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도 포기한 대공자-144화 (144/265)

낙원교(9)

* * *

“성녀라니? 성녀를 데려간 건 우리가 아니다. 성국 해방 전선 너희들이 한 짓을 남에게 넘기면 쓰나?”

“미안하게도 나는 성국 해방 전선과 하나도 관련이 없는걸?”

유피테르는 이름도 모르는 낙원교의 사제를 보며 씨익 웃었다.

사제의 노력은 가상했다.

하지만, 연기력이 턱없이 부족했다. 수업을 받아도 고쳐지지 않을 정도로.

저렇게 딱 걸렸다는 표정을 짓고 있으면, 범인이 누구인지 가르쳐주는 것과 다름없었다. 심증에 확신을 주는 건 제일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이었다.

“뭐, 뭐, 뭐, 뭐냐! 왜 웃는 거냐. 이 이단 놈이. 네가 이단이 아니라면 증거를 보여라!”

심기가 불편해진 사제는 삿대질하며 유피테르를 추궁했다.

위잉위잉.

사제의 감이 상황이 좋지 않다는 신호를 맹렬하게 보내왔다. 저기 있는 아름다운 은발 마법사와 절대 부딪치지 말라고 소리쳤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성녀를 빼앗겨서는 안 돼.’

평신도였던 그가 낙원교에서 높은 지위를 얻었던 건 우연이었다.

낙원교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날.

앨럼버는 대사제께서 하사한 약을 먹고 선택받은 자로 거듭났다. 전신을 자극하는 고양감에 닥치는 대로 파괴를 이어나갔다.

그러다가 뜻밖의 인물과 마주쳤다.

성녀 프레이야

성국의 세 개의 기둥 중 하나를 찾아내고야 만 것이다.

잠자는 성녀를 찾아낸 앨럼버는 곧바로 대사제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두근거릴 시간도 아까웠다.

보물을 찾아낸 트레저 헌터의 마음으로 대사제의 포상을 기다렸다.

“성녀를 발견하다니 정말로 큰일을 했어. 잘했네. 낙원교는 자네를 잊지 않을 거네.”

그와 비슷한 체형을 지닌 대사제가 앨럼버를 찾아왔다. 대사제는 입이 마를 때까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듣고만 있어도 기분이 좋아지는 이야기들이 쉴새 없이 이어졌다.

낙원교는 레아교와 다르게 아주 통이 컸다.

남들과 다를 바 없던 자신을 사제로 만든 뒤 지부의 장으로 만들어주었다. 그 조건으로 대사제가 한 가지 일을 시키긴 했으나 어렵지는 않았다.

잠든 성녀로 실험을 진행하고 보고서를 쓰는 건 누구에게나 가능했다.

“하하하하하.”

“왜 웃나. 대체 뭐가 웃기는 거냐!”

“내 외모를 제대로 보기나 하고서 그런 소리를 하는 거야?”

“그게 무슨…?”

유피테르는 한 번 터진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몇 번을 곱씹어봐도 사제의 행동이 우스웠다.

‘반반하게 생기긴 했네. 인기가 많을 것 같긴 해. 하지만 그게 어쨌다는 거지?’

앨럼버는 유피테르의 말에 화가 치밀었지만, 어떻게든 참아냈다. 그리고서는 인생을 망칠지도 모르는 불청객의 이곳저곳을 뜯어보았다.

은발의 마법사는 분명 매력적인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키도 훤칠하게 컸고, 피부는 얼음처럼 하얘 창백할 게 느껴졌다.

머리카락은 물흐르는 듯한 은색이었고, 웃느라 반쯤 감겨진 눈 역시 같은 색이었다.

‘잠깐. 은발의 은안이라고?’

앨럼버의 뇌리에 무언가가 스쳐 지나갔다.

그 역시 교류전을 지켜보던 사람 중 하나였다. 유피테르의 외모를 보고 그가 누구인지 떠올리는 건 미지근한 물을 마시는 것보다 더 쉬웠다.

“아르테미스 가문인가! 성국과는 상관도 없는 귀족이 왜 이곳에 왔지?”

“오! 완전히 머리가 빈 건 아닌가 보네.”

유피테르는 감탄한 듯 박수를 치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사마라가 있던 침대 쪽에서 사제에게 가까워졌다. 그러자 그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게 눈에 띄었다.

분명히 이곳에 성녀가 있다.

신의 섭리를 본뜬 케팔로스는 그렇게 속삭였다.

지금까지 케팔로스의 감지가 틀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신의 창조물이라면 케팔로스를 피해갈 수 없었다. 마나를 완전히 버리는 것만이 유일한 탈출구였다.

그러나 무슨 장치라도 해놓은 듯 정확한 위치가 느껴지지는 않았다.

‘너무 어설픈데.’

시시각각 변하는 사제의 표정이 답을 알려주었다.

결과적으로 성녀는 사제가 몸으로 가리고 있는 저 뒤의 방에 있는 게 분명했다.

처음에는 사제가 아르테미스의 위명에 겁을 먹은 줄만 알았다. 아르테미스 가문의 마법사들은 지독하게 독선적이어서 늘 신관들과 마찰을 빌었으니까.

레아교에서 낙원교로 바뀌었다고 해도 큰 변화를 기대하는 건 무리였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자신이 다가갈수록 사제는 뒤의 방을 곁눈질했다. 과자를 숨겨놓은 곳을 들킬까 봐 아슬아슬한 표정을 짓는 어린아이 같았다.

아니 그보다 더 알기 쉬운 표정이었다.

덜덜덜.

‘젠장, 젠장. 어떻게 안 거지?’

앨럼버는 오른손의 손톱을 물어뜯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 상황을 돌파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하도 물어뜯어서 손끝이 터지면서 아파졌다. 입에서 쓰디쓴 피 맛이 느껴졌지만, 상관없었다.

은발의 마법사가 기도실에 들어가는 것만은 막아야 했다.

성녀를 뺏긴 걸 낙원교의 대사제가 알게 된다면 결코 좋은 미래를 꿈꿀 수 없었다. 이 혜택이 모두 없어지는 건 물론, 곱게 죽을 생각도 버려야만 했다.

낙원교의 높은 분들은 레아교와는 비교과 되지 않을 정도로 폭력적이었다.

‘그래 시발. 이대로 죽을 수는 없지. 낙원 마법이 뭐 대단한 거겠어?’

깜깜한 미래를 생각하며 멈춰있던 앨럼버는 마음의 준비를 하고서 마나를 모았다.

평생을 평범한 신도로 살아왔기에 낙원 마법은 물론 신성 마법조차 써본 적이 없었다. 낙원교는 레아교보다 더 심했다. 선택받은 자들로 만들어 준 게 다였다. 낙원 마법은 오로지 대사제들만의 힘이었다.

그는 대사제가 보여주었던 마나의 배치를 최대한 비슷하게 따라 했다.

쓸 수 있냐 없냐를 따질 때가 아니었다. 저 은발 놈은 교류전에서도 엄청난 활약을 보여줬다. 자신이 상대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대사제가 해온 일들을 생각하면 차라리 저놈에게 개기다가 죽는 게 나았다.

이판사판이었다.

앨럼버 식 낙원 마법 – 신성한 충격

앨럼버가 자아낸 마법은 아슬아슬한 속도로 유피테르에게 날아갔다. 그리 빠르지 않았으나, 오히려 방심을 유도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포옹.

“어, 어라?”

그러나 신은 앨럼버의 손을 들어주지 않았다.

“설마 이걸 공격이라고 한 거야?”

날아온 공격에 유피테르가 되물었다.

나름 걸음을 멈춰보겠다고 한 마법으로 보였다. 그러나 마법식과 마나 제어력 모두 형편없었다. 일전에 보았던 낙원 마법과 비슷해 보였으나 구멍이 숭숭 뚫려 있었다.

저런 식으로는 대사제가 아니라 대사제의 할아버지가 와도 마법을 펼쳐낼 수 없었다.

“젠장! 너무 어렵잖아.”

“이제 그만 편해지는 게 어때. 성녀를 데리고 여기서 뭘 하고 있던 거야?”

“내가 말해줄 것 같나?”

“이야기를 듣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고들 하지.”

사제는 겁을 먹었음에도 문을 지키고 섰다. 그걸로도 이미 이야기는 끝난 거였다. 제대로 된 공격조차 못 하는데도 쉽게 비켜줄 생각은 없어 보였다.

그럼 남은 선택지는 하나였다.

“네가 자초한 일이야. 후회하지 마.”

유피테르 식 특제 마법 ― 니플헤임

유피테르는 마나를 끌어 올렸다. 그것만으로도 집중 치유실의 온도가 급격히 차가워졌다. 얼음 속성의 마나는 점점 그 영역을 넓혀갔다.

영구동토가 단순히 얼음의 공간을 만들어 내는 거라면, 니플헤임은 그것보다 한 수 위였다.

이 마법은 시간과 공간 그리고 마나 마저 움직이지 못하게 얼려버렸다.

“죄 없는 신도들을 학살하다니 이게 귀족이 할 짓이냐. 대사제님께서 널 가만히 두지 않으실 거다.”

앨럼버는 얼어붙으면서도 유피테르에게 저주를 퍼부었다.

그러나 그는 공격 마법도 제대로 쓰지 못하는 제로 서클이었다. 마법사의 이름을 칭해보는 게 평생의 소원이었다. 당연히 마족들조차 두려워하는 마법을 막아낼 방법은 없었다.

문을 막아보려고 발악하며 동상이 되어버린 게 앨럼버의 최후였다.

“글쎄다? 너희가 그렇게 믿고 따르는 사도를 죽이는 게 내 목적이거든.”

유피테르는 문에 달라붙은 이름 모를 사제를 옆으로 옮겼다.

이 얼음은 시체를 넣은 영원한 관이었다. 이미 영면에 들은 자에게는 죄가 없었다. 시체로 장난을 치는 건 마족이나 네크로멘서들뿐이었다. 그에게 그런 취미는 없었다.

유피테르는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기도실 안으로 들어갔다.

* * *

집중 치유실 옆 기도실.

“결계 마법조차 없잖아?”

빠르게 기도실을 들러본 유피테르는 어이가 없었다. 이곳에는 그 흔한 결계나 방어 마법이 걸려있지 않았다. 니플헤임에 아티팩트가 고장 난 건가 확인해봤지만, 처음부터 그런 건 존재하지 않았다.

정말로 소중히 대한 게 맞는지 의심이 될 정도였다.

예상했던 대로 낙원교는 이곳에 성녀를 숨겨놨었다. 프레이야는 특이한 모양의 침대 속에서 잠들어 있었다. 그 침대는 마법 공학의 힘으로 완성된 것처럼 보였다.

유피테르가 ‘그녀’에게 다양한 마법을 배웠다고 해도 저건 예외였다.

마법 공학은 오롯이 인간이 직접 개발한 힘이었으니까.

“제이스란이라면 신나서 분해해보겠네.”

유피테르는 혼잣말하며 특이한 문양의 침대를 살펴보았다.

알 수 없는 장치들이 덕지덕지 붙어 빛을 발했다. 케팔로스의 감지력을 흩트려 놓은 것도 저 기묘한 장치들인 게 분명했다. 장치에 가까이 가면 갈수록 어지러웠다.

이제 문제는 성녀를 어떻게 저 속에서 빼내야 하는가로 바뀌었다.

힘으로 저걸 부수는 건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러면 왠지 큰일이 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렇다고 다른 이들을 이곳에 불러올 수는 없었다.

제이스란을 데려오면 처음부터 상황을 설명해야 했고, 엑시는 연구실에서 나오는 걸 싫어했다.

“미안해 시리. 이번 한 번만 너와의 약속을 어길게.”

유피테르는 왼손 약지에 껴있는 반지를 보면 중얼거렸다.

웬만하면 ‘그녀’, 아니 바실리와의 약속을 깨고 싶지 않았다. 바실리에게 준 것보다 받은 게 훨씬 많았다. 그래서 약속이라도 지키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성녀를 구하기 위해서는 바실리가 금지했던 본래의 힘을 써야만 했다. 이 힘만 있으면 어떠한 마법이 가로막아도 상관없었다.

사실, 던전에 갇혔을 때 한 번 썼었다.

자신의 발을 잡기 위한 함정을 그대로 당해줄 수는 없었다. 바실리도 가족과는 최대한 친하게 지내는 게 좋다고 말했었다. 그래서 그때는 양심의 가책 없이 마법을 썼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낙원교를 무너트리기 위해서 성녀의 존재는 반드시 필요했다. 교황도 늘 자신이 죽으면 성국을 부탁한다고 했었다.

그러나 이건 가족을 구하려는 것도 아니고 바실리와 직결된 문제는 아니었다.

낙원교의 뒤에 마족 라플라스가 있는 건 확실했다. 그러나 이 힘이 없어도 마족을 쓸어버리는 게 가능했다. 바실리가 가르쳐준 마법은 고대 마법과 현대 마법의 장점만을 섞었다.

그건 바실리에게만 가능한 일이었다.

유피테르는 몇 번이나 반지를 빼려다가 말았다. 그렇게 두 자리가 넘어갔을 때쯤, 마음을 굳혔다.

“한 번만. 이번 한 번만이니까.”

유피테르 식 반(反) 마법 – 월식(月蝕)

유피테르가 반지를 빼자 마나와는 다른 기운이 쏟아져 나왔다.

얼음 속성의 마나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굳이 따지자면 신성 마나에 가까운 그 힘은 순식간에 기도실의 분위기를 바꾸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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