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도 포기한 대공자-150화 (150/265)

성국 해방 전선(5)

* * *

“손님이라니, 여긴 아무도 없잖아. 그게 무슨…?”

“쉬잇. 조용히”

유피테르가 이야기도중 갑작스레 프레이야의 입을 막았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프레이야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은발의 마법사를 쳐다보았다.

무언가 생각하는 바가 있는 듯했지만, 이건 아니었다.

이야기를 해주지 않으면 그가 뭘 하고 싶은지 알 방법이 없었다. 평범한 대륙인들은 유피테르처럼 정보망을 가지지도 않았고, 적의 노림수를 읽어내지도 못했다.

하나부터 열까지 따라가기가 정말 어려웠다.

뚜벅뚜벅.

바로 그 순간, 프레이야의 귀에 사람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한 명이 아니라 최소 두 명 이상이야.’

프레이야는 발소리가 들리는 간격과 소리의 크기로 적의 대략적인 체형을 유추해냈다.

성검을 빼앗긴 성녀는 전투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건 성국 해방 전선도 부정하지 못하는 사실이었다.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그간 쌓은 경험이 전부 사라진 건 아니었다. 그녀의 탄탄한 근육이 성검 오를레앙과 함께한 훈련을 기억했다.

“여기가 맞아? 여긴 버려진 레아교 신전이잖아. 이런 지저분한 곳에 누가 와.”

“조용히 해라 노스. 난 아직 널 인정한 게 아니다.”

“그 정도로 나이가 들었으면 이만 은퇴하는 게 모두에게 좋은 일이 아닐까?”

나이가 지긋한 자의 목소리와 소녀의 목소리가 번갈아 가면서 버려진 신전을 울렸다.

“유, 유피테르….”

적의 목소리를 들은 프레이야는 곧바로 소리를 죽였다. 낙원교의 대사제가 가진 힘이 어찌 되었든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웨스트와 노스

성국 해방 전선에 합류한 프레이야는 제일 먼저 정보를 확인했다. 로폴 사제에게 지금까지의 일을 요약해서 들었지만, 그걸로는 부족했다.

적이 누구인지, 이 사건이 왜 일어났는지 제대로 알아야만 했다.

기본적인 토대를 완성해야 교황과 레아교의 원수를 갚아줄 수 있었다. 성검도 없는 주제에 무턱대고 낙원교에 돌격하면 개죽음일 뿐이었다.

다행히도 성국 해방 전선의 비밀 거점엔 그녀가 원하는 정보들이 가득했다. 해방 전선에 가입한 사람들은 적었으나, 곳곳에 남아있던 레아교의 신도들이 정보를 보내왔다.

수가 적었기에 오히려 의심의 눈길을 받지 않았고, 자연스럽게 첩자로 활동할 수 있었다.

“저쪽은 우리를 눈치채지 못했네.”

프레이야의 반응을 본 유피테르는 손을 떼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낙원교의 대사제를 이곳으로 유인한 건 두말할 필요 없이 자신의 작품이었다.

템플 기사 출신의 사우스는 몰라도 다른 두 대사제를 유인하는 건 아주 쉬웠다.

“이런 곳에 성녀가 숨어있을 리가 있어? 당연히 성국 해방 전선과 접촉했겠지. 나였어도 그랬을걸.”

“성녀를 탈출시킨 자가 성국 해방 전선 사람이라고 증언했지. 하지만, 사실은 다를 거다.”

“홀쭉한 아저씨. 어떻게 그렇게 확신해?”

“애초에 성국은 부러지기 일보 직전의 고목이었다. 우리가 준비한 함정을 모두 부수고 성녀를 데려갈 만한 강자는 레아교에 존재하지 않는다.”

두 대사제는 대화를 이어나가면서도 긴장을 풀지 않았다.

이미 크레이타는 낙원교가 지배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이런 상황에서 성녀에 관한 뜬 소문이 도는 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게 분명했다.

이스트가 허무하게 죽은 이후로 대사제들은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는 습관을 들였다.

‘그런 비밀이 숨어있었나.’

몸을 숨기던 유피테르는 대사제들 간의 대화에 집중했다. 그러자 의문들 중 하나가 스르륵 풀렸다.

성녀 프레이야를 구출할 때, 기도실의 결계가 너무 허술했다는 점

그건 모두 의도된 것이었다. 성국 해방 전선의 비밀 거점의 위치를 찾는 게 쉽지 않으니, 조력자의 정체를 찾기 위해서 덫을 둔 것이다.

“그래서 성녀를 찾으면 뭐 하려고? 걘 이제 성검도 쓸 수 없는 버림 돌인데.”

“성국 해방 전선을 압박해서 이스트를 죽인 범인을 찾아야지. 빌어먹을 사도는 다 알고 있으면서도 알려주지 않으니까.”

투덕거려도 이스트는 웨스트의 소중한 친구였다. 이스트는 아카데미 관계자들을 압박하는 임무를 행하다 죽었다.

사도는 이스트를 죽인 범인을 알고 있는 듯 행동했다. 지금껏 사도가 보여준 힘을 떠올려보면 그 정도는 어렵지 않아 보였다. 그러나 끝내 범인을 알려주지는 않았다.

“지금 내 앞에서 사도님을 욕한 거야? 죽고 싶다고 되치는 거지?”

존칭은커녕 사도를 무시하는 듯한 발언에 노스가 벌컥 화를 냈다. 그녀의 세계에서 사도는 창조신 레아보다 더 위대한 존재였다.

노스는 오랫동안 레아를 믿어왔지만,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도 이스는 달랐다.

짧은 시간 동안 기적을 보여주었다.

“손녀딸 나이와 싸우는 건 사양하도록 하지. 게다가 성녀를 찾는 게 낙원교에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

“그건 그렇긴 하네.”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웨스트가 능숙하게 말을 돌렸다. 노스는 사우스 다음으로 강한 힘을 갖게 되었다. 굳이 그녀와 부딪쳐서 좋을 게 없었다.

샤샤삭.

“거기 누구야!”

버려진 신전에서 인기척이 들리자 노스가 곧바로 반응했다.

우우웅.

노스의 왼손에 거대한 마나가 모여들었다. 소용돌이치며 모여든 불길한 검은색의 마나는 마족을 연상시켰다.

그녀는 능숙하게 마나를 구체의 형태로 압축하고서는 그대로 던져버렸다. 노스의 마법은 일직선상으로 날아가며 정확히 한 기둥을 공격했다.

콰아아앙

엄청난 굉음과 함께 기둥은 그대로 사라져버렸다. 그 바람에 신전에 살던 몇 마리의 쥐 떼가 찍찍거리며 도망쳤다.

‘저 마나에서 느껴지는 기운 낯설지가 않은데. 설마…?’

노스가 사용한 마법을 지켜본 유피테르의 머릿속에 믿고 싶지 않은 가설 하나가 떠올랐다. 슬프지만, 마족이 상대라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잘못 들은 건가?”

마법에 의해 날아간 곳을 확인하며 노스가 작게 중얼거렸다.

지금 공격은 협박 수준으로는 끝나지 않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그 누구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마법을 사용해서 공격을 피했다면, 약간의 흔적이 남아야만 했다.

그러나 그런 낌새는 없었다.

‘저게 젊음이라는 건가?’

마법의 위력을 실감한 웨스트는 최대한 표정을 유지했다.

예상했던 것보다 노스의 실력이 훨씬 높았다. 걸어 다니는 폭탄의 시계를 멈추지 않으려면 정신을 다른 곳으로 돌려야만 했다.

“일단 마나 감지로 이곳을 훑어보는 게 어떤가.”

“그건 신전 밖에서도 했잖아. 귀찮은 일을 두 번 하고 싶지는 않은데.”

노스의 말에 웨스트는 말문이 막혀버렸다.

사도 이스를 만나기 전 노스는 지금의 성격과는 완전 반대였다. 인내심이 강하고 착했으며 힘든 상황에서도 웃어 보였다.

그러나 지금의 그녀는 귀찮은 일을 누구보다 싫어했다.

“혹시라도 함정이 있을 수도 있지 않은가. 늙은이의 부탁을…. 아니, 사도님의 명령을 거스를 셈인가?”

웨스트는 중간에 전략을 바꿨다.

어차피 늙은이라는 점을 강조해봤자 씨알도 박히지 않을 게 뻔했다. 그래서 그녀가 심취해 있는 사도를 끌어들였다. 때마침 사도는 비슷한 말을 했었다.

낙원교의 진정한 적이 개입했을지도 모르니 사소한 것이라도 놓치지 말라고.

“사도님의 말씀이라면 죽어서라도 따를 가치가 있지.”

사도의 힘은 대단했다.

노스는 툴툴거리지도 않고 웨스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웨스트는 그걸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마나를 넓게 퍼트려 신전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버려진 신전은 꽤 거대하고 많은 수의 방이 있었는데 전부 범위 안에 들어왔다.

그때였다.

“그런 방식으로 마나 감지를 하는 건 추천하고 싶지 않아.”

조용히 숨을 죽이던 유피테르가 예고도 없이 적의 시야 안쪽으로 걸어 나왔다.

“….”

프레이야는 말없이 눈빛으로 유피테르에게 대답을 요구했다. 그러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유피테르의 뒤를 따랐다.

“성녀? 정말로 이곳에 있었던 것인가?”

프레이야의 얼굴을 확인한 웨스트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프레이야는 유피테르와 다르게 로브를 쓰고 있지 않았다. 그렇다고 늘 입던 성녀의 복장을 하지도 않았다. 그저 전투에 편한 옷을 입었을 뿐.

평소와 다른 모습이었긴 하지만 성녀 프레이야를 몰라볼 리 없었다. 웨스트는 전직 레아교 사제였으니까.

“누가 그런 마법을 알려줬지?”

유피테르는 프레이야와 웨스트의 반응을 가볍게 무시하고는 노스에게 물었다.

“우리가 그렇게 친한 사이인가?”

“같은 로브를 입고 있으면 동료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날이 선 노스의 말에 유피테르가 장난스럽게 대답했다. 그 자리에 있던 모두의 시선이 노스에게로 쏠렸다.

노스는 검은색 바탕에 붉은색 자수가 새겨져 있는 로브로 얼굴을 가린 상태였다. 웨스트와 비슷한 컨셉이었으나 후드가 달린 게 독특했다.

“성녀랑 같이 있는 것 보니 네가 그 소문의 조력자인가 봐?”

“그러는 넌 낙원교의 개인가? 아니, 고양이라고 하는 게 맞겠네.”

노스는 기선 제압을 하려는 듯 마나를 뿜어냈으나, 유피테르는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바실리와 칼리스토들과 훈련을 했던 그에게 노스의 마나는 놀랍지도 않았다.

“죽고 싶구나?”

“고작 빌린 힘으로 그런 게 가능하기나 할까?”

노스와 유피테르 간의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프레이야가 나섰다.

“유, 유우. 그런 식으로 너무 도발하지 않는 게 좋아!”

적들 앞에서 유피테르의 정체를 밝힐 수는 없었다. 그래서 타협한 게 유우였다. 대륙에서 그런 애칭으로 불린 자들은 꽤 많은 편이었으니까.

“성녀. 네가 더 마음에 들지 않아. 대체 왜 내 앞에 나타난 거지?”

프레이야의 마음도 모른 체 노스는 비난의 화살의 방향을 돌려버렸다.

“그게 대체 무슨 말이야?”

“역시 성검을 잃은 성녀는 쓰레기네. 이런 것도 모르고.”

지독한 독설에 프레이야는 황당했다.

‘여기서 화를 내야 할 사람은 나라고. 너희가 가해자잖아.’

교황을 잃은 것도,

성검을 빼앗아간 것도,

레아교를 멸망 직전까지 몰아붙인 것도.

모두 낙원교의 짓이었다.

그녀는 오히려 피해자였다. 신성 기관의 동료들에게는 배신을 당해 잠들기까지 했다. 그런 자신에게 저렇게 역정을 내는 이유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하, 이제 그만해. 우리끼리 말로 이야기할 건 아니잖아?”

“그렇긴 하지.”

“뭐…?”

노스의 말을 받아친 건 유피테르였다. 그는 엄청난 속도로 튀어 나가 웨스트의 목덜미를 잡았다.

“무, 무슨 속도가!”

웨스트는 눈으로 쫓아갈 수 없는 속도에 몇 번이고 깜박였다. 그러나 이미 몸의 자유가 구속당한 후였다.

“대사제 이스트.”

유피테르는 웨스트의 귀에 속삭였다.

“이스트라니 네 놈은 대체!”

“그를 죽인 게 나라고. 아직도 모르겠어?”

“네 놈이 범인이었나!”

유피테르의 도발에 웨스트는 그대로 넘어갔다. 그렇지 않아도 복수의 대상을 찾던 와중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범인이 직접 고백하니 끌어오르는 열기를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럼. 다정하게 이야기 좀 해보자고.”

유피테르는 웨스트의 목덜미를 잡고서 그대로 사라졌다.

“드디어 단둘이 되었네, 성녀 프레이야. 너랑 단 둘이 싸워보는 날을 기다렸다고.”

“내게 무슨 원한이라도 있어?”

“원한? 그런 거야 샐 수 없을 정도로 많지.”

노스는 그렇게 말하며 천천히 로브의 후드를 벗었다. 그러자 어디서 본 듯한 색깔의 머리카락이 프레이야의 눈동자에 새겨졌다.

“너, 그 머리카락. 대체 무슨 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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