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도 포기한 대공자-145화 (145/265)

낙원교(10)

* * *

쉿ㅡ.

기도실을 빼곡하게 채우던 성녀 프레이야의 마나가 숨을 죽였다.

마치, 유피테르의 마나를 두려워하듯이.

유피테르에게서 쏟아져 나오는 무색의 마나는 멈추지 않았다. 기세를 살려 거침없이 기도실이라는 작은 세상을 꿀꺽 삼켰다.

앨럼버가 목숨을 다해 지키려고 했던 자그마한 세계는 유피테르의 진심을 받아내기에 역부족이었다.

무색의 마나는 마도 공학으로 만들어진 장치를 무자비하게 분쇄했다.

“마나가 없다면 마도 공학 역시 제대로 유지되지 않겠지.”

유피테르는 망설이지 않았다. 바실리와의 약속을 어기고 사용한 그의 힘은 확실한 효과를 냈으니까.

바사삭.

성녀의 힘을 빼앗고 있던 침대는 마른 낙엽처럼 으스러졌다.

케팔로스를 흔들어 놓았던 마도 공학의 정수도 그의 힘 앞에서는 입도 뻥긋하지 못했다. 그저 초월적인 힘 앞에 조용히 무릎을 꿇었다.

자신이 가진 힘은 신의 섭리조차 거절할 수 있었다.

강력한 힘을 휘두르는 마족들조차 신을 찾게 만드는 기운이었다. 하물며, 현재의 인간이 만들어 낸 마도 공학에게 가능할 리 없었다.

“이제 그만 눈을 뜨라고 이 잠꾸러기야.”

침대를 보호하고 있던 장치들이 사라지자 유피테르는 반지를 다시 끼웠다. 그리고서는 성녀를 흔들어 깨웠다. 구속하던 장치들이 사라졌으니 성녀를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데려다줘야 했다.

성국 해방 전선에는 그녀가 필요했다.

“3분, 아니 5분만 더 아직 시간이 좀 남았잖아? 언니는 아주 바쁜 사람이라, 조금 더 자고 싶다구….”

“여전하네 레이야. 이런 상황에서도 변함없는 모습이 아주 인상적이야.”

유피테르의 노력에도 프레이야는 잠꼬대만 계속할 뿐이었다. 잠든 모습만 보면 아름다운 동화책 속 공주님 같았지만, 말투가 정반대였다.

그는 작게 한숨을 쉬며 프레이야를 깨우는 걸 포기했다.

평범한 방법으로 이 아가씨를 꿈속 세상에서 데려올 수 없었다. 뭔가, 특단의 대책이 필요했다.

‘이대로도 데려갈 수는 있지만, 정신 상태가 확실하지 않으니 애매하네.’

일단 오스티안이 성국 해방 전선을 이끌고 있었으나, 리더십이 부족했다.

교황이 죽었고 템플 기사들이 배신한 상태에서 그들을 이끌 수 있는 건 성녀뿐이었다. 자신에게는 못 미더웠지만, 레아교의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그녀는 세 개의 기둥 중 하나였으니까.

레아교가 가진 마지막 희망이 바로 성녀 프레이야였다.

하지만, 상대는 마족이었다. 그것도 인간은 상대할 수 없는 공작 라플라스였다. 당연히 정신 지배를 당했을 가능성을 버려선 안 되었다.

마족은 원하는 걸 갖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혹시라도 눈을 뜬 성녀가 레아교에게 이빨을 들이대면, 그때야말로 레아교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게 분명했다.

‘라엘 네 말이 아주 틀리지는 않았네. 도대체 어떻게 해야 이 아가씨가 눈을 뜨는 거야?’

일어날 생각이 없어 보이는 프레이야를 보며 유피테르는 교황과의 추억을 떠올렸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성녀를 만나게 해준 사람은 다름 아닌 아스라엘이었다.

‘그녀’의 추천으로 유피테르는 교황과 만났고 많은 이야기를 나눴었다.

창조신 레아에 관한 이야기부터 유피테르의 정체까지.

“네가 교황 아스라엘이야?”

“자네는 신의 대행자로군. 역시, 레아 님께서는 아직 인간을 버리시지 않으셨는가.”

“창조신 레아의 사제다운 발언이네. 난 나야. 유피테르 아르테미스라고. 그새 계시가 내려왔어? 신으로선 내 존재 따윈 가소로워 보일 텐데.”

“대행자, 아니 젊은 마법사여 신의 뜻은 한낱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게 아니네. 자네가 어떠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말일세.”

교황 아스라엘은 마음을 터놓을 상대가 필요했고, 유피테르는 평범한 인간과의 대화를 그리워했다.

둘 다 평범한 삶을 살지 않았기에 의외로 이야기가 잘 통했다. 덕분에 두 사람의 대화는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계속해서 이어졌다.

당연히 프레이야의 여동생도 화제에 올랐었다.

“네가 성녀의 여동생을 치유해준다고 들었는데 사실이야?”

“맞네. 그 아이는 심한 마나 감소증을 앓고 있어서 이 늙은 신의 종이 직접 도와주고 있네. 프리실라는 자신의 목숨을 넘겨주고 싶을 정도로 소중할 테지….”

성녀 프레이야의 여동생 프리실라.

그 존재 때문에 유피테르는 성녀를 만나보자고 결심했다.

목숨보다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야기가 통할 거라고 믿었다. 그에게도 바실리라는 세상에서 하나뿐인 여자친구가 있었으니까.

그 순간, 유피테르의 머릿속에서 쾅 하고 번개가 쳤다. 간단하지만 충분히 사용할 만한 가치가 있는 방법이었다. 유피테르는 갑작스레 떠올린 생각을 곧바로 행동으로 옮겼다.

“레이야 네 동생 프리실라가 널 기다린다고. 이대로 가면 미움받을지도 모르겠네?”

“프리, 실라?”

유피테르의 말에 프레이야가 꿈틀거리며 중얼거렸다. 조금 전과 달리 확실하게 효과가 있었다. 곧바로 눈을 뜨지는 않았으나 움직임이 점점 격해졌다.

마치, 알을 깨고 나오려는 작은 새 같았다.

앞으로 한 번이었다.

결정타만 먹여주면 프레이야는 침대에서 일어날 게 분명했다. 그러면 모든 문제가 자연스레 해결되었다.

“레이야 언니, 너무 아파. 살려줘.”

유피테르는 프리실라의 목소리와 말투를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번쩍ㅡ.

그 말에 프레이야갸 눈을 떴다.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침대의 이불을 걷어차며 일어나더니 곧바로 여동생의 위치를 확인했다. 눈으로 주변을 빠르게 훑었다. 무슨 일인지 프리실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 대신 묘한 마나를 지닌 마법사가 눈에 들어왔다.

평생을 같이 살아온 여동생의 도와달라는 목소리를 잘못 들을 리 없었다. 그렇다면 저 녀석이 범인인 게 분명했다.

도저히 가만히 둘 수 없었다.

“너구나? 내 여동생을 울린 자식이. 이런 짓을 하고도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프레이야는 급한 대로 기운을 끌어올렸다. 막 잠에서 깬 것 치고는 사나운 기세였다.

몸은 무거웠고, 평소보다 신성 마나가 말을 듣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그런 게 문제가 아니었다. 몸은 나중에 치유 마법으로 고치면 그만이었다.

지금 당장 저 면상에 주먹을 갈기는 게 우선이었다.

‘거리는 가까워. 그렇다면 문제는 없어.’

프레이야는 신성 마나를 오른손으로 모았다. 어차피 저 마법사와 거리는 가까웠다. 침대를 딛고 뛰면 충분히 닿을 듯했다.

오를레앙이 없더라도 충분했다.

어차피 상대를 죽일 생각은 없었다. 죽는 것보다 더 끔찍한 고통을 줘서 정보를 얻는 게 우선이었다.

타앗ㅡ

생각을 굳힌 프레이야는 침대를 받침으로 사용해 유피테르에게 날아갔다. 그 힘이 얼마나 강한지 침대가 우드득 소리를 내며 주저앉았다. 그러나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는 왼손으로 쫙 펴서 타겟을 노리고서는 오른손을 옆구리까지 뺐다. 제대로 된 한 방을 먹이기 위해선 자세가 중요했다.

퍼억ㅡ

프레이야의 오른손이 그대로 적의 오른쪽 광대뼈에 직격했다.

여기까지는 모두 자신의 예상대로였다. 이상한 마나를 사용하긴 했으나 신성 마나로 강화된 주먹을 견뎌낼 리 없었다.

상대가 묘한 힘을 사용할수록 강해지는 게 신성 마나였으니까.

‘어, 어라?’

회심의 미소를 짓던 프레이야는 주먹이 나아가지를 않자 당황했다.

혹시라도 제어가 풀렸나 확인해봤지만, 그건 아니었다. 신성 마나는 여전히 오른손에서 은은히 빛났다. 게다가 적 마법사의 감촉이 확실히 느껴졌다.

그러나 점점 힘이 빠져 제대로 된 타격을 할 수가 없었다.

“정신 차리라고 프레이야. 내가 누군지 정말로 모르겠어?”

“유, 유피테르?”

유피테르의 말에 프레이야는 그제야 제정신을 차렸다.

“잠시만 기다려봐.”

프레이야는 양해를 구하고서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여동생을 빼앗긴 분노가 사라지자 상황 파악 능력이 돌아왔다.

주먹이 노리고 있던 건 적이 아니라 유피테르였다.

“미안. 많이 아팠어? 지금도 아프면 바로 치유 마법 써줄게.”

프레이야는 유피테르의 뺨에 닿아있던 주먹을 재빨리 뺐다. 그러고서는 어쩔 줄을 모르며 눈치를 살폈다.

‘효과가 굉장하지만, 굳이 추천하지 않았던 이유가 이건가.’

유피테르는 프레이야가 아니라 아스라엘의 말을 또 한 번 떠올렸다. 이 방법은 그가 만든 게 아니었다. 교황의 방법을 빌린 것에 불과했다.

“혹시, 많이 화난 거야? 좋아. 내 얼굴도 한 번 때려. 그러면 네 기분도 풀리겠지?”

유피테르가 대답하지 않자, 프레이야는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폭주했다.

자신이 유피테르를 때렸다는 사실은 어떻게 하더라도 지워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냥 사과만 해서는 마음이 불편했다. 그래서 나온 그녀만의 해답이 바로 이거였다.

유피테르의 주먹 한 방을 맞는 것.

그녀는 눈을 질끈 감고서 자세를 잡았다. 이 정도라면 유피테르가 어떤 공격을 해도 밀려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째깍째깍.

프레이야는 자신의 심장 소리가 시곗바늘이 움직이는 소리처럼 들렸다. 착각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유피테르의 주먹은 무서웠다.

오를레앙을 들고서도 유피테르를 이기지 못했으니까.

그러나 몇 초가 지나도 유피테르의 주먹은 날아오지 않았다. 그래서 슬며시 눈을 떠서 유피테르를 쳐다보았다.

꽁ㅡ

유피테르가 그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서 가볍게 꿀밤을 먹였다.

“아야야야…. 이게 무슨 짓이야.”

“한 방 먹이라는 건 네 말이었잖아?”

“그렇긴 하지만. 이걸로 화가 풀리기는 해? 널 죽일 뻔했다고.”

“그런 어중간한 공격으로 죽었다면 옛날 옛적이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걸.”

유피테르는 머리를 부여잡고 치유 마법을 쓰는 프레이야를 보며 작게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성녀라는 무거운 직책을 지녔지만, 원래 자신의 모습을 잃지 않았다.

마치, 오흐트처럼.

“이제 돌아가자고. 네 동료들이 널 기다리고 있어.”

“동료들이라니, 교황 할아버지를 이야기하는 거야?”

“뭐, 따라오면 저절로 알게 될 거야.”

유피테르는 공간을 이동하기 위해 마나를 모으며 프레이야의 상태를 확인했다. 두 개의 마법을 동시에 펼쳐내는 건 그에게 있어 대단한 건 아니었다.

지금까지의 대화로 볼 때 프레이야가 정신 마법에 걸린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도 상대가 마족이었으니 더욱 확실히 해야 했다.

만에 하나라는 가능성을 무시했다가 델포이에서 뒤통수를 세게 맞았었으니까.

‘마족의 마나 반응은 없나.’

케팔로스는 프레이야에게 어떠한 정신 마법도 걸려있지 않다고 말했다. 자신의 반(反) 마법으로 마도 공학 장치를 부수자 케팔로스의 감각도 원래대로 돌아왔다.

장치의 원리는 알 수 없으나 앞으로는 주의를 기울여야만 했다.

“알았어 네 말을 믿을 게 유피. 넌 네 테두리 안에 있는 사람에게만큼은 잘해주니까.”

“그렇게 비행기 띄워줘도 아무것도 안 나온다?”

“그치만, 그게 사실인걸 어떡해.”

유피테르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프레이야는 그가 너무나 상냥한 사람이라고 느꼈다.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그 생각은 확고해졌다. 철저하게 벽을 치고 행동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게 아니었다.

상처받는 걸 두려워해 고슴도치처럼 가시를 세우고 있을 뿐이었다.

‘봐봐. 지금도 이렇게 날 구하러 왔잖아? 정말 고마워 유피테르.’

서로 다른 생각을 하는 두 사람은 성국 해방 전선이 기다리는 곳으로 이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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