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도 포기한 대공자-143화 (143/265)
  • 낙원교(8)

    * * *

    “그런데 치료는 왜요?”

    오델리는 이 이름도 모르는 남자의 목적이 알고 싶어졌다.

    레아교의 편이라는 말은 믿을 만했다. 저 은발은 꽤 강한 마법사인 것처럼 보였는데, 해코지하려는 기색이 전혀 없었으니.

    더러운 낙원교 사제 놈들과는 근본부터 달랐다.

    하지만, 리넬라가 받는 치료에 대해 물어보는 건 이상했다.

    만약, 그가 자신을 구하러 온 거라면 바로 이곳을 빠져나가야만 했다. 이렇게 대화할 시간조차 아까울 테니. 이런 대화는 안전한 곳에 가서도 충분히 가능했다.

    그렇게 생각하자, 자신을 구하러 온 게 전부는 아닐 거라는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날 도와준 친구를 넘길 수는 없어.’

    혼란 속에서 자신을 구해준 건 아버지의 환자였던 사마라였다.

    아버지는 성국에서도 유명세를 떨치던 사제셨다. 그 때문인지 광신도의 습격을 받으셨다. 그러나 이 역시 레아 님의 뜻이라며 끝내 도망가시지 않으셨다.

    여기서 사마라를 배반한다면, 항상 레아교의 가르침을 따르던 아버지를 뵐 면목이 없었다.

    “이곳에 성녀가 있어.”

    “성녀님이요? 그분은 성국 해방 전선이 숨겼다고 사람들이 말하던데요.”

    오델리의 말이 맞았다.

    낙원교는 성국 해방 전선이 성녀 프레이야를 데려갔다고 주장했다. 살아남은 레아교의 신도들이 그 말에 반박했으나, 이미 대세가 넘어간 지 오래였다.

    “자세히 말해주기에는 시간이 부족하니. 저쪽 가서 들으렴. 이제 이곳에서 고통받지 않아도 돼.”

    “잠깐만요, 부탁이 하나 있어요.”

    “성녀를 그 눈으로 보고 싶다거나 하는 건 안 돼. 분명히 큰 싸움이 날 테니까.”

    “그런 게 아니에요. 다만, 제 친구인 사마라도 안전하게 보호해주세요. 그 애에게는 잘못이 없어요.”

    유피테르는 의외라는 표정을 지으며 오델리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오델리도 지지 않고 그를 똑똑히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은 반짝였다. 거짓을 가리키는 음울한 색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이 소녀가 키 큰 신도와 무슨 사이인지는 모르겠으나, 저런 말을 아무나 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꽤 힘든 상황을 겪었을 텐데. 기특하네.’

    그녀는 이미 이단으로 지정되어버린 레아교 사제의 딸이었다. 물론, 이 지부의 몇 명이나 그 사실을 알고 있는지는 몰랐다. 그 정도로 자세한 정보는 구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방금 전 오델리와 친구의 이야기를 엿들어서 의문이 풀렸다.

    오델리는 최악의 상황에 부닥쳐 있었다.

    “레아교가 이단으로 취급받는 걸, 유피테르 님 당신도 잘 알고 있으시겠죠. 그 아이를 먼저 데려와 주십시오. 그 정도는 가능하실 테니 부탁드립니다.”

    “알았어. 그러니까 무릎 꿇지 마. 내가 아니라 네가 이곳의 리더라고.”

    성녀의 정보를 얻으러 갔을 때, 오스티안은 오델리를 구해달라고 빌었다. 그러면서 레아교의 상황이 얼마나 힘든지를 강조했다.

    어차피 유피테르는 레아교의 편이었다. 성국 해방 전선을 만들기 위한 자금을 대는 사람은 다름 아닌 그였다.

    그곳에 있는 신도 하나를 데려오는 건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계획을 크게 수정할 필요조차 없었다.

    게다가 다른 레아교의 신도들도 있는 곳에서 그런 행동을 보여주는 게 마음이 편치 않았다.

    아무리 진실을 들었다고 하더라도.

    “뭐, 뭐에요?”

    유피테르가 다정하게 머리를 쓰다듬자 오델리는 놀라서 움찔했다. 그러나 유피테르는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아빠 같아….’

    처음에는 유피테르의 손을 떨쳐내려고 했지만, 생각이 바뀌었다. 흑심을 품은 것 같지는 않았다, 심지어 아버지의 손길을 추억하게 될 정도로 따뜻했다.

    어떻게 알았는지 방울 근처에는 가지 않았다.

    “일단 돌아가 있어. 네 친구도 찾으면 바로 보내줄게.”

    유피테르는 오델리의 머리에서 손을 뗐다. 이 정도면 위로가 되었을 거라 믿으며 보낼 준비를 했다.

    먼저 작은 범위에 결계를 쳤다.

    그러자 얼음 나비의 결계가 순식간에 완성되었다. 두 사람이 들어가면 꽉 찰 크기였다. 유피테르 특유의 결계는 마음만 먹으면 세상과 완전히 단절된 공간을 만들 수 있었다.

    시동어도, 마나의 흔들림도 없었다.

    바로 옆에 있던 오델리조차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몰랐다.

    ‘성녀를 가둬놓았다는 게 사실이라면 최대한 조심히 움직여야 해.’

    지금까지는 들키지 않았으나,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보장은 없었다.

    이 지부에서는 성녀와 성검의 힘으로 무언가의 실험을 하고 있다고 했다. 내부에 침입한 신도들의 말은 대부분 맞아떨어졌다. 그렇다면 다양한 시설과 함정이 숨겨져 있을 게 뻔했다.

    중요한 시설이라면 항상 경비 태세를 최상으로 유지한다.

    그런 건 지나가는 어린아이에게 물어봐도 모두 같은 대답을 할 정도로 쉬운 문제였다. 중요할수록 보안에 신경을 써야 했다. 파르테논 아카데미의 실험실은 같은 교수라도 들어갈 수 없을 정도라고 정평이 나 있었다.

    그래서 선택한 게 결계였다.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으렴.”

    우웅.

    결계 속에서 유피테르의 마나가 요동쳤다. 곧바로 공간이동의 환한 빛이 오델리에게 손을 내밀었다. 몇 초 뒤에 그녀는 안전한 곳으로 옮겨질 예정이었다.

    “잠시만요.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세요. 이 지옥에서 꺼내주셨으니 이름 정도는….”

    희미해진 모습의 오델리가 유피테르에게 물었다.

    왠지 지금 이름을 묻지 않으면 다시는 만나지 못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지옥에서 꺼내준 은인의 이름을 모른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유피테르. 그게 내 이름이야.”

    유피테르는 손을 흔들며 오델리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그의 이름을 들은 오델리는 감사의 마음을 담아 고개를 숙였다. 그 후, 완전히 빛에 휩싸여 사라졌다.

    이제 성녀를 구하기 위해 움직여야 할 시간이었다.

    * * *

    오델리와 헤어진 사마라는 치료를 받으러 지부 5층에 와있었다.

    이곳은 평범한 사제들은 함부로 접근할 수 없는 곳이었다. 그녀가 이곳에 있을 수 있는 수 이유는 마나 감소증이라는 희귀병을 앓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자, 평소처럼 이곳에 누우면 되네 시스터 사마라.”

    “알겠습니다. 앨럼버 사제님.”

    욕심 그득하게 생긴 이 사제는 이 지부의 장을 맡은 앨럼버였다. 5층에 위치한 집중 치유실로 들어오자마자 그는 장비를 조율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솔직히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아프지 않게 되는 건 맞으니까.’

    사마라는 그런 앨럼버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며 침대에 누웠다.

    늘 그랬던 것처럼 5층의 침대는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좋았다. 부드러움과 탄성 덕에 오랫동안 누워 있어도 허리가 아프지 않았다.

    “그러면 오늘 분의 마나를 주입하겠네. 방법은 알지.”

    “그럼요. 벌써 몇 번째인데. 치유가 끝나면 알람이 울리고, 저 버튼을 눌러서 사제님을 부르면 되잖아요?”

    떠보는 듯한 질문에 사마라는 막힘 없이 대답했다.

    솔직히 그렇게 외우기 어려운 절차도 아니었다.

    침대에 누워서 마법진에서 흘러나오는 마나를 몸에 받아들이면 되었다. 타락의 끝판왕인 낙원교의 사제가 어떻게 신성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지는 아직도 의구심이 들었다.

    그 마법진에서 나오는 건 오델리의 아버님보다도 더 순수한 신성 마나였다.

    “준비는 끝났네. 옆방에 가서 기도하겠네. 낙원에서 사노라.”

    “낙원에서 사노라.”

    그 말을 끝으로 앨럼버 사제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에서 나갔다.

    우웅ㅡ

    정말 기도라도 하는 건지 마법진이 바로 가동되었다. 침대를 완벽하게 덮어버린 마법진들은 엄청난 양의 신성 마나를 쏟아냈다.

    “대체 무슨 원리로 마나 감소증을 낫게 하는 거지?”

    사마라는 최대한 신성 마나를 몸 안으로 모으면서도 생각을 멈추지 않았다.

    처음에는 온 정신을 집중했지만, 이내 그게 소용없다는 걸 깨달아버렸다. 이 신성한 마나는 너무 순수했다. 꽤 높은 명성을 쌓았던 오델리의 아버지보다도 깨끗했다. 평신도에 불과한 그녀가 모든 양을 제어해낼 수 없었다.

    처음부터 효율이 높을 수가 없는 구조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공부라도 열심히 해놓을걸. 오늘은 살려달라는 목소리도 들리지 않네. 역시 착각이었나?”

    사마라는 아픈 몸을 핑계로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과거를 후회했다.

    신성 기관에 들어갈 수 없었어도 공부는 할 수 있었다. 그랬다면 이 궁금증을 조금이나마 풀 수 있었을지도 몰랐다. 누구에게도 물어볼 수 없으니 답답했다.

    그녀는 손만 뻗으면 닿는 흰색 버튼을 바라보았다.

    저걸 누르기만 하면 앨럼버 사제는 물론 문밖의 기사들도 달려올 것이다. 그럼 대체 이게 무슨 치료법이냐고 물어볼 수는 있었다.

    하지만, 그 뒤에 벌어질 끔찍한 일들이 두려워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평소에 자주 들렸던 목소리도 오늘은 들려오지 않았다. 방 안이 너무 조용해서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그녀는 치유만 받을 수 있었다.

    사마라가 버튼을 누르기를 포기하고 돌아누웠을 때였다.

    쾅ㅡ.

    “무슨 일이야! 기도 중에 방해하면 내가 죽여버린다고 했지?”

    엄청난 굉음과 함께 앨럼버 사제의 짜증이 들려왔다. 얼마나 화가 났는지 어마어마하게 큰 목소리여서 방 안까지 들려왔다.

    “아아악!”

    “제, 제발 살려주세….”

    “도망가 해방 전선이다! 해방 전선의 테러가 일어났다!”

    그 뒤로 문을 지키고 있던 기사들의 비명이 귀를 때렸다.

    ‘설마 성국 해방 전선인가? 한 번쯤 기사들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는데 이런 식이 될 줄이야.’

    다른 층의 기사들과 달리 5층의 기사들은 무슨 말을 해도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무덤을 지키는 석상 같았다. 얼굴마저 투구로 가려져 있어서 성별조차 파악할 수 없었다.

    쿵. 쿵. 쿵.

    5층 집중 치유실의 문이 강하게 흔들렸다. 그 뒤로도 몇 번이나 문을 열려고 시도했지만, 실패한 듯했다.

    “누, 누구죠!”

    겁을 먹은 사마라가 의문의 침입자에게 소리쳤다. 앞의 지키던 기사들을 간단하게 제압했다면 그녀에게 남은 선택지는 없었다.

    콰아아앙.

    성국 해방 전선이라고 의심되는 침입자는 방법을 바꿨다. 문을 강제로 열지 않고, 그대로 폭파했다. 보호 마법이 여럿 걸려 있던 문이라도 이번에는 막지 못했다.

    먼지가 사라지자 그제야 사마라는 침입자를 눈으로 확인했다.

    그는 어울리지 않는 편안한 복장을 하고서 방 안으로 천천히 들어왔다. 은색의 눈동자는 빨려들 듯한 매력을 품었고, 어깨까지 오는 긴 머리는 관리가 잘되어 찰랑거렸다.

    “성국 해방 전선의 사람이라면 내가 아닌 오델리를 찾아요. 그 애의 아버지는 레아교의 사제였었으니까.”

    사마라는 방 안으로 들어온 남자에게 말을 걸어보았다.

    침입자의 목적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성국 해방 전선의 사람이라면 동료를 맞이하려고 왔을 것이다. 낙원교의 사제들이 그런 식으로 말을 하는 걸 들었었다.

    “네가 사마라인가?”

    “그, 그런데요.”

    은발 남자의 물음에 사마라는 자기도 모르게 대답했다.

    큰 키처럼 강한 마음을 가지고 있어도 이 상황에서 침착할 수는 없었다. 이 자리의 공기를 지배하는 건 그녀가 아니라 은발의 마법사였다.

    그는 압도적인 미모만큼이나 강인한 마나를 내뿜었다.

    “그래. 네 친구를 만나러 가라. 오델리가 기다리고 있다.”

    “그게 무슨 소리에…?”

    사마라에게 대답할 기회는 없었다. 오델리라는 이름에 반응해 무언가 말해보려고 했으나 바로 공간 이동되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왜 성녀가 이곳에 있는지 이야기를 좀 들어볼까 사제 선생.”

    유피테르는 뒤에서 절뚝절뚝 걸어오는 앨럼보를 보며 싱긋 웃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