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원교(3)
* * *
나흘이 흘렀다.
대마(對魔) 결계 헤카테를 제외하면 성국은 이전과 완전히 다른 국가가 되었다.
“모두가 평등한 낙원을 꿈꾸는 낙원교라니. 웃기지도 않는 소리네.”
자신의 방에서 차를 마시던 유피테르는 신문을 읽다가 던져버렸다. 낙원교가 발행한 종이 쪼가리에는 허무맹랑한 말만 적혀있었다.
행복한 기분으로 아침을 맞을 수 있는 새로운 세계가 펼쳐집니다!
이는 레아교가 해왔던 모든 것들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말이었다.
교황과 성녀는 차별을 반대한다는 입장을 확실히 해왔다.
아스라엘은 휴일을 반납하고 최대한 많은 평신도들을 치료해주었다. 프레이야 역시 비슷한 일을 꾸준하게 실천했다.
하지만, 다른 이들은 아니었다.
타락한 신관들은 상처를 낫게 하는 힘의 잠재력을 눈치챘다. 치유의 힘은 돈과 명예를 동시에 얻을 수 있는 마성의 힘이었다.
과거와는 다르게 치유 마법을 쓸 수 있는 자들은 신관뿐이었다. 그래서 신성 기관을 꼬드겨 신성 마법을 독점했다.
그야말로 최적의 환경이었다.
실권을 잡은 낙원교는 레아교의 어두운 면을 아프게 꼬집었다. 동시에 자신들은 레아교의 전철을 밟지 않을 거라고 선언했다.
낙원교가 레아교보다 낫다는 증거는 단 하나도 없었는데도 평신도들은 홀린 듯 지지했다.
사도 이스가 가진 강력한 카리스마 덕분이었다.
“마스터. 레아교의 신관들을 정말로 도와줄 거야? 그냥 델포이로 돌아가도 문제없잖아.”
유피테르의 옆에서 오흐트가 뒹굴거리며 물었다.
굳이 혼란스러운 성국에 개입하려는 마스터를 이해할 수 없었다. 성국을 지배하기 위한 두 세력의 싸움은 심화될 게 뻔했다. 전술을 하나도 모르는 그녀도 충분히 예측할 수 있는 이야기였다.
흔들리는 성국에 마음이 아파야 하는 건 마스터가 아니었다.
“레아교 1장 5절.”
“…창조신 레아는 최초의 인간에게 가르침을 주었다. 나의 자식아, 다른 자에게서 선물을 받으면 감사함을 보여야만 한다.”
갑작스러운 유피테르의 말에도 오흐트는 막힘 없이 대답했다. 그녀의 과거를 생각하면 이 정도는 간단한 일이었다.
5절은 남에게 도움을 받으면 갚아야 한다는 교훈을 담고 있었다. 라엘이 알려준 성배의 단서는 대대로 교황만 알고 있었던 비밀이었다. 소중한 유물을 물려받았으면, 이 정도는 도와줄 만했다.
“그러면 성국 해방 전선을 도와주겠네. 설마 마족들의 마나로 가득한 낙원교를 도와주지는 않겠지?”
침대에서 포근한 이불을 가지고 놀던 오흐트는 일어나서 유피테르를 바라보았다. 앞으로 어떻게 행동할지는 마스터에게 달려있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아마도 그렇겠지. 하지만, 그것뿐만이 아니야.”
유피테르는 오흐트를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카테리나가 일어나지 못한 이유가 마족이라고 했지? 마족 공작 라플라스가 지금 체스판을 움직이고 있잖아. 그럼 해답은 간단해. 낙원교라는 말들을 엎어버리면 되는 거지.”
“으. 응 마스터의 말이 맞아.”
무식하면서도 효율적인 방법에 오흐트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대로 마음을 먹은 마스터를 막을 수 있는 건 오직 단 한 사람뿐이었다.
전대 마스터 바실리를 이렇게 보고 싶은 적은 처음이었다.
* * *
구조대에게서 곧 시라쿠사 섬에 도착한다고 연락이 왔다.
소식을 들은 각 아카데미 선발 멤버들은 모두 숙소 앞에서 구조대를 기다렸다. 숙소 생활을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들떴다.
부우우웅ㅡ.
여러 척의 배들이 당당한 자태를 자랑하며 섬으로 다가왔다.
최신 마나 엔진을 탑재한 갤리온선은 거센 물살 속에서도 빠르게 움직였다. 그 무엇도 배가 가는 길을 멈추지 못했다. 마치, 미노타우르스가 돌진하는 것 같았다.
갤리온선에 달린 돛에는 여러 제국을 상징하는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리투아, 아르메, 시에라 그리고 카토 제국.
신성 기관을 제외한 모든 제국들이 구조대를 꾸리는 데 도움을 주었다. 이들은 힘들게 모은 유망주들을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그건 수지 타산이 맞지 않는 장사였다.
“저기, 저기를 보세요. 구조대의 배가 보입니다! 우린 드디어 살았어요.”
누구보다 앞에 있던 한 파르테논 아카데미생이 기쁨에 겨워 소리쳤다. 얼마나 좋았는지 옆에 있던 다른 아카데미생을 무심코 껴안았다.
평소였다면, 화를 내며 그 손길을 뿌리쳤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만은 달랐다.
이제는 숙소에서 머물지 않아도 된다는 해방감에 눈을 감아 주었다. 아무리 안전을 위한 조치라고 해도, 숙소 근처에만 있는 건 너무 지루했다.
특히, 호사를 누리는 게 당연하던 귀족들에게 더욱 고역이었다.
우우우우웅ㅡ.
구조대를 실은 배는 순식간에 섬 가까이 도착했다. 어느 정도 거리가 좁혀지자, 돌연히 배가 움직임을 멈췄다.
“뭐 하는 거지. 무슨 문제라도 생겼나?”
“글쎄? 우리를 구조하러 오는 건 틀림없어 보이는데.”
기대감에 차 있던 아카데미생들은 혼란에 빠졌다. 아카데미 관계자들을 구하러 온 배라면 저기서 멈춰서는 안 되었다.
의문은 오래 가지 않았다.
“거기서 기다려라! 곧 다리를 만들 것이니. 그걸 건너오면 된다! 일단 뒤로 물러서라!”
가장 앞선 배에서 한 남자가 쩌렁쩌렁 소리를 질렀다. 꽤 거리가 있는데도 귀에 때려 박는 것 같이 잘 들렸다.
“다리를 만들 수 있다고?”
한 아카데미생이 중얼거렸다.
그 말이 맞았다.
시라쿠사 섬에는 배를 정박할 만한 공간이 없었다.
신성 기관이 위치한 이곳은 쉽게 탈출할 수 없는 구조였다. 신성 기관의 독한 훈련을 견디지 못하고 도망가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델포이 아카데미가 산으로 막혀있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모두 물러서 줄래? 지금부터 다리를 만들 테니까.”
에메리아가 일행을 뚫고서 가장 앞으로 나왔다. 그녀는 다른 이들과 다르게 우렁찬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모를 수가 없었다. 그건, 하나뿐인 자신의 동생이었으니.
에메리아 식 특제 마법 – 네레이드
에메리아와 구조선 남자의 마법은 동시에 펼쳐졌다.
하늘색 바다는 에메리아와 남자의 마나를 가득 머금었다. 그러자 거센 파도가 치던 바다가 순식간에 잠잠해졌다.
“길을 만든다며? 델포이 아카데미 교수란 사람이 설마 거짓말을….”
몇 분 동안이나 고요한 바다를 보며 한 아카데미생이 불만을 터트렸다. 그가 입고 있는 제복은 분명 파르테논 아카데미의 것이었다.
뭔가 대단한 일을 할 거라고 앞에 나섰지만, 아무 일도 없었다.
항상 델포이와 비교되었던 파르테논의 아카데미생이 그 틈을 놓칠 리 없었다. 스트레스를 받는 건 자신들이었으니, 너희들도 그 고통을 좀 맛보라는 생각이었다.
촤르르르륵ㅡ.
그러나 아카데미생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기적이 일어났다.
잠잠하던 바다가 두 쪽으로 갈라진 것이다.
길을 만들 거라는 말에 이들은 무언가 발을 디딜 곳을 만들 거라고 생각했다. 그게 상식적인 마법사의 판단이었다.
깊은 바다가 스스로 길을 만들어주는 건 전설 속에서나 볼 수 있는 이야기였다. 그걸 본 아카데미의 모두는 입을 다물 줄을 몰랐다.
이곳에서 제대로 탈출하기만 한다면 한 달은 자랑할 만한 마법이었다.
“자, 신속하게 구조선에 타세요! 아카데미 구분 같은 건 지금 상관없습니다. 이곳을 벗어나는 게 먼저입니다.”
마법을 유지하는 에메리아 대신 로즈가 나섰다.
이 기적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단 한 순간도 정신이 흐트러지면 안 돼 보였다. 만약, 배로 향하는 도중 길이 없어진다면 그때야말로 대참사가 벌어질 게 분명했다.
그런 일은 절대로 현실이 되어서는 안 되었다.
“우와아아아…!”
“이거 봐. 이거 너무 이쁘지 않아? 물고기가 헤엄치는 게 다 보여!”
“봐봐, 저 교수님 푸른 머리와 푸른 눈동자잖아. 포세이돈 가문 출신이었어!”
로즈의 걱정과는 달리 이미 대부분의 아카데미생들은 앞으로 튀어 나간 지 오래였다. 그중에서는 에메리아에게 불만을 터트리던 마법사도 포함되어 있었다.
애초에 마법사들은 새로운 마법이나 기이한 현상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건 과거와 현재로는 나뉘지 않는 마법사들만의 독특한 특성이었다.
“마법이란 대단하군.”
“마법사들을 꼭 따라잡아 주겠어.”
검사들은 마법사들과 확실히 달랐다.
믿지 못할 일이 일어났는데도 자리를 벗어나지 않았다. 바다가 갈라진 것에 놀라긴 했으나, 그게 다였다. 담담하게 상급자인 검호들의 명령을 기다렸다.
“이렇게 성장해준 너희들이 자랑스럽다.”
천검 학원의 검호들은 그 모습을 보면서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부동심(不動心)
이것이야말로 검사들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이었다. 고대와 다르게 현대의 검술은 마법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 편입학한 한 검사가 검마법이라는 흥미로운 기술을 사용하긴 했다.
그러나 그것 역시 미완의 기술이었다.
‘그래. 너희들은 충분히 마법사들을 이길 수 있다.’
검호들의 세대는 마법사를 뛰어넘지 못했다. 그러나 매일같이 피땀 흘리며 노력하는 검사들은 달랐다. 그들에게는 재능이 넘쳤고 분명한 미래가 있었다.
검사들이 이대로만 성장한다면 다른 길을 걸어갈 수 있으리라 믿었다.
“우리들도 이동한다. 저 검 표식이 있는 곳이 우리가 갈 곳이다. 움직여라. 검사들이여.”
검호들의 명령이 떨어지자 그제야 검사들이 움직였다. 그들은 마법사들과 다르게 오와 열을 맞춰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이미 시간의 모래에 잊혔지만, 시에라 제국은 검사가 아닌 기사들의 제국이었다.
콰아아앙ㅡ.
“탈출하는 자들을 잡아라! 저들은 레아 교도들이다. 절대로 가만두지 말아라!”
편안하게 바닷속을 체험하던 분위기는 낙원교도들의 등장에 순식간에 뒤바뀌었다. 호기심 천국은 살벌한 탈출기가 되었고, 아카데미생들이 안전하게 갈 수 있도록 교수들이 뒤를 막아섰다.
유피테르 역시 교수들과 함께 낙원교도들을 막아섰다. 오스티안에게서 경고를 들었긴 했으나 정말로 들이닥칠 줄은 몰랐다.
‘4개의 국가를 상대로 전쟁이라도 해보겠다는 건가?’
시라쿠사 섬을 간단히 손에 넣은 낙원교는 성명서를 내며 시간을 끌었다. 마치, 성국이 전쟁의 불화로 더럽혀지는 걸 보지 못하겠다는 태도였다. 그 후, 교황이 서거했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거치적거리는 걸 치워버리자 낙원교의 본색이 드러냈다.
낙원교도들은 자신들을 신의 선택을 받은 신인이라고 부르며 레아교를 탄압했다. 교황과 성녀를 잃고 성기사들도 여럿 배신한 상황에서 낙원교의 진격을 막을 방법은 없었다.
“이곳에 성국 해방 전선이라는 위험한 놈들이 숨어있다는 첩보가 들어왔다. 샅샅이 수색해! 우리는 신에게 선택받은 자들이다. 두려워하지 마라.”
성국 해방 전선이라는 말에 낙원교도들의 눈빛이 사납게 바뀌었다.
이교도 놈들은 신의 선택을 받지 못한 불쌍한 자들이었다. 신에게 버려진 자들을 불쌍히 여기는 건 당연했다. 그러나 성국 해방 전선이 상대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멸망해가는 레아교의 불씨를 살린 건 신성 기관의 오스티안이었다. 부기관장이었던 그는 남아있는 사람들을 규합해 성국 해방 전선을 만들었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기라도 했는지, 성국 해방 전선은 나날이 켜져 갔다. 이빨에 낀 가시 같은 그들을 낙원교가 가만히 둘리 없었다.
레아교가 이단 심문을 했던 것처럼, 낙원교도 비슷한 방법을 사용했다.
“누가 먼저 신의 은총을 받을 거지?”
낙원교도 중 하나가 길을 가로막은 교수들에게 선전포고를 날렸다. 교류전을 위해 선발된 교수들을 앞에 뒀어도 하나도 두렵지 않은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