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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도 포기한 대공자-137화 (137/265)
  • 낙원교(2)

    * * *

    은은한 달빛이 세상을 포근하게 덮어주는 깊은 밤.

    유피테르는 다른 이들과 달리 잠자리에 들지 않았다. 누워있는 여동생을 생각하면 오려던 잠기운도 슬그머니 도망쳐버렸다.

    그는 잠을 청하는 대신 깨어날 기미가 없는 여동생을 정성스레 보살폈다.

    “리나…. 빨리 일어나줘. 대체 무슨 일을 겪고 있는 거니.”

    카테리나는 배정된 숙소의 방에서 조용한 잠에 빠져있었다.

    유피테르는 치유사들이 항시 대기하고 있는 병실을 구하려고 했으나, 현재 상황에서는 무리였다.

    돈도 충분한 명문 가문의 자제들이었으나, 뿌리째 흔들리는 성국에는 여유가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여동생을 데리고 얼음성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유피테르에게는 충분히 그럴 힘이 있었다. 오흐트와 엑시가 있다면 어떠한 병도 무섭지 않았다.

    그러나 델포이 동료들의 눈을 피할 방법이 없었다.

    유피테르는 어쩔 수 없이 응급 처치라도 확실히 하기로 했다. 오흐트가 한 차례 진료를 끝낸 후였으니 여기서 더 악화할 리는 없다고 믿었다.

    오흐트의 처치는 두말할 필요 없을 정도로 완벽했다.

    그녀는 교황도 두 수 접어주는 실력자였다. 아니, 고대 마법사 중에서도 그녀와 견줄 수 있는 치유사는 존재하지 않았다.

    가장 중요한 건 카테리나의 안전이었다. 이를 위해 결계를 쳐서 마족이 접근하는 걸 막았다. ‘그녀’에게 직접 배운 삼중의 결계는 마족의 할아버지가 와도 뚫을 수 없었다.

    그걸로도 부족해 케팔로스를 항상 펼친 채로 행동했다.

    끝을 모르는 마나를 가지고 있는 그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마족을 능가하는 칼리스토들도 보유하고 있는 마나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었다. 심지어 마왕 티폰 역시 방대한 마나를 가지고 있었지만, 무한하지는 않았다.

    유피테르는 세상의 법칙에서 벗어난 유일한 인간이었다.

    지이이잉.

    케팔로스가 숙소 근처를 서성이는 한 사람을 감지했다. 방 안에 있는 데도 밖이 훤히 보였다. 신의 섭리를 본뜬 마법은 완벽한 성능을 자랑했다.

    숙소에 들어올까 고민하던 남자는 이내 문을 열고 숙소로 들어왔다. 하지만, 아직 밤손님이 유피테르나 카테리나를 노린다고 확실할 수는 없었다.

    델포이 선발대 전부가 이 숙소에 머물고 있었으니.

    남자는 어느새 카테리나의 숙소가 있는 층까지 올라왔다. 그는 한 방향으로만 직진했다. 속도는 느렸으나 망설임 없이 목표를 향하는 듯했다.

    그 방향의 끝에는 카테리나가 머무는 숙소만 존재했다.

    터벅, 터벅, 터벅.

    적막한 숙소였기에 남자의 발소리가 더욱 크게 들렸다. 이제는 마나 감지를 사용하지 않아도 인기척이 느껴졌다. 불청객은 인기척을 숨길 노력도 하지 않았다.

    ‘당신은 왜 여길 오려는 걸까?’

    유피테르는 이미 남자의 정체를 꿰뚫고 있었다. 한 번 기억한 마나를 케팔로스가 놓칠 리 없었다.

    하지만, 그가 이곳으로 향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짐작도 하지 못했다.

    탁ㅡ.

    카테리나에게 배정된 방 앞에서 남자는 발을 멈췄다. 역시, 유피테르와 여동생이 있는 이곳에 남자의 목적지인 게 틀림없었다.

    유피테르는 섣부르게 마나를 끌어 올리지 않았다.

    오흐트에게 치료를 받았다고 해도 여동생의 몸 상태는 정상이 아니었다. 마왕의 심장이라는 폭탄을 지닌 그녀에게 어떤 악영향도 가게 하고 싶지 않았다. 마왕의 심장이 지금은 카테리나를 따르는 건 사실이었다.

    그러나 유피테르는 거짓된 평화를 믿지 않았다.

    마왕의 심장은 시트시거가 몇 년 동안 준비한 계획의 핵심이었다. 어느 순간 돌변해서 카테리나를 노린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마족이 가진 아티팩트들은 어딘가 나사가 빠져 있는 것들뿐이었다.

    마족에게 뒤통수를 맞는 쓰라린 아픔은 한 번이면 충분했다.

    두근ㅡ.

    유피테르는 긴장을 풀지 않고 문을 노려보았다.

    끼이이익.

    문이 천천히 열렸다.

    “도, 도와주십쇼. 유피테르 교수.”

    문을 열고 나타난 건 신성 기관의 부기관장 오스티안이었다.

    잿빛의 머리카락은 군데군데 불탄 흔적이 남아 있었다. 며칠이나 씻지도 못했는지 지독한 냄새가 났다. 단아함을 자랑했던 흰색의 제복은 이미 넝마나 되어 걸레로도 쓰지 못할 듯 보였다.

    평상시 그의 모습을 떠올릴 수 없을 정도로 수척해진 모습이었다.

    “돌아가, 네게 줄 도움은 없다.”

    유피테르는 오스티안의 도움 요청을 단칼에 거절했다.

    위험하다.

    결계 때문에 방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는 오스티안을 보자 직감이 크게 속삭였다.

    그는 위험한 상황에 굳이 발을 들이는 취미 따위는 없었다. 달의 몰락 사건도 델포이에서 마족들을 사냥한 것도 단 한 가지 이유에서였다.

    그의 테두리 안에 있는 사람을 분수도 모르고 건드렸기 때문이었다.

    ‘역시 교황님의 이야기가 맞았어!’

    자리에서 일어난 유피테르를 보며 오스티안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가 이야기를 들어줄 거라는 상상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졌다. 들릴 리 없는 축포와 승리의 함성이 쏟아지는 것만 같았다.

    무슨 이유인지 방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래도 집히는 바가 없지는 않았다. 신성 기관의 부기관장쯤 되면 모르는 마법을 보아도 유추하는 게 가능했다.

    이러한 현상은 보통 강력한 결계 때문에 일어나곤 했다.

    여러 겹의 결계를 자유자재로 펼치는 데 평범한 마법사일 리 없었다. 부기관장인데도 결계를 어떻게 파훼해야 할지 깜깜했다.

    그러나 환상은 손에 잡히지 않았다.

    덜컹.

    문 쪽으로 걸어온 유피테르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문을 닫으려고 했다.

    그 바람에 오스티안의 마음이 급해졌다. 여기서 유피테르의 마음을 돌리지 못하면 성국은 끝장이었다.

    글자 그대로 크레이타는 더는 성국이라고 칭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잠시만요. 유피테르 교수. 아니 대행자. 당신 역시 창조신 레아와 관련 있는 자가 아닙…!”

    문을 닫으려는 그의 손을 멈춘 건 오스티안의 절규였다.

    “조용히 해. 리나가 깨면 책임질 거야?”

    유피테르는 시동어도 없이 마법을 사용해 오스티안을 침묵시켰다. 그리고서는 여동생에게 다가가 상태를 확인했다. 혹시라도 그녀에게 변화가 있으리란 희망을 품고서.

    ‘역시, 이 정도로 일어날 리는 없나.’

    정적을 깨는 큰 소리도 여동생에게 변화를 주지는 못했다.

    유피테르는 아쉬움을 삼키고 다시 오스티안에게로 다가갔다. 그를 도와주고 싶은 생각은 없었으나 대행자라는 단어가 신경 쓰였다.

    그건 교황을 제외하고는 알아서는 안 될 단어였다.

    “내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 그럼 고개만 끄덕여. 소리를 내면 죽는다.”

    완전히 달라진 유피테르의 분위기.

    그러나 오스티안에게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유피테르의 마음이 잠깐이나마 바뀐 이 순간이 기회였다. 성국과 신성 기관을 위해서라면 알량한 자존심 따윈 아무것도 아니었다.

    오스티안은 목뼈가 부서질 정도로 머리를 위아래로 흔들었다.

    “그렇단 말이지?”

    반응을 확인한 유피테르는 오흐트를 불렀다.

    이름을 부를 필요도 없었다.

    연결된 패스를 통해 유피테르의 상태를 알아챈 오흐트가 금세 나타났다. 칼리스토들에게 잠이란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행동일 뿐이었다.

    “무슨 일이야 마스터? 저건 부기관장 오스티안이네. 예상치 못한 조합인데.”

    “이야기를 듣는 동안 카테리나를 지켜줘.”

    “그 정도야 쉽지. 다녀와.”

    오흐트는 유피테르가 앉아있던 의자에 앉더니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그걸 확인한 유피테르는 오스티안을 데리고 카테리나의 방에서 사라졌다.

    “대행자라는 말 어디서 들었지?”

    “악! 악! 드디어 목소리가 나오는군요. 그전에 이곳이 확실하게 안전한지 확인하고 싶군요.”

    “여긴 성녀가 비밀 거점으로 사용하던 곳이다. 아는 사람은 세 명뿐이지. 대행자라는 단어를 어디서 들었는지 이야기나 해.”

    유피테르는 오스티안을 차갑게 쏘아붙였다. 하지만, 오스티안은 하늘에서 내려온 밧줄을 강하게 붙들었다.

    “교황님께서 유언을 남기셨습니다. 당신께 무슨 일이 생기면 유피테르 교수를 찾아가라고.”

    유피테르는 오스티안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혼란에 빠진 성국에서 누가 아군이고 누가 적인지 판단하는 게 어려웠다. 게다가 디오의 마법으로 교황의 혼을 불러냈을 때, 이런 이야기는 일언반구 없었다.

    “웃기는군. 라엘은 그런 말을 할 정도로 서투르지 않아.”

    교황의 인격과는 별개로 유피테르의 정체에 대한 걸 퍼트릴 수 없었다. 유피테르가 교황에게 건 저주가 그러지 못하도록 막았으니까.

    아스라엘를 믿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유피테르와 ‘그녀’에 대한 이야기가 밖으로 새어나간다면 걷잡을 수 없는 일이 될 게 뻔했기에. 최악의 경우 세 번째 대륙 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었다.

    “이게 교황님께서 남기신 편지입니다.”

    어떻게 해야 신뢰를 얻을까 고민하던 오스티안은 품속을 뒤져 편지를 꺼냈다. 편지 봉투에는 교황만이 쓸 수 있는 직인이 찍혀있었다.

    그건 어떠한 마법으로도 복사할 수 없는 신이 축복한 증거였다.

    “이런 식으로 마법의 허점을 찾아낼 줄은 몰랐네. 대단해 아스라엘.”

    오스티안이 건네준 편지를 빠르게 훑은 유피테르가 분노를 터트렸다.

    일단, 편지는 교황의 필체로 쓰여 있었다. 교황의 신성 마나까지 들어있어 진품이 확실했다.

    편지에는 레아교의 신도로서 어떻게 행동하는 게 옳은가에 대한 교황의 고민이 적혀 있었다. 그러나 성국 특유의 암호를 사용하면 한 문장이 되었다.

    신의 대행자 유피테르 아르테미스를 찾아라.

    아스라엘은 대행자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유피테르에게 도움을 청하라고만 되어 있었다.

    간단한 방법으로 유피테르가 건 저주의 허점을 찾아내 버린 것이다.

    만약, 처음부터 이 편지를 준비했던 거라면 교황은 미래에 일어날 사건을 알고 있었다는 뜻이 되었다.

    편지는 교황이 죽고 유피테르가 성국에 있어야만 가치가 생겼으니까.

    애초에 델포이에 마족이 있다는 이야기를 가져온 건 성녀 프레이야였다. 프레이야는 교황을 할아버지처럼 따랐으니, 그 정도 부탁은 충분히 들어줄만 했다.

    ‘성배의 위치를 알려준 대가를 갚으라고 하는 거야? 좋아. 라엘. 한 번 정도는 내기에서 져줄게.’

    원칙대로라면 디오의 마법을 거절할 방법은 없었다.

    다만, 신의 곁에서 잠든 교황이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그녀’와 계약한 칼리스토라고 하더라도 신의 뜻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마나란 신이 만든 기적이니까.

    “그래서 내게 부탁하고 싶은 게 뭔데? 템플 기사와 신성 기관의 신관들이라면 자력으로 낙원교를 처리할 수 있을 텐데.”

    “그게 꼭 그렇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낙원교의 사도와 사제들은 더는 인간이라고 할 수가 없었습니다.”

    유피테르의 말에 오스티안은 그날의 공포와 굴욕을 되새기며 낙원교에 대해 설명했다.

    왜 크레이타의 신관들이 낙원교를 물리칠 수 없었는지.

    왜 성녀를 먼저 노렸는지.

    어째서 교황이 살해당한 것인지.

    모든 의문이 오스티안의 이야기를 듣자 하나둘씩 해결되었다. 그의 이야기는 눈물 없이 들을 수 없을 정도로 처절했으나 유피테르는 담담했다.

    살기 위해서 발버둥을 치는 건 흔히 있는 이야기였다.

    “사도가 전대 교황이고 자신을 거부한 신에게 반역을 시도한 거라고?”

    “맞습니다. 그래서 누구보다 세 개의 기둥의 허점을 잘 알고 있어 대응할 수가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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