니었다.
“대사제 자식이 네게 무슨 소리를 한 거야!”
“내 앞에서 이스 님의 욕을 하다니. 아직 정신을 못 차린 게 맞았네.”
프레이야의 질문에 에이프릴은 마법으로 대답했다.
에이프릴 식 낙원 마법 – 새장 속에 새 : 1막
주변을 감싸던 새장의 검은 선이 독사처럼 고개를 쳐들었다. 잠시 프레이야를 노려보던 선들은 순식간에 프레이야를 노렸다.
탓.
성검을 잃어버렸더라도 성녀는 성녀였다.
프레이야는 빠르게 휘몰아치는 공격을 가볍게 피해냈다. 애초에 결계를 뚫고 나온 하급 마족들이나 몬스터들을 상대했었기에 이 정도는 스트레칭에 불과했다.
마족의 마나가 기반이 되었기에 오히려 수월했다.
눈이 어지러울 만큼 빠르고 화려했지만, 마나 감지에 정확하게 걸려들었으니까. 제대로 맞으면 그대로 세상을 하직할 위력인 건 맞았다.
하지만, 정타를 때리지 못한다면 무의미했다.
“흐응. 잘 피하네. 성검을 없어도 꽤 강한가 봐?”
프레이야가 공격을 쉽게 피하자 에이프릴의 흥미가 떨어져 마법을 멈췄다.
그녀가 보고 싶었던 건 이런 게 아니었다.
피를 흘리며 고통스러워하는 성녀의 모습이 보고 싶었다. 자신이 느꼈던 고통을 그녀도 느껴보기를 원했다. 그런 상황에서도 예전과 같이 웃어 보일 수 있는지 궁금했다.
“이런 마법 어디서 배운 거야?”
“사도님께서 몸소 가르쳐주신 비기야. 왜 부러워서 미치겠어? 성녀도 못 하는 기술을 가지고 있어서?”
그러나 에이프릴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허접하네.”
“뭐―?”
“마나 감소증을 어떻게 치료했는지는 모르겠어. 그래도 마족의 마나를 끌어다 쓴 걸 보면 너도 포션을 먹은 거겠지.”
“그게 어떻다는 거야!”
길어지는 언니의 말에 여동생이 폭발했다.
자신을 욕하는 건 상관없었다. 에이프릴이라는 존재는 작고 하찮은 게 사실이었으니까. 사도의 축복을 받아 새로운 자신이 되었다고 해도, 그걸 부정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사도의 위엄에 흠집을 내는 것만큼은 참아줄 수 없었다.
“남에게 배운 마법과 스스로 깨우친 마법이 어떻게 다른지 보여줄게. 그럼 지금의 내게 부족한 게 뭔지 정확하게 보일 거야.”
“웃기지 마. 당신이 그런 조언을 할 자격이나 돼?”
에이프릴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프레이야의 말을 반박했다.
성녀 프레이야는 처음부터 강한 마법사가 아니었다. 성녀가 되기 전에는 마블링에 참여하지도 못했고, 딱히 눈에 띄지도 않았다.
그녀가 강해질 수 있었던 건 우연히 성검 오를레앙을 뽑았기 때문이었다.
“그런 식으로 말하니까 마음이 아프네.”
프레이야는 여동생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실제로 오를레앙의 힘이 없었다면 이 자리까지 오지 못했을 게 분명했으니까. 오를레앙에 깃든 에고는 다양한 경험을 토대로 자신에게 맞는 마법과 검술을 알려주었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네가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는 걸 증명해줄게.”
우우우우웅.
프레이야 식 신성 마법 오리지널 – 성녀의 마음가짐
프레이야는 신성 마나를 뿜어내서 마법을 완성했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신성함에 에이프릴은 손을 들어 눈을 가렸다.
마족의 마나를 받아들였기에 창조신의 빛을 정통으로 쏘이면 위험했다.
긴장감이 서린 얼굴로 프레이야를 지켜보던 에이프릴의 표정이 점점 풀렸다. 새장을 쪼개버릴 듯한 마나를 끌어 올렸을 때는 무언가 대단한 거라도 보여줄 거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프레이야의 모습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게 당신이 자랑하는 오리지널 마법이야?”
만에 하나라는 가능성을 없애려, 에이프릴은 프레이야의 모습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프레이야의 몸은 압축된 신성 마나에 보호받고 있었다. 하얗게 빛나는 성녀의 모습은 마치 신이 지상에 강림한 것처럼 보였다.
‘내 신은 레아 따위가 아니야. 이스캐리엇 님만이 유일한 신이시지.’
그러나 아무리 봐도 특이한 점은 없었다. 마나 감지로 봐도 신성 마법과 똑같았다. 고위 사제들이나 템플 기사들이 사용하는 축복 마법과 비슷한 점을 찾는 게 더 빠를 정도로.
“덤벼. 네가 마족의 길을 걷겠다면 패서라도 돌아오게 만드는 게 언니의 역할이겠지.”
“무슨 자신감이람?”
일촉즉발의 상황.
두 사람 중 먼저 움직인 건 여동생이자 대사제였던 에이프릴이었다.
덜컹. 서걱.
에이프릴이 만들었던 새장이 천천히 움직였다. 공간을 좁히며 사이에 걸린 것들을 모두 베어냈다. 당당한 검은 선의 진격을 오래된 신전이 막아낼 리 만무했다.
촤르르르륵.
공격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거리를 좁힌 검은 선들은 쉴 새 없이 프레이야를 괴롭혔다. 시야의 사각지대에서 찔러오는 공격은 눈치채는 것조차 어려웠다.
“아프지도 않네.”
그러나 프레이야는 꿈적도 하지 않았다.
공격이 계속해서 쏟아져도 가만히 여동생을 지켜볼 뿐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검은 선의 공격은 제대로 들어가는 듯했으나, 프레이야의 몸은 상처조차 나지 않았다.
“대체 무슨 마법인 거야 그거. 고통이라도 느끼지 못하게 하는 거야?”
상황이 이렇게 되어버리자 마음에 급해진 건 에이프릴이었다.
어떻게 마족의 마나를 피해 없이 막아내고 있는지 전혀 짚이는 바가 없었다. 마족이 신성 마나를 무서워하는 것처럼, 마족의 마나는 인간에게 있어 저주나 마찬가지였다.
저런 식으로 공격 자체를 무시하는 건 오롯이 신에게만 허락된 일이었다.
‘그걸 아직 쓰고 싶지는 않았는데. 어쩔 수 없네.’
조력자도 아니고 성녀에게 비장의 무기를 꺼내 들고 싶지는 않았으나, 이제 남은 방법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