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도 포기한 대공자-147화 (147/265)
  • 성국 해방 전선(2)

    * * *

    “로폴 사제?”

    프레이야는 기억에 있는 얼굴이 방 안으로 들어오자 환하게 미소 지었다. 언제 어디서나 아는 사람을 만나는 건 즐거운 일이었다.

    게다가 로폴 사제는 홀로 이곳에 오지 않았다.

    그의 주변은 아이들로 가득했다. 개선한 장군처럼 당당히 들어오던 그들은 곧바로 자신과 눈이 마주쳤다.

    그러자 아이들은 쭈뼛쭈뼛하며 사제의 뒤로 숨어버렸다. 겁을 먹은 토끼처럼 불안한 눈동자를 한 채.

    ‘아아, 실라가 너무 보고 싶다.”

    낯선 사람을 경계하는 아이들을 보자 문득 여동생이 떠올랐다.

    그녀에게 프리실라는 유일한 안식처였다.

    여동생의 옆에서는 성녀라는 거짓된 가면을 쓰지 않아도 괜찮았다. 여동생은 그녀를 있는 그대로 봐주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아플 텐데도 웃어주는 여동생이 늘 고마웠다.

    그래서 교류전에서 꼭 좋은 모습을 보여주겠다고 약속했었다. 경기장에 직접 올 수는 없겠지만, 영상 크리스탈로 경기를 보는 것 정도는 가능했으니까.

    하지만, 새끼손가락을 걸고 한 약속을 끝내 지키지 못했다.

    “드디어 돌아오셨군요, 성녀님. 마족의 손아귀에서 무사히 빠져나오신 걸 축하드립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

    프레이야는 사제의 말에 얼굴을 찌푸렸다.

    그 바람에 아이들 중 몇 명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갔다. 아름다웠던 성녀의 얼굴이 천천히 일그러지는 건 공포 그 자체였다.

    ‘마족이라고? 바니토 그 배신자 놈이 마족의 마나를 쓰기는 했지만, 여긴 성국이라고. 결계가 있는 이상 마족이 침입할 수는 없어.’

    사제가 마족의 이름을 함부로 입에 담다니.

    그건 성녀로서 용납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마족으로 신도들의 공포심을 자극하는 건 경전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괜한 일은 낌새조차 보이지 않는 게 좋았다.

    교리를 전파하고 아픈 신도들을 치유하는 게 사제들의 주 업무였다. 신성 마법의 공격 부분은 템플 기사들이나 신성 기관들의 몫이었다.

    물론, 사제들도 파견을 나가기도 했다. 던전 공략이나 전쟁 그리고 몬스터 소탕에 신관들의 존재가 꼭 필요했기에.

    아군을 강화하고 적을 약화하는 신성 마법은 한번 맛보면 헤어나올 수 없을 정도로 좋았다.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성국 밖에서 통용되는 이야기였다.

    “왜 대답이 없어 로폴. 빨리 상황을 설명하라니까!”

    답답함에 프레이야의 목소리가 자연스럽게 커졌다.

    그 누구도 기다리라고만 할 뿐, 제대로 이야기를 시작하지 않았다. 그녀가 진실을 알게 되는 걸 두려워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런 그녀를 진정시킨 건 로브를 쓴 유피테르였다. 그는 성녀에게 재빨리 접근해서 머리를 상냥하게 쓰다듬었다.

    “진정해 레이야. 여기 있는 모든 신도들은 간절히 네가 돌아오기를 기도했다고. 게다가 아이들 앞에서 이런 모습은 좋지 않아.”

    “후우…. 알았어. 알았다고. 그러니까 이 손 좀 치워줄래? 난 네 여동생과는 다르다고.”

    말은 싫다고 했지만, 이미 프레이야의 입꼬리는 활짝 피어났다.

    발톱을 세운 고양이처럼 날카로웠던 프레이야는 바로 백기를 들었다. 유피테르의 무자비한 쓰다듬 공격에 이마까지 차올랐던 조급함이 사라졌다.

    그의 손길은 상냥함과 온기로 채워져, 거절할 방법이 도저히 안 보였다.

    “역시 모두가 앉을 곳이 필요하네. 계속 이렇게 서 있는 건 힘들겠지?”

    유피테르는 작게 중얼거리며 편안해 보이는 의자를 만들어냈다. 아르테미스의 얼음 마법을 사용하면 이 정도야 간단했다.

    의자의 개수는 그곳에 있던 사람들의 숫자와 정확히 일치했다. 심지어 각자의 키와 체형에 따라 사이즈와 장식이 각각 달랐다.

    유피테르의 빼어난 마나 제어와 세심함이 돋보이는 작품들이었다.

    “우와! 마법으로 이런 것도 가능해요?”

    “얼음인데 하나도 안 차가워! 게다가 딱딱하지도 않아?”

    싸늘해진 분위기에 덜덜 떨던 아이들은 탄성을 내지르며 의자로 뛰어들었다.

    예고 없이 나타난 의자는 마음에 쏙 들었다. 마법으로 이런 의자를 만들 수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침대보다도 폭신해서 잠이 솔솔 쏟아졌다.

    ‘도대체 당신의 끝은 어디인 겁니까?’

    로폴 사제는 속마음을 들키지 않게 최대한 표정을 관리했다.

    조력자를 직접 눈으로 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지만, 놀랄 일투성이였다.

    공간 이동을 쓰는 것 정도야 이제는 신기하지도 않았다. 그는 성국 해방 전선에 공간 이동이 가능한 아티팩트를 여러 개 선물했었으니까.

    하지만, 정교한 마법을 쓴다는 점과 성녀를 제어할 수 있다는 점은 아주 경이로웠다.

    난다긴다하는 템플 기사들도 시동어 없이 마법을 펼치지 못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성녀에게 저런 식으로 행동할 수 있는 건 교황 아스라엘 님뿐이었다.

    얼음 마법 때문에 조력자가 누구인지 알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아르테미스 가문과 성녀는 접점이 전혀 없었기에 다시 미궁에 빠져버렸다.

    “오빠도 사제님이에요? 뭔가 느낌이 조금 다른 거 같은데.”

    한 소녀가 유피테르 곁으로 다가가 물었다.

    로브를 두른 유피테르의 모습은 누가 보더라도 수상했다. 게다가 압도적인 마법을 선보인 뒤였다. 이런 상황에서도 소녀는 용감히 나섰다. 새로운 마법에 대한 호기심이 공포심을 이겨냈다.

    “큰 의미에서는 나도 사제이긴 하단다.”

    유피테르는 다리를 굽혀 소녀와 눈높이를 맞췄다. 그러자 로브 속에 감춰져 있던 마성의 얼굴이 소녀의 눈에 들어왔다.

    “어, 엄청 이뻐….”

    남자라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의 아름다움에 소녀는 얼굴을 붉혔다.

    허리까지 오는 은발은 자신의 머리보다 더 부드러웠다. 은색의 눈동자 역시 너무나 매력적이었다. 겨울 눈처럼 차갑지만, 그 속은 따뜻했다.

    “성녀님을 도와줘야 하니까. 자리에 가서 앉아줄래?”

    “네, 네에.”

    유피테르의 부탁에 소녀는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뒤를 돌아, 왔던 길을 그대로 되돌아갔다. 그 후, 친구들처럼 의자에 앉았다.

    팅ㅡ.

    아이들이 모두 의자에 앉은 걸 확인한 유피테르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아이들과 두 명의 신도가 의자째로 방 안에서 사라져 버렸다.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이제 제대로 이야기를 할 수 있겠네. 로폴 사제. 프레이야에게 현재 상황을 상세히 알려줘.”

    유피테르는 멍하니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로폴에게 말했다.

    이제 이 자리에 남은 건 그를 포함해서 세 명뿐이었다. 방해꾼이 모두 없어졌기에 레아교의 현실을 설명하기에는 최적이었다.

    오스티안이 오지 않은 게 아쉽긴 했으나, 이 자리에 없는 사람을 찾아 봤자였다.

    “성녀님 이제 그만 앉아주십시오. 그럼 낙원교에 대해서 설명을 해드리겠습니다.”

    “낙원교? 그건 또 뭐야. 티폰교도 아니고.”

    “낙원교에 대해서 설명하기 위해서는 반란의 날로 시계를 돌려야 합니다. 그날에는….”

    로폴은 유피테르의 생각보다 더 깔끔하게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평신도들이 마인으로 벗어난 시작의 날부터 성국 해방 전선이 뭐 하는 곳인지까지.

    사건의 핵심들이 정확하게 포함한 로폴의 이야기는 물 흐르듯 막힘없이 흘러갔다. 이야기 중간중간 프레이야가 궁금한 점을 물어보아도, 사제는 척척 대답했다.

    “그러니까. 할아버지가 아니, 아스라엘 교황 성하가 돌아가셨다고?”

    “그렇습니다.”

    “게다가 템플 기사들은 거의 배반해서 낙원교란 곳에 붙었고?”

    “…네.”

    이야기를 전부 들은 프레이야는 아무 말 없이 눈을 감았다. 앞날이 너무 깜깜해서 아무것도 보이지가 않았다.

    엎친 데 덮친 격이라고, 문제는 따로 있었다.

    ‘오를레앙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아.’

    성검 오를레앙을 소환하려고 해도 묵묵부답이었다.

    성검을 뽑아낸 이후 처음 겪는 일이었다. 오를레앙은 자신의 행동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아 했지만, 필요할 때는 언제가 곁에 있었다.

    로폴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몇 번이고 소환하려고 시도했다.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아도 컨디션이 좋지 않은 탓으로 여기면서 포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성검은 기대를 져버렸다.

    항상 수다를 떨며 성녀의 철칙을 가르치려 하던 그 목소리가 지금은 너무 그리웠다. 성검은 툴툴대면서도 마지막에는 늘 자신의 힘이 되어주었다.

    오를레앙 덕에 성녀라는 칭호의 무게감을 견뎌냈었다. 평소에는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던 게 너무 후회되었다.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해요. 할아버지? 나를 보고 있다면 정답을 알려주세요. 제발.’

    교황의 빈자리 역시 생각 이상으로 커다랬다.

    아스라엘은 그녀가 성녀가 되기 전부터 교황이었다. 그 덕분에 힘들 때 찾아가면 늘 힘이 되어주었다. 어떠한 고민을 가져가도 인자한 할아버지처럼 웃으며 상담을 해주었다.

    교황의 조언은 늘 틀린 적이 없었다.

    자신보다 더 강력한 마법사인 교황이 죽었다는 게 실감이 가지가 않았다. 지독한 악몽울 꾸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네 기분을 전부 이해한다면 거짓말이겠지. 그래도 너라면 이겨낼 수 있어.’

    유피테르가 로브를 벗어 오들오들 떠는 성녀에게 걸쳐주었다.

    프레이야가 가진 공허함과 외로움을 모르지 않았다. 유피테르 역시 소중한 사람을 잃었을 때 비슷한 심정이었으니까.

    그녀를 걱정하면서도 동시에 훌훌 털고 일어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다, 당신은 델포이의 아카데미의…!”

    로브를 벗은 유피테르의 얼굴을 본 로폴은 입을 다물지를 못했다. 아르테미스의 대공자라고 추측은 했었으나, 이내 그 생각을 지워버렸으니까.

    “쉿. 지금은 성녀의 시간이니 조용히 해줄래? 그리고 내일부터 진짜 반격이 시작될 거라고 오스티안에게 전해줘.”

    유피테르는 로폴에게 눈치를 줬다.

    로폴은 눈치가 없지 않았다. 지금 성녀에게 필요한 건 자신이 아니었다. 그 사실을 빠르게 받아들이고서 메시지를 전하러 방 밖으로 나갔다.

    모두가 나가고 유피테르와 프레이야만이 남아있는 방.

    “유피테르. 교황 할아버지의 복수 내가 할 수 있을까?”

    프레이야가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너라면 할 수 있어. 이런 모습은 너답지 않잖아.”

    “나 다운 게 뭔데?”

    프레이야의 말에 유피테르는 순간 당황했다. 이렇게 여린 모습의 성녀는 지금까지 본 적이 없었다.

    성녀와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이인 건 아니었다.

    유피테르가 기억하는 성녀는 늘 전장에서 싸웠다. 오를레앙을 들고 몬스터들을 두부 썰 듯 썰어버리는 강인한 마법사였다.

    “걱정하지 마. 내가 도와줄 거니까.”

    “정말이야?”

    “내가 거짓말하는 거 본 적 있어?”

    “…없어.”

    유피테르의 말은 크지 않았지만, 왠지 기운을 북돋아 주었다. 그가 함께한다고 생각하자 깜깜한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이 보인 것만 같았다.

    “고마워.”

    “감사는 일이 다 끝난 후에 들을게.”

    성국 해방 전선만으로는 낙원교를 몰아낼 명분이 부족했다. 적어도 성녀가 있어야만 했다. 프레이야 없이 싸운다고 해도 전투는 승리하겠지만, 전쟁에서는 질 게 뻔했다.

    조디악의 마도사 중 한 명이 도와준다고 해도 그 사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나를 도발한 결과가 뭔지 똑똑히 지켜보라고 라플라스. 너도 마왕의 곁으로 보내줄 테니.’

    유피테르가 생각한 낙원 멸망 계획이 지금 막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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