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원교(4)
* * *
“소인이 최대한 버텨보겠소이다. 당신들은 먼저 가시오.”
광분한 몬스터들처럼 덮쳐오는 광신도들의 앞을 한 명의 검사가 막아섰다.
거대한 풍채와 믿음직스러운 등.
등에는 대검이 비스듬하게 매여 있었다. 척 보아도 대장장이의 혼이 느껴질 만큼 좋은 검이었다.
아무리 검에 미쳐 살아가는 검사들이라고 해도 쉽게 휘두를 수 없어 보였다. 헤라클레스 가문의 신체 강화법이 아니라면, 들어 올리는 것조차 버거운 크기였다.
‘그때 그 친구잖아?’
유피테르는 저 검호가 누구인지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검호들 모두가 탄탄한 근육을 자랑했으나, 저자는 2m가 넘는 키를 가지고 있어 잊히지 않았다. 검을 한 번 휘두를 때마다 산이 부서질 것 같은 착각이 들었었다. 하지만, 강자는 아니었다.
그는 첫 경기에서 신성 기관에 마땅한 반격조차 못 하고 져버렸다. 엉망진창이 된 모습으로 땅을 치는 거구는 쉽게 잊히지 않았다.
“정말로 괜찮겠습니까?”
로즈가 에메리아와 광신도들을 번갈아 보면서 검호에게 물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저 광신도들을 혼자서 막는 건 무리였다. 웬만한 마법사도 이길 수 있을 거라 장담하지 못하는 상황인데, 검사라면 두말할 필요 없었다.
“이거나 받으쇼. 배를 타고 무사히 돌아가면 그걸 천검 학원에 있는 여동생에게 전해주쇼.”
로즈는 검호에게서 날아오는 작은 단검을 가뿐히 받아냈다.
얼핏 봐도 사연이 있어 보이는 검이었다. 털털한 말투를 쓰는 검사가 가지고 있을 만한 물건이 아니었다. 새겨진 글귀는 읽을 수 없었으나, 고가품이라는 게 충분히 느껴졌다.
이 단검을 반드시 전해줄 거라고 로즈는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알겠습니다. 무운을 빕니다.”
로즈는 검호의 행동을 막지 않고 돌아섰다.
여기서 그를 막는 건 그의 숭고한 결심을 더럽히는 거였다. 마지막을 스스로 결정하는 걸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만일의 경우에는 그걸 사용하면 모두가 이곳에서 안전하게 도망갈 수 있었다.
“아카데미생들과 다른 교수들은 전부 탔어 빨리 돌아와. 메리 누나!”
에메리아와 함께 마법을 유지하던 남동생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배에서 보아도 섬에 있는 사람들의 상황은 위험했다.
저곳에 남은 마법사들이 강한 축에 속한다고 해도 적들의 기세가 어마무시했다. 일단, 수에서 완벽하게 밀렸고 제 컨디션도 아닌 듯했다.
‘누나의 마나가 평상시와는 다른 느낌이었어.’
메리 누나의 마나가 자신의 마나를 압도해야 하는데. 지금 오히려 반대였다. 다리의 안정성을 위해 출력을 내린 건 자신이었다.
포세이돈 가문의, 비기 네레이드.
이 마법을 펼치기 위해서는 포세이돈의 피를 잇는 자들이 두 명 이상 모이고 주변에 호수나 바다가 있어야 했다.
상당히 조건을 타는 마법이지만 일단 발동하기만 하면 신의 기적에 가까운 힘을 쓸 수 있었다. 이 마법 덕에 포세이돈은 4대 가문의 한 축으로 군림하게 되었다.
물론, 마법의 대가 역시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에메리아의 동생은 뒷 일 따위는 생각하지 않았다. 구조대에 모인 사람들 중 그는 가장 강한 사람이 아니었다.
이 배에는 조디악의 마도사가 한 명 타고 있었다.
세상일에 전혀 관심이 없어 보였으나, 만일의 사태가 발생하면 믿을 수 있다는 평이 자자한 사람이었다.
고립된 아카데미의 일원을 구출하기 위한 회의를 진행할 때, 홀연히 그녀는 나타났다. 딱히, 누군가가 그녀를 부른 건 아니었다. 그녀는 성큼성큼 회의장으로 들어와 델포이 아카데미를 구하는 데 도움을 주겠다고 말했다.
궁수자리(Sagittarius)의 마도사. 루웰라
압도적인 강자인 그녀가 있었기에, 에메리아의 동생은 안심하고 정신을 잃었다.
* * *
철썩ㅡ.
갈라졌던 바다가 다시 하나로 합쳐지고 있었다. 물을 갈랐을 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였다. 아카데미생들과 교수들이 지나갔던 길들은 빠르게 채워졌다.
“그, 나를 조금 부탁할게? 믿고 있으니까.”
“걱정 마 메리. 눈을 뜨면 다시 델포이 아카데미일 거야. 평범한 하루가 다시 시작되는 거지.”
“에헤헤, 역시 언니가 최고야.”
마법을 해제한 에메리아는 비틀거리면서 로즈에게 다가왔다. 로즈는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안아 들었다.
‘너무 가볍잖아.’
오랜만에 안아본 여동생은 어린 시절과 달라지지 않았다. 기적 같은 현상을 만들었다고 하기에는 팔다리가 너무나 가늘었다.
발로 차기만 해도 부러질 것만 같았다.
초점 없는 눈으로 비틀거리던 에메리아는 이미 깊게 잠들었다. 행복한 꿈이라고 꾸고 있는지 입가는 무지개 같은 미소가 걸쳐져 있었다.
‘미래를 보는 능력이라도 있는 건가.’
로즈는 바자라의 여우가 넘긴 공간 이동 아티팩트를 세게 쥐고서 주변을 확인했다.
그러자 검호와 유피테르 교수가 눈에 들어왔다. 단 두 명이 쏟아지는 광신도들을 막아내고 있었다.
두 사람은 광신도의 공격에 상처를 입으면서도 결코 뒤를 뚫리지 않았다.
파르테논 아카데미의 교수들은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무시하고서 모두 도망갔다. 천검 학원의 검호들은 한 명을 두고서 뒤돌아보지 않고 떠났다. 계산이 빨랐던 바자르의 교수들은 역시 마찬가지였다.
두두두두두두ㅡ.
저 멀리서부터 광신도들이 더 많이 다가오는 게 보였다. 이 이상 광신도들과 싸우는 건 바보 같은 짓일 뿐이었다.
“거기 두 사람 빨리 합류해! 이동한다.”
로즈는 유피테르 교수와 검호를 불렀다. 컨디션이 좋지 않다고 해도 아티팩트를 사용할 정도는 되었다. 교수 대표를 수행하려면 자기 관리는 필수였다.
검사와 마법사가 활약할 시간은 충분히 주었다.
“검호 당신 먼저 이탈해! 일단 벽을 만들고 나서 마지막 순간에 뛰어들 테니까.”
“알겠소이다! 부탁하오.”
유피테르의 말에 검호는 전선에서 서서히 몸을 뺏다. 한 번의 실수로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으나, 지금껏 쌓아왔던 노련함이 생명줄이 되어주었다.
“신의 적아 죽어라!”
“어딜 도망가. 여기서 빠져나갈 수는 없다!”
광신도들은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그들은 검사처럼 초식을 연습하지도, 마법사처럼 마법을 배우지도 않았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들은 평범하게 살아가던 평신도였다.
애초에 성국은 전투와는 가장 동떨어진 삶을 사는 곳이었다.
던전들은 모두 관리되고 있었고, 무력은 기사들과 신성 기관으로 충분했다. 이 상황에 신의 결계까지 있었으니 위험이란 걸 모르는 게 당연했다.
그러나 마족의 마나가 들어간 포션이 그들의 인생을 바꿨다.
마족처럼 온몸이 무기가 되어버렸다. 발차기는 바위를 부술 정도로 강했고, 주먹은 바람처럼 빨랐다. 인간을 벗어난 육체는 간단한 방법으로도 적을 죽일 수 힘을 지니고 있었다.
“쳇…. 끈질기구려!”
이대로면 모두가 당할 게 뻔했다.
옆에서 같이 싸우는 은발의 마법사는 실력을 숨긴 게 아닌가 의심할 정도로 엄청났다. 손을 한 번 뻗는 것으로 얼음이 생겨났고, 위험한 순간에는 적절한 지원이 들어왔다.
마치, 사방에 눈이 달린 것처럼 시야가 넓었다.
마법사에게서 도움만 받는 건 검사의 수치였다. 그래서 검호는 대검을 강하게 쥐었다. 그의 마음에 응답하듯 오러가 강하게 뿜어져 나왔다.
“이거나 먹고 떨어지쇼!”
검호는 씨익 웃으며 대검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휘둘렀다.
콰가가가쾅ㅡ.
오러는 그대로 광신도의 군세를 갈랐다. 공격이 위험한 걸 느꼈는지, 순간적으로 광신도들이 멈춰 섰다.
아무리 육체가 강해졌다고 한들,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그리고 유피테르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유피테르 식 특제 마법 – 니플헤임
꽁꽁.
유피테르의 마나는 손이 닿는 모든 곳을 그대로 얼려버렸다. 조금 전까지 죽일 기세로 달려들었던 광신도들은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지금이에요!”
로즈의 외침을 들은 검호와 유피테르가 뒤를 돌아 무작정 뛰었다.
로즈와 그들 사이의 거리는 멀지 않았다. 엎어지면 코가 닿을 거리는 아니었으나, 두 사람의 실력이라면 10초 안에도 가능했다.
반짝.
공간 이동 아티팩트가 조금씩 발광하고 있었다. 그건 이동할 준비가 되었다는 징조였다.
로즈는 에메리아 때문에 움직일 수 없는 상태였다. 그녀의 무릎을 베개로 삼고서 회복 중이었다. 그래도 로즈는 두 사람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러면서 아티팩트에 마나를 주입했다.
두 사람이 이곳으로 오는 즉시 공간을 이동할 수 있도록.
번쩍ㅡ.
공간 이동의 빛이 세 사람을 구조선이 있는 곳으로 움직여주었다.
* * *
“로즈 교수! 에메리아 교수도 무사했구만! 다행이네.”
공간 이동한 세 사람을 반겨준 건 미리 움직여있던 제프리스 부학장이었다.
남겨진 교수들이 돌아오지 않자 발을 동동 굴렀다. 구조선에 델포이 출신의 루웰라가 있다고 들어 그녀에게 부탁을 해봤지만….
“내가 왜? 그들은 무사히 돌아올 거니까 걱정하지 말고 잠이나 자.”
돌아온 건 차디찬 거절뿐이었다.
“로즈라고 했소이까?”
“다른 사람의 이름을 물을 때에는 자신의 이름부터 밝혀야 하는 게 예의 아닐까?”
로즈는 무사히 돌아왔다는 걸 확인하자 탁 하고 긴장이 풀렸다. 광신도들에게 추격당하는 건 두 번 다시는 사양이었다. 당분간 꿈에 계속 나올 게 분명할 정도로 아찔했다.
힘들어 죽겠는데 검호가 물어보니 웃으면서 대답해 줄 리 없었다.
“소인은 천검 학원에서 검호를 맡고 있는 도크스라고 하오.”
“맞아. 나는 로즈라고 해. 델포이의 교수 대표지. 무슨 일이야? 광신도들 이야기를 할 거면 그만두지 그래. 다시는 엮이고 싶지 않으니까.”
하지만, 검호 도크스가 꺼낸 이야기는 광신도들과 관련된 게 아니었다.
“은발의 교수가 아직 그곳에 있는 것 같소이다.”
“뭐라고?”
그럴 리 없어.
로즈는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최악의 가정을 격렬하게 부정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어디를 보아도 유피테르는 없었다.
델포이에서는 늘 싫어도 눈에 띌 정도였는데 지금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사실일세…. 하지만 어쩔 수 없는 희생도 있다는 걸 자네도 알지 않는가.”
“지금이라도 배를 돌려요. 부학장님, 유피테르 교수를 구해야만 합니다. 이 아티팩트만 있으면 충분히….”
빠각ㅡ.
로즈의 기대는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공간 이동을 도와줬던 반지 모양의 아티팩트는 수명을 다했는지 부서졌다.
“어째서?”
로즈는 잔해가 되어버린 반지를 허망하게 쳐다보았다.
구할 사람을 모두 구한 배는 이미 머리를 돌린 지 오래였다. 이 아티팩트에 기댈 수 없다면 유피테르를 구할 방법은 남아 있지 않았다.
“포기하게. 자네는 최선을 다했어.”
제프리스가 로즈의 어깨를 두드리며 위로하는 그 순간.
“유피테르 아르테미스가 아직 저곳에 있다는 게 사실이야?”
지금껏 움직이지 않았던 궁수자리의 마도사 선실에서 나왔다.
이미 그녀가 궁수자리의 마도사라는 걸 아는 자들은 경외의 눈길을 보냈다. 그러나 로즈와 도크스는 늦게와서 그 사실을 듣지 못했다.
“당신은 누구죠?”
“약해빠진 못난이가 그걸 알 필요는 없고. 그가 저곳에 남아 있다는 게 사실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